미디어렙 제정을 둘러싼 논의가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조중동방송 광고 직접영업 금지'를 요구하는 시민사회의 목소리가 미디어렙법 제정의 '걸림돌'인 양 일부 언론과 단체들에 의해 왜곡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조중동방송에게 광고 직거래를 허용해서 안된다"는 주장은 시민사회단체, 언론노조, 언론단체들에게 '상식' 혹은 미디어렙법 제정의 '원칙'으로 통했다. 그런데 어쩌다 이런 '상식'과 '원칙'이 공격받게 된 것일까? 복잡해 보이지만 핵심은 간단한 그 사정을 살펴보자.
"조중동 광고직거래 반대"가 미디어렙의 '걸림돌'?미디어렙이란? |
미디어렙은 방송광고를 대행하는 제도다. 즉, 지상파 방송사들이 뉴스의 영향력을 악용해 약탈적인 광고영업을 할 수 없도록 광고영업을 방송사에서 분리한 것이다.
지금까지는 한국방송광고공사(KOBACO)가 모든 지상파 방송사의 광고를 대행해 왔으나, 2008년 KOBACO 독점 체제가 헌법재판소로부터 '직업선택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이유로 헌법불합치 판결을 받으면서 새로운 법이 필요하게 됐다.
시민단체와 언론단체들은 지상파와 똑같은 편성을 할 수 있는 종합편성채널도 미디어렙에 의무적으로 광고를 위탁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반면 한나라당과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 등은 조중동종편이 직접 광고영업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갈등을 빚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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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2일 민주언론시민연합(민언련)은 <미디어렙법 '야합' 말라>는 논평을 냈다. 전날 21일 국회가 '정상화'되면서 여야가 다시 미디어렙법 논의를 시작하자, 그에 대한 입장을 밝힌 것이다.
핵심 내용은 "조중동종편이 직접 광고영업을 할 수 있는 어떤 여지도 주어서는 안된다", "미디어렙은 정부, 방송사, 광고주로부터 독립돼야 한다", "광고취약미디어에 대한 지원책이 마련돼야 한다"는 게 요지다.
그동안 시민사회에서 나왔던 요구와 달라진 것 없는 내용으로, 민주통합당이 '타협'이라는 이름으로 한나라당의 부당한 요구를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주문을 덧붙였다.
민주당은 지난 10월 한나라당에 밀려 조중동방송이 향후 2년간 광고 직접영업을 할 수 있는 내용의 타협안을 냈다가 거센 비난을 받고 철회한 적이 있다. 논평은 민주통합당이 이같은 일을 반복해서 안 된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그런데 이를 두고 23일 종교방송 등 일부 언론들이 '민언련이 돌연 법안 처리에 제동을 걸고 나서 그 배경에 의문이 일고 있다', '민언련이 미디어렙 입법을 미뤄야 한다고 주장했다', '민언련이 미디어렙 연내 처리에 반대해 파문이 일고 있다'는 보도를 내보냈다. 이 가운데는 최소한의 팩트 확인조차 거치지 않은, 악의적인 '음모론'에 가까운 주장도 있었다.
이들은 민언련 논평의 딱 한 대목을 문제삼아 핵심을 왜곡했다. 논평은 미디어렙 제정의 원칙을 강조한 뒤, "(민주통합당이)한나라당의 위세에 눌려 미디어렙법안을 제대로 만들어질 수 없는 상황이라면 최악의 경우 내년 총선 이후를 도모하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덧붙였다.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둔 이 부분이 "연내처리 제동 파문"으로 둔갑한 것이다.
이날 지역방송협의회도 민언련을 직접 거명하지는 않았지만 '일부에서 미디어렙법 연내 처리를 가로막는 위험천만한 주장을 하고 있다'며 비판했다. 이들의 주장에는 미디어렙 제정의 핵심은 "연내처리"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눈치 빠른 독자들은 알아채셨겠지만, "연내처리"에 목소리를 높이는 쪽은 종교방송, 지역방송이 주축이다. 즉, 광고취약 매체들이다. (물론 언론단체 가운데도 이들의 주장을 지지하는 곳이 없지는 않다.)
