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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전 조선은 자전거의 나라였다. 자전거는 자동차 등 다른 교통수단을 압도했을 뿐만 아니라 통근, 통학, 업무, 레저 등 여러 분야에 두루두루 쓰였다. 그 시대 자전거문화는 어땠을까. 역사는 반복된다는데 앞으로 다가올 자전거 시대에 비슷한 모습으로 재현되진 않을까. 그 시절 그 풍경 속으로 들어가본다. - 기자 말

2005년 11월 중순 첫 자전거장거리여행에 나섰다. 경험도 없고, 동행자도 없었지만 '한 번 해보자'는 생각으로 나선 도전이었다. 갖은 고생을 했지만 그 끝은 달콤했다.
 2005년 11월 중순 첫 자전거장거리여행에 나섰다. 경험도 없고, 동행자도 없었지만 '한 번 해보자'는 생각으로 나선 도전이었다. 갖은 고생을 했지만 그 끝은 달콤했다.
ⓒ 김대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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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첫 장거리 자전거여행에 나섰다. 서울에서 전라남도 강진까지 가는 6일짜리 여행이었다. 한 번도 자전거를 타고 도시 밖을 떠난 적이 없을 뿐더러, 지도 한 장 없었다. 일행도 없이 달랑 나 혼자 떠난 여행. 자전거는 여행 전날 중고시장에선 산 단돈 5만 원짜리였다.

게다가 계절은 11월 중순. 기온이 하룻밤만 지나면 뚝뚝 떨어져 막판엔 '덜덜' 떨면서 달려야 했다. 6일 동안 자전거에 펑크난 것만 네 번, "어휴, 그냥 여기서 버스에 자전거 싣고 그냥 돌아가버려"라고 생각한 건 더 많았다.

과연 내가 이 여행을 끝낼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상태로 길을 나섰지만, 결국 여행을 무사히 끝냈다. 마지막날 버스에 자전거를 싣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느낀 기분은 "불가능할 것 같던 일을 해내다니…"였다.

오로지 내 심장과 다리 힘만으로만 달리는 게 자전거다. 페달을 돌리지 않으면 기계는 멈춘다. 기운이 떨어져 흔들려도 자전거는 넘어진다. 수많은 교통수단 가운데 오로지 내 몸이 에너지가 되어 나아가는 건 자전거가 유일하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엉금엉금 기어가다가 처음으로 내 발로 일어섰을 때 기분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싶다.

'진정한 자유.'

자전거여행에서 느낀 쾌감은 그랬던 것 같다. 힘들었지만 그 뒤에도 틈날 때마다 자전거를 타고 길을 나섰다. 고통스러웠지만 그래서 내 몸을 자세히 느꼈고, 종종 포기하고 싶었지만 그래서 해낸 뒤엔 스스로에 대한 자랑스러움이 커졌다. 힘들고 누빈 땅이었기에 지난 뒤엔 그 장소, 그때 그 일이 더 자세히 생각났다.

선진국에서 자전거여행은 이미 대세다. 이웃나라 일본에선 스포츠진흥법을 만들어 자전거여행에 대한 지원을 명문화했고, 자전거여행전문잡지도 나온다.

유럽에선 1995년 유럽 전역을 연결하는 자전거노선 계획을 만들었다. 모두 12개 노선, 6만3500km에 이르는 방대한 노선이다. 관련 단체들이 자전거노선 지도를 만들어 팔기도 한다.

시장조사 기관인 트렌드스코프(Trendscope) 조사 결과 녹색교통선진국인 독일에선 매년 560만 명이 평균 1박2일 코스 자전거여행을 떠난다. 정기적으로 자전거여행을 하는 인구가 독일인 가운데 37%에 이른다.

우리나라도 걸음마를 떼기 시작했다. 이제 자전거여행 인구가 많이 늘었다. 대표 자전거여행 커뮤니티인 '자전거로 여행하는 사람들'(cafe.naver.com/biketravelers) 회원은 12만 명이 넘고, 주요 자전거 커뮤니티에는 자전거여행 관련 글이 넘친다. 자전거여행 인구가 느는 건 그만큼 자유로워졌다는 뜻이며, 좀 더 자유롭고 싶다는 욕망에서일게다.

2006년 환경부는 전국 유명자전거코스를 담은 '바이크투어맵'을 만들었고, 이듬해 전라남도가 지역관광코스를 담은 '자전거코스지도'를 만들었다. 지난해 11월엔 여수시가 전국 최초로 자전거 관광해설사 양성과정을 개설했다.

