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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보전과 원통보전

대웅보전 난간석 위의 원숭이상
 대웅보전 난간석 위의 원숭이상
ⓒ 이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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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법주사의 중심법당은 대웅보전이다. 대웅보전이 절의 한 가운데 위치하고 있고, 전각도 가장 크고 높기 때문이다. 대웅전은 정면 7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2층으로 되어 있으며, 높이가 19m나 된다. 같은 7칸이면서도 2층이 일층보다 폭이 좁아 비례가 맞고 안정감이 있다. 대웅보전으로 가려면 사천왕 석등을 지나 기단부의 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그런데 계단 난간석의 조각이 예사롭지 않다.

태극문양과 연꽃문양이 두드러진다. 태극은 도교사상에서 나오고, 연꽃은 불교에서 나왔는데, 이 둘이 불교건축에서 잘 어울린다. 그리고 난간석 상단에는 화강석으로 만든 원숭이 한 쌍이 놓여 있다. 이들 원숭이는 부처님을 호위하는 제후 또는 사자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원숭이는 예로부터 가의지물(嘉儀之物)로 봉후복록(封侯福祿)을 가져다주는 영물로 여겨져 왔다.

대웅보전 소조삼존불
 대웅보전 소조삼존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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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 앞 대웅전의 앞문이 닫혀 있다. 우리는 측면의 문을 통해 대웅전 안으로 들어간다. 내부에는 삼존불이 모셔져 있다. 임진왜란 후인 1624년 벽암대사가 대웅전을 중창하면서 조성한 것으로, 가운데 법신 비로자나불, 오른쪽에 화신 석가모니불, 왼쪽에 보신 노사나불이 있다. 일반적으로 대웅전에는 석가모니불이 주존불로 모셔져 있는데, 다른 배치를 하고 있다.

이들 삼존불은 높이가 5.5m, 허리둘레가 3.9m나 되는 대형 소조불이다. 비로자나불은 지혜의 상징으로 오른손으로 왼손을 감싼 지권인을 하고 있다. 석가모니불은 손을 땅바닥으로 향해 마귀를 굴복시키는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다. 노사나불은 오른손은 들어 시무외인을, 왼손은 내려 여원인을 하고 있다. 이들 삼존불은 흙으로 구워 만든 소조불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다고 한다.

원통보전
 원통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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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보전 옆에는 사모지붕을 한 단아한 형태의 원통보전이 자리 잡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정사각형 1층 건물로, 지붕은 중앙에서 4면으로 똑같이 경사가 진 사모지붕을 하고 있다. 지붕 꼭대기에는 석탑의 상륜부처럼 절병통(節甁桶) 장식을 했다. 절병통이란 지붕마루에 세우는 기와로 된 항아리 모양의 장식을 말한다. 원통전은 관음전의 다른 이름으로, 전각 안에는 앉은키 2.8m의 금칠한 목조 관세음보살상이 모셔져 있다.

원통보전 관세음보살좌상. 왼쪽에 남순동자, 오른쪽에 해상용왕이 보인다.
 원통보전 관세음보살좌상. 왼쪽에 남순동자, 오른쪽에 해상용왕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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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세음보살좌상은 머리에 화관을 쓰고 있으며, 화관 가운데 작은 부처가 조각되어 있다. 얼굴은 근엄한 듯하면서도 자비로운 웃음을 머금고 있다. 복장유물에서 나온 기록을 통해 이 불상이 순치 2년(1655년)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관세음보살상 좌우에는 시자인 남순동자와 해상용왕이 합장을 하고 기도를 올린다. 남순동자는 남방을 순회하면서 문수와 보현 그리고 53명의 선지식을 만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깨닫고 극락정토에 이르는 동자다. 해상용왕은 바닷길을 따라 관음보살을 인도한다.

진영각과 명부전

진영각의 세 조사
 진영각의 세 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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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보전 서쪽 산 밑으로는 진영각과 명부전이 있다. 진영각에는 법주사를 거쳐 간 큰스님들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진영각의 정면에는 세 분 조사스님의 영정이 있다. 가운데에 개산조 의신조사가 있고, 그 오른쪽에 진표율사, 왼쪽에 전법초조 태고선사가 있다. 그리고 벽암 국도대선사의 영정도 보인다. 근현대로 와서는 금오선사, 월탄스님 등의 모습이 사진으로 남아 있다.

진영각은 정면 7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1991년 지어졌다. 이 건물이 지어지면서 조사각에 있던 영정이 이곳으로 옮겨졌다. 조사각은 원래 선희궁원당을 빌어 사용되었으나, 진영각이 마련되면서 나한전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런데 이곳 진영각의 그림과 사진의 수준이 별로 높지 않다. 스님들의 표정도 그렇고 회화적인 기법도 그렇다. 불교미술의 맥이 이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명부전
 명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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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미술의 전통이 스님들을 통해 연면히 이어져야 하는데, 중간에 그 맥이 끊어진 것이다. 서양의 수도원이나 티베트 불교에서는 이콘이나 만다라를 그리는 스님들의 위상이 높은데 우리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참선을 통해 깨달음에 이르는 선불교가 강조되면서, 불교음악과 불교미술이 소홀하게 대접받은 측면이 있다. 불교에서는 계정혜(戒定慧) 삼학도 중요하지만 예술도 무시할 수 없다.