이런 광고취약 매체는 미디어렙이라는 제도의 보호가 필요한 게 사실이고, 미디어렙법 제정이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이들의 불안감이 커지는 것도 당연하다.
광고취약매체를 지원해야 한다는 데는 시민단체는 물론 여야가 모두 공감하고 있다. 그래서 미디어렙법 어떻게든 '빨리' 제정되는 게 종교방송이나 지역방송들의 입장에서는 매우 중요하다. 그 입장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시민단체들이 미디어렙법 제정의 핵심 원칙을 '연내처리'에 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여야 합의 이후 한나라당이 들고 나온 미디어렙 법안을 보면, 민주통합당을 향해 무조건 "연내처리"를 목표로 대여 협상에 나서라고 주문하는 내용이다.
조중동방송과 SBS를 위한 '위험천만'한 한나라당 법안한나라당의 핵심 요구는,
△ 종합편성채널 미디어렙 의무 위탁을 향후 2년간 유예
△ 민영렙에 대한 지주회사의 출자는 금지하되 방송사의 최대지분은 40% 허용
△ 이종매체 간의 크로스미디어 판매를 허용(단, 지상파계열 방송채널사용사업자(PP)의 판매는 한시적으로 금지) 이다.
이 주장의 함의를 아주 쉽게 풀면 이렇다.
△ 조중동종편은 앞으로 2년 동안 광고를 직접 영업할 수 있다. (2년의 유예기간 후에도 조중동종편이 1공영 1민영 체제 아래 묶일 것인지 장담하기 어렵다.)
△ SBS는 미디어렙 지분 40%를 출자함으로써 사실상 미디어렙을 소유할 수 있다.
△ 사실상 'SBS렙'이 될 민영미디어렙은 다양한 방식의 광고판매를 할 수 있고, 공영미디어렙보다 경쟁에서 유리하게 된다. (만약 2년 후 조중동종편이 1공 1민 체제에 묶이지 않고, 각각 자사 미디어렙을 갖는다면 신문-방송을 연계한 약탈적 광고영업이 계속되는 것이다.)
한나라당이 내세운 안은 조중동종편에게는 충분한 기간 동안 광고 직접영업을 할 수 있는 특혜를 주는 한편, SBS에게는 자사 미디어렙을 갖는 효과를 주는 안이다. '방송공공성'을 추구하는 시민단체 입장에서 보면 어느 것 하나 받을 수가 없다.
조중동종편의 직접 광고영업이 특혜라는 점은 여야 스스로도 인정했다. 지난 10월 여야는 조중동종편의 직접 광고영업을 일정 기간 허용하는 쪽으로 논의하면서 모두 '신생매체라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는 논리를 폈다. 일종의 '유치산업 보호론'으로, 직접 광고영업을 허용하는 목적이 '조중동종편 안착'에 있음을 분명히 밝힌 셈이다.
시민단체들은 조중동종편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날치기로 만들어지고, 온갖 편법과 특혜로 먹고 사는 조중동종편을 퇴출시키기 위한 운동을 벌이고 있다. 그런데 '특혜 중의 특혜'로 꼽히는 조중동종편의 직접 광고영업을 시민단체가 '연내처리'가 중요하다는 이유로 받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한나라당의 주장이 왜 'SBS를 위한 안'인가 하는 데에는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현재 여야는 물론 시민단체들도 미디어렙의 수를 '1공영 1민영' 체제로 가는 데에 동의하고 있다. 이럴 경우 공영미디어렙은 현재의 한국방송광고공사가 전환하는 방식으로 설립되고, KBS, MBC, EBS가 공영미디어렙에 강제 위탁된다. MBC 측이 여기에 반발했지만, 최근 공영미디어렙 위탁에 '동의'했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디어렙에 방송사 출자를 40%까지 허용하게 되면 사실상 SBS가 민영미디어렙의 최대지분 방송사가 될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SBS가 40% 지분을 소유한 민영미디어렙이 SBS로부터 독립적인 미디어렙이라고 할 수 있을까? 전문가들은 이 미디어렙은 그냥 'SBS렙'이나 다름없다고 말한다.