자전거여행선진국과 비교하면 도로여건이나 운영인력, 관련 제도 등 여러 면에서 뒤쳐진다. 앞으로 갈 길이 멀다. 지난 역사를 돌이켜보면 참 아쉬운 부분이다. 우리나라 자전거여행 역사가 결코 짧지 않기 때문이다. 때는 192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자전거여행 나선 선구자들, 신문지면을 장식하다

인력거와 마차, 전차, 자동차가 뒤엉켜 다니던 시절, 유일하게 무전여행이 가능한 수단은 자전거였다. 인력거는 남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고, 자동차는 기름이 필요하다. 마차 또한 산과 바다, 강을 무리 없이 달릴 수 있도록 말을 조련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조선팔도를 여행하고 싶은 이들이 자전거를 택한 건 자연스러운 선택이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자전거관광여행 클럽인 '피크위크 바이시클 클럽'(Pickwick Bicycle Club)이 영국 런던에 만들어진 건 1870년. 그때를 전후해서 여러 서양인들이 자전거를 타고 지구 여행에 나섰다.

19세기 자전거를 한 번도 탄 적 없던 여성, 런던데리가 세계자전거여행을 한 일은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사진은 런던데리의 자전거여행기를 담은 책 '발칙한 자전거세계일주'.
 19세기 자전거를 한 번도 탄 적 없던 여성, 런던데리가 세계자전거여행을 한 일은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사진은 런던데리의 자전거여행기를 담은 책 '발칙한 자전거세계일주'.
ⓒ 미지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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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여행자 가운데 애니 런던데리(annie londonderry)의 사례는 특히 독특했다. 1894년 당시 애니는 가사와 육아에 지쳐 일상탈출을 꿈꾸는 24살 유부녀였다. 그런 그에게 자전거로 세계여행을 하면 1만 달러를 주겠다고 남자들이 제안한다.

물론 터무니없는 제안이었다. 애니는 한 번도 자전거를 탄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 자전거를 타고 세계를 도는 동안 5천 달러를 벌어야 한다는 게 내기 조건이었다. 한 번도 세상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는 유부녀에게 자전거를 탄다는 것도 5천 달러를 번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애니는 꽤 영리했다. 지금 봐도 그 담대함이 놀랍다. 본명인 코프쵸스키를 온천수 회사 이름인 런던데리로 바꾸고 대신 회사에서 여행경비로 쓸 후원금을 받아낸다. 여행 시작 때부터 여행담을 적극적으로 홍보하기 시작해 가는 곳마다 화제를 불러일으킨다. 그 해 3월 뉴욕에서 시작한 애니의 여행은 프랑스, 이집트, 예루살렘, 예멘, 스리랑카, 미국을 돌면서 이듬해 9월 마무리된다.

그런 소식은 우리나라에도 알려지기 시작했다. 1920년대 중반에 이르면 러시아인 3명이 모스크바를 떠나 연해주, 나가사키(일본), 샌프란시스코(미국), 멕시코를 여행한 일이나 또다른 모스크바 사람이 만주 봉천을 떠나 세계여행 중이라는 기사가 실린다.

조선땅에서도 자전거로 전국을 보고 싶은 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여러 사람들이 있었겠으나 지면을 뜨겁게 달군 자전거여행계의 스타가 나타났으니 바로 맹훈태다.

함경북도 웅기에 살던 맹훈태(당시 30세)는 자전거를 타고 조선 전역을 돌겠다는 목표를 세운다. 경비는 '0'. 돈 한 푼 없이 여행하는 무전여행을 계획했다.

출발일은 1926년 4월 28일. 춥지도 덥지도 않은 시기를 골랐으니 여러 가지를 고려한 끝에 나온 결정이었을 것이다.

당시 맹훈태의 조선자전거여행은 <시대일보>와 <동아일보>가 지면중계를 했다. 이런 식이었다.

"10일간 휴양하고 지난 28일에 개성을 향하고..."(시대일보 1926년 5월 31일)
"지난 2일 오후 3시에 수원에 도착하야..."(시대일보 1926년 6월 4일)
"지난 19일에 마산을 출발하여 정오에 진영에 내착하여"(동아일보 1926년 6월 23일)
"24일 불국사로 향하였는데 동 군의 여정은 대구, 상주, 충북..."(시대일보 1926년 6월 28일)

그의 이동경로를 이들 신문이 일일이 소개할 정도로 맹씨의 여행은 큰 관심사였다. 맹씨는 이들 신문사 지국에서 밥을 얻어먹고 때로는 잠을 자기도 했다. 신문사는 기삿거리를 얻고, 자전거여행자는 숙식을 얻었으니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격이었다. 맹훈태 또한 꽤 넉살 좋은 여행자였음을 알 수 있다.