진영각 옆에는 명부전이 있다.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시왕이 모셔져 있다. 지장전의 북쪽으로는 삼성각이 있다. 이곳에는 칠성, 독성, 산신이 탱화형태로 모셔져 있다. 이들을 보고 나서 우리는 다시 대웅전 앞으로 해서 나한전으로 간다. 나한전은 원래 영조의 후궁이었던 영빈이씨의 원당으로 선희궁원당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이 조사각이 되었다가 다시 나한전이 된 것이다.

나한전이 된 선희궁원당

나한전이 된 선희궁원당
 나한전이 된 선희궁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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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영빈이씨의 원당이 어떻게 이곳에 생기게 되었을까? 영빈이씨는 영조의 후궁으로 사도세자를 낳은 사람이다. 그리고 그녀의 신위를 모신 사당을 선희궁(宣禧宮)이라 불렀다. 영빈이씨는 영조와의 사이에서 사도세자로 알려진 장헌세자, 화평옹주, 화협옹주, 화완옹주를 낳았다. 그런데 장헌세자가 1762년 28세의 나이로 죽음을 당하게 된다. 이때 영빈이씨도 세자를 고변(告變)할 수 밖에 없었다. 자식이 반역을 했다고 고발하는 어미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아마 그때의 죄를 속죄하고 싶어 영빈이씨는 속리산 법주사를 찾았던 것 같다. 그리고 그녀가 불공을 드리며 묵었던 집이 선희궁원당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역사적인 기록에서는 그런 내용을 확인할 수 없다. 기록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선희궁원당은 바깥에 담이 있고, 바깥문을 통해 안채로 들어갈 수 있다. 담벼락 아래에는 2층의 화강석 축대가 쌓여있고, 그 위로 돌과 흙을 쌓으면서 예쁘게 치장했다. 벽에는 또한 기쁠 희(囍)자와 목숨 수(壽)자가 새겨져 있다. 이러한 양식은 경복궁과 창덕궁 후원에서 찾을 수 있다.

선희궁원당의 담벽: 목숨 수(壽)자가 보인다.
 선희궁원당의 담벽: 목숨 수(壽)자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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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선희궁원당의 본채 건물은 나한전이 되어 있다. 가운데 금칠한 비로자나부처님이 안치되어 있고, 그 좌우에 화려하게 색칠한 16나한이 좌정하고 있다. 이들은 염주, 주장자, 동물, 경, 금강저, 꽃 같은 지물을 가지고 있다. 동물로는 사자, 학, 표범 등이 보인다. 여러 군데 절을 다니면서 나한상들을 보는 것은 나에게 큰 즐거움을 준다. 그들의 표정이나 모습이 정말 재미있기 때문이다. 

나오면서 만난 당간지주

이제 우리는 경내에 외롭게 서 있는 고목을 지나 종고루 앞으로 간다. 이곳에는 범종과 북이 있다. 그렇지만 이들 모두 그렇게 오래된 것은 아니다. 종고루 오른쪽으로는 사천왕문이 있고, 이 문을 지나면 금강문이 나온다. 금강문으로 들어가기 전 오른쪽으로는 당간지주가 보인다. 철당간지주로 고려초인 1006년(목종 7년) 16m의 높이로 조성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1866년(고종 3년) 당백전 주조용으로 징발되어 사라지고 말았다.

법주사 철당간지주
 법주사 철당간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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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경 법주사에서 다시 철당간을 만들었고, 그것이 1972년 보수를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우리가 보기에도 예술성이 그렇게 있어보이지는 않지만, 절의 상징으로서 그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겠다. 당간지주를 보고 금강문을 지나면서 보니 금강역사와 문수, 보현보살이 보인다. 이들은 모두 1974년에 조성된 것으로 현대의 불교 문화유산이라고 볼 수 있다. 사자를 탄 문수보살과 코끼리를 탄 보현보살의 상호가 아주 원만해 보인다.

금강문을 나서면 이제 법주사 영역을 벗어나게 된다. 그런데 금강문 앞에서 색다른 석조물을 발견할 수 있다. 크기는 촛대석 정도인데, 팔각형이고 상단에 줄이 두 개 새겨져 있다. 용도를 정확히 알 수가 없다. 그 옆에는 강희 28년(己巳, 1689년) 전 주지의 3주기를 기념해서 화주(化主) 김애남(金愛男)이 세운 비석이 있다. 이것을 보고 다리를 건너면 다시 오리숲이 시작된다.

사하촌에서 바라 본 속리산
 사하촌에서 바라 본 속리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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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문화관광해설사와 함께 점심을 먹으러 사하촌으로 내려간다. 법주사 사하촌은 1970년대까지만 해도 굉장히 번창했는데, 이제는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속리산과 법주사는 한 때 충북 최고의 관광지였지만, 이제는 그 명성을 단양에 넘겨주고 있다. 사람들은 자연유산과 문화유산 외에 놀고 즐길 거리를 찾는데, 그 점에서 법주사는 한참 부족하기 때문이다. 시설투자 외에 대안은 없는데, 누가 이곳 법주사에 모험을 걸겠는가 말이다. 그나마 민관 협동사업으로 보은읍 길상리 지역에 정크아트를 전시하고 체험하는 J-Land가 들어서고 있으니 조금은 기대를 해볼 수 있을 것 같다.


태그:#대웅보전, #원통보전, #진영각, #선희궁원당, #당간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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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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