'제작·편성과 광고의 분리'라는 미디어렙의 근본 취지에서 볼 때, 어떤 방송사든 미디어렙을 실질적으로 소유하게 해서는 안된다. 민언련의 경우는 방송사의 미디어렙 출자 자체를 반대하는 입장이다.
하물며 40%의 지분을 특정 방송사이 갖도록 하는 것은 미디어렙 제도의 근본을 흔드는 요구로, 시민단체가 결코 받을 수 없는 주장이다.
한나라당이 이런 비상식적인 요구를 하는 배경도 의문이다. 지난 12월 11일 청와대는 SBS 사장 출신의 하금렬씨를 대통령실장에 앉혔다. 앞서 9월에는 SBS 보도본부장 출신의 최금락씨가 청와대 홍보수석비서관이 됐다. 한나라당이 '미디어렙 방송사 출자 40%'를 강경하게 밀고 나온 게 이런 인사와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일까?
'빨리'도 중요하지만 '잘'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하다미디어렙법의 조속한 제정은 매우 중요한 문제다. 미디어렙법이 방치되는 사이 SBS는 자사 미디어렙을 차려 직접 광고영업에 나서겠다고 겁박하고 있고, MBC도 SBS의 뒤를 따를 태세다.
조중동방송과 지상파 방송사들이 광고 경쟁을 벌이게 되는 상황을 생각하면 매우 우려스럽다. 직접적인 이해당사자인 종교방송이나 지역방송사들로서는 생존에 위협을 느끼고, '미디어렙법 연내 처리'가 더욱 중요한 문제로 인식될 것이다.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광고취약매체들과 시민단체, 노조가 힘을 합쳐 싸워야 할 대상은 조중동방송을 위한 '황당한 안'을 들고 나와 압박하는 한나라당이다.
가뜩이나 수적으로 열세인 민주통합당에게 무조건 '연내처리'를 주문하는 게 현실에서 어떤 의미가 되겠는가? 협상에서 한나라당에 질질 끌려가서라도 연내에 법을 만들어 내라는 얘기가 된다.
실제로 미디어렙법 논의가 다시 시작되면서 민주통합당 일부 의원이 '연내 처리'를 위해 한나라당의 부당한 요구를 거의 모두 들어줄 생각을 한다는 얘기가 기자들 사이에서 나돌았다.
지금은 '조중동방송 광고 직거래 금지', '미디어렙의 독립성 보장', '취약매체 지원'이라는 원칙을 갖고 한나라당을 압박하면서, 최악의 상황을 대비하는 지혜가 필요하지 않을까?
이미 민주통합당은 민주당 시절에 미디어렙 입법이 무산될 때를 대비해 취약매체 지원을 위한 특별법을 만들어 놓았다. 물론 이 법이 근본 대책도 아니고, 그 내용이 '부실하다'는 비판도 알고 있다.
그래서 있는 힘을 다해 연내에, 올바른 방향의 미디어렙법을 통과시키는 게 여전히 최선이다. 그러나 한나라당이 끝까지 자신들의 부당한 주장을 꺾지 않을 경우, 여기에 굴복해 조중동방송과 특정 매체를 위한 '누더기' 미디어렙법을 만드는 데 '공범'이 돼서는 안된다.
우리는 한나라당에 굴복할 것이 아니라 미디어렙법 무산의 책임을 한나라당에게 엄중하게 묻고, 다가오는 총선에서 심판해야 한다. 아울러 다른 한편으로 특별법 제정 등 모든 가능한 방법으로 취약매체를 지원하고, SBS·MBC의 자사미디어렙 운영에 제동을 거는 방안을 모색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최선은 아닐지 모르지만, 적어도 '조중동방송 광고직거래 반대', '미디어렙 독립성 보장'이라는 대의를 꺾지 않는 길이며 궁극적으로 최선에 이르는 길이다.
여전히 상황이 복잡하게 느껴지는 독자들에게는 이런 질문을 드린다. "민주통합당이 조중동방송에게 광고 직접영업을 허용해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이 질문에 '그렇다'고 답할 수 없는 분이라면, 미디어렙법 투쟁의 핵심 대상은 한나라당이고, 관철해야 할 최고 목표는 '연내처리'가 아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