7월 10일에도 여행 중인데 그때까지 여행한 거리가 9천여리(약 3535km)였다. 그 뒤에도 황해도, 평안남북도를 더 둘러봤으니 달린 거리는 최소한 4000km가 넘은 것으로 보인다. 돈 한 푼 없이 전국을 둘러보는 자전거여행자에 대한 기사가 연이어 신문에 실렸으니 사람들은 "나도 한 번"이라고 자연스럽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자전거여행은 특성상 극기여행이기도 하다. 언덕과 바람, 비포장길을 헤치며 오로지 제 힘으로 달려야 하기 때문이다. 기운이 떨어질수록 고통은 오히려 커진다.

소년운동의 한 갈래였던 '소년척후단'(少年斥候團, 1922년 발족, 뒤에 조선소년단으로 개명)이 자전거를 타고 교외여행을 한 것은 꽤 괜찮은 프로그램이었다. 소년척후단을 만든 이는 중앙고보 체조교사였던 조철호로 1926년 6·10만세사건(조선 마지막 임금인 순종의 장례식날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의 정신적 지주였다 하니 그가 자전거여행을 통해 전하려 한 메시지가 무엇이었을지 짐작할 수 있다.

1927년 경성배제고등보통학교 체조교사 최계남과 학생 2명도 방학을 이용해 함께 호남지방 자전거일주를 했다. 자전거여행을 하면 같이 고생을 하게 되니 쉽게 가까워진다. 혼자서는 갈 수 없으니 낮엔 앞서거니 뒤서거니, 밀어주고 끌어주며 달렸을 테고, 밤에 한 이불을 덮고 누워 속내를 털어놓았을 것이다.

자전거는 느린데다 샛길통행에 유리하기 때문에 이 땅 곳곳을 살펴보는데도 적당했다. 이 땅을 답사하려는 이들이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아르메니아 사람인 '마이켈 바비에후'(당시 53세)는 학술과학상 재료를 만들 목적으로 자전거를 타고 세계를 돌아다녔는데, 조선 땅에도 발을 디뎠다. 1933년 동경명치대학생 김경석과 한만영이 여름방학 동안 자전거를 타고 일본과 조선땅을 누빈 이유 또한 농민생활상 조사였다.

이처럼 자전거여행은 극기여행, 지리탐사, 학술탐사 등 여러 목적에 쓰였으나 주로 관심을 끈 것은 여가활동이었다. 자전거여행에 주목한 이들도 그랬다. 1920년대 자전거여행이 인기를 끌면서 몇몇 신문사들이 상품을 개발해 사람을 모집한다. <동아일보>, <조선일보>, <조선중앙일보>, <시대일보>와 같은 일간지들이었다.

자전거는 극기훈련, 학술답사, 경기 등 여러 분야에 쓰였으나, 그 중 좋은 여행상품으로 자전거를 생각하는 이들이 나타났다.
 자전거는 극기훈련, 학술답사, 경기 등 여러 분야에 쓰였으나, 그 중 좋은 여행상품으로 자전거를 생각하는 이들이 나타났다.
ⓒ 김대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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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공주와 같은 백제 옛 수도와 금강산 등 명승지가 인기였다. 휴양이 목적인 온천 여행이나 사찰 여행상품도 만들어졌다. 자전거여행 인구가 늘면서 자연스레 나이와 성별, 관심분야에 따라 상품이 만들어졌으리라. 적게는 10명에서부터 많게는 150명까지 인원을 모아 여행을 떠났다.

하루 또는 이틀짜리 여행이었으니 출발시간은 대부분 이른 시간이었다. 빠르면 오전 6시, 늦어도 10시에는 여행을 떠났다.

꽤 먼 거리를 자전거를 타고 움직여야 했고, 길 또한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나빴으니 꽤 어려운 여행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런데도 큰 사고가 있었다는 기사를 볼 수 없고, 1930년대 말까지 계속 자전거여행단을 모집한 걸 보면 반응이 괜찮았다고 볼 수 있다.

이유는 당시 자전거문화에서 유추해 봐야겠다. 자전거여행단 모집은 자전거를 갖고 있는 사람이 대상이었다. 1920-30년대 자전거는 일상 교통수단이었다. 자전거를 갖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전거를 타고 통학하거나 회사에 가고 장사를 했다.

자전거 타는 데는 아주 익숙한 사람들이었다. 매일 비포장길을 자전거로 달렸으니 하루나 이틀쯤 장거리를 뛴다고 해도 큰 무리는 없었을 것이다. 평소에는 자전거를 타지 않다가 주말이나 휴가철에 자전거를 타는 요즘 사람들에 비하면 오히려 다리근력은 더 좋았다고 봐야 한다.

그렇게 자전거여행은 일상을 벗어난 색다른 것이었으나, 즐긴 이들은 일상에서 자전거를 타는 이들이었으니 일상과 여행은 손바닥처럼 붙어서 움직였다.

자전거는 에너지 문제 풀 열쇠, 단지 재미만 찾는다면...

1930년대에도 여전히 자전거로 전국을 일주하는 사람들은 많았고, 신문들은 이들을 꾸준히 다뤘다. 이성현, 이필응, 이종해, 도상운, 정문경, 안홍민과 같은 이들이 전국자전거일주를 하면서 신문 지면에 이름을 올렸다.

해방 이후 남북이 갈라지면서 한반도를 자전거로 일주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돼버렸지만 비록 반쪽땅이라도 자전거일주를 하는 도전은 계속 됐다. 

1979년에는 인하대 학생 15명이 17일 동안 자전거전국일주를 했다. 하루 평균 12시간씩 매일 150km 정도를 달렸으니 '괴물'과 같은 체력이었다. 오전 7시에 출발해도 12시간 뒤면 벌써 해가 떨어진 시간. 피곤이 풀리기도 전에 또 강행군을 해야 했으니 고생도 그런 고생이 없었을 터다.

자전거여행을 하는 이들은 가능한 값싸게 숙식을 해결하려고 한다. 옛날도 비슷했고, 자전거선진국도 마찬가지다.
 자전거여행을 하는 이들은 가능한 값싸게 숙식을 해결하려고 한다. 옛날도 비슷했고, 자전거선진국도 마찬가지다.
ⓒ 김대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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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들 또한 여느 자전거여행자들과 같은 방식으로 먹고 잤다. 가장 싼 여인숙에서 잠을 잤고, 싸고 양이 많은 시장에서 끼니를 해결했다.

재미있는 점은 이런 경향은 다른 자전거선진국이라고 해서 다를 바가 없다는 점이다. 시장조사 기관인 트렌드스코프(Trendscope) 조사결과에 따르면 독일 자전거여행자들은 고급호텔이나 오페라 감상, 와이너리(포도주양조장) 방문 등 돈이 많이 드는 여행지를 피하는 경향이 있었다.

자전거여행은 여행기간이 다른 교통수단보다 긴데다, 간소한 짐만 지고 이동하는 특성상 자연스럽게 소박하게 먹고 자는 게 몸에 배는 게 아닌가 싶다. 자전거여행자에게 찜질방이나 게스트하우스, 국수와 같은 음식이 인기를 끄는 건 다 이유가 있다.

정부에서는 자전거타기를 장려하고 전 국토를 자전거생활권으로 묶는다면서 4대강에 자전거도로를 깔았다. 보기에는 깔끔하게 보이나 '소박함'이나 '자연스러움'과는 거리가 있다. 게다가 자전거도로를 만드느라 일부러 수풀이 우거진 길에 시멘트를 부어 보기 좋은 길을 만들었다.

이와 같은 길은 수시로 고치고 손을 봐야 하며, 계속 돈이 들어가야 한다. 계속 물을 퍼올려야 하는 청계천처럼 지속가능과는 거리가 멀다. 차량통행이 거의 없는 국도나 지방도를 활용할 수 있고, 논길이나 뚝방길 등 자연스럽게 난 길들을 이으면 된다는 지적이 나오는 건 그래서다.

심지어 자전거여행은 포장길을 만드는 게 아니라 어디로 가야 할 지 알려주는 표지판만 있으면 된다는 조언도 나온다. 

유럽 전역을 잇는 자전거길인 유로벨로 또한 따로 길을 포장하기보다 갈 길을 표시하는 경로 중심으로 만들었다. 자연상태를 가능한 살렸다는 점에서 자전거의 생태성과 잘 어울린다.

자전거책의 고전으로 불리며 국내 자전거관련 다큐멘터리의 제목으로도 쓰인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의 저자 이반 일리히가 자전거를 핵심주제로 삼은 건 에너지 문제 때문이었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불필요하게 에너지를 많이 쓰며, 그로 인해 에너지를 과도하게 많이 쓰는 특권층과 에너지소외계층으로 나눠진다. 그 문제를 풀 열쇠가 자전거라고 내다봤다.

그런데 계속 돈이 들어가는 자전거포장도로로 전국을 덮는단다. 그것도 주로 여가목적으로만 쓰일 도로에 말이다. 자전거가 단지 '재미'와 '건강'만 주며 에너지 분배에 기여하지 못한다면 이반 일리히의 생각과는 거리가 멀다. 평상시에는 일상에서 자전거를 이용하다 방학이나 특별한 기회를 이용해서 자전거여행을 즐겼던 90여 년 전 자전거선배들과도 거리가 있다.

1920, 30년대 자전거여행이 단지 '신기하고' '재미있는' 탈 것이었다지만 지금도 그러하면 곤란하지 않겠는가. 신기하고 재미도 있으면서 일상을 부드럽게 바꿀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자전거여행이 줄 큰 선물일 게다.


태그:#자전거, #자전거여행, #무전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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