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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꼼수보상 중단하고 이주대책 마련하라."

쌀쌀한 13일 오전, 서울 용산역 광장 앞 가로수 사이에는 이런 현수막이 매달려 있었다. 용산역 광장 앞 3구역의 낡은 상가에서 분식점을 운영하는 한 여성도 "내가 이 자리에서 20년을 장사해서 애들 둘 학교 보냈는데 보상금 2400만 원을 받고 나가라고 한다"고 억울한 심정을 호소했다.

용산 참사가 일어난 지 3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용산은 재개발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용산역 앞 재개발 3구역 철거에 반대하는 세입자들의 현수막이 걸려있다.
▲ 용산은 여전히 재개발중 용산역 앞 재개발 3구역 철거에 반대하는 세입자들의 현수막이 걸려있다.
ⓒ 이동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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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열심히 살려고 노력했던 사람이었어"

3년 전 1월 20일 새벽, 앙상한 흰 타일 건물 위로 경찰특공대를 태운 시커먼 컨테이너가 망루에 내려왔다. 그리고 망루에서는 검은 연기와 시뻘건 불길이 솟았다. 망루를 조준한 채 쉴새없이 쏟아진 물대포는 시너 화염을 더 키웠고 철거민들이 농성하던 파란 망루 벽틈으로 불길이 번졌다.

날름거리는 화마를 보며 건물 밑 가족들은 발을 동동 굴렀고, 동료들은 "저기 사람이 있다"며 절규했다. 절규하다 다리가 풀려 바닥을 굴렀고 다시 일어나 경찰에 항의하다 실신했다. 망루가 폭발하고 몸에 불이 붙은 사람이 비틀거렸다. 옥상 난간을 붙들고 불길을 피하려던 철거민이 새벽 깊은 어둠 속으로 추락하는 충격적인 모습 앞에 사람들은 그저 입을 가리고 새어 나오는 신음만 흘릴 뿐이었다.

용산참사가 일어난 남일당 건물은 이미 철거되고 없었다. 참혹한 현장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고, 그곳은 자갈투성이 주차장으로 변해 있었다. 남일당 건물터 왼쪽으로 몇 개 식당이 아직 남아 있었다. 주로 4구역 재개발 공사장 인부들이 점심을 먹는 곳이라고 한다. 

그곳에서 주차관리를 하는 한 아저씨는 "혹시 3년 전 참사 현장을 보셨나요?"라는 기자의 질문에 씁쓸한 답변만 돌아왔다.

"우리는 잘 몰라요. 그런데 아직도 그게 기사거리가 되나?"

이어 남일당 건물터 맞은 편에서 담배와 음료 등을 파는 상점으로 향했다. 이곳 주인인 김민(65)씨는 그날의 참상을 똑똑히 기억한다고 했다. 당시 망루에서 농성하다 경찰의 진압으로 사망한 고 이상림씨는 죽기 전날 얼굴도 보고 인사도 나누었다.

"정말 열심히 살아가려고 노력했던 사람이었어."

김씨가 이씨를 기억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2010년 남일당 건물이 철거되던 날도 기억하고 있었다.

"주변의 현수막들 다 뜯고 몇 시간 만에 다 끝났지 뭐. 남일당 영정사진 앞에 향도 몇 번 피웠지. 사진 보면 가슴이 아파. 그래도 좋은 곳에 가라고 기도했는데..."

김씨는 안타까운 시선으로 남일당 건물 쪽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안타까움, 아쉬움 등이 진하게 묻어 있었다. 그리고 다시 한마디 툭 던졌다.

"사람이 굉장히 순해."

고단한 싸움과 기억의 현장은 이제 주차장으로 변했다.
▲ 남일당터 고단한 싸움과 기억의 현장은 이제 주차장으로 변했다.
ⓒ 이동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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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정책들은 좋아지는데 왜 개재발정책만 유독..."

용산역 광장 앞에서 기자에게 남일당 건물터를 알려줬던 이정근(55)씨를 다시 만났다. 이씨는 기자를 잡아끌더니 전철역 앞 옷가게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재개발중안 용산3구역 철거대책위원장을 맡고 있는 김인순(59)씨를 만났다.

김씨는 "그렇게 사람들이 죽어갔는데 여전히 세입자들은 안중에도 없는 재개발이 진행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14년간 일한 직장의 퇴직금을 털어 마련한 가게 권리금의 3분의 1도 안 되는 이주보상비를 판결한 법원의 판결에도 분통을 터뜨렸다. 

"이명박 정부가 일자리 창출, 일자리 창출 하는 데 세입자 고려 안하는 재개발이야말로 멀쩡하게 장사하는 사람을 내쫓아 실업자 만드는 것과 뭐가 다른지 모르겠어."

옆에서 조용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이정근씨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는 남일당 건물터 건너편의 전철역 근처에서 만두를 팔고 있었다.

"용산 재개발이 본격화한 3년 전부터 상권이 무너지고 현상 유지도 힘들다. 몇 푼 안 되는 보상금을 받고 나가도 할 수 있는 게 없어. 다른 정책들은 그래도 좋아지는 것 같은데 유독 개발 문제만은 그렇지 못한 것 같아."

이에 김인순씨가 "그건 사장님이 국가를 아주 좋게 보시는 거예요"라고 꼬집었다. 김씨는 처음에는 망루에 올라간 철거민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그 당시 철거민들의 심정을 이제서야 느끼고 있다.

"대한민국은 국가라는 이름을 붙이기가 너무 부끄러워.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집회 때나 용산참사 때나 그저 사람이 있는 곳에 컨테이너를 들이미는 딱 그 수준이야."

기자가 "앞으로 어떻게 할 계획이냐?"고 물었다. 이에 김씨는 "용역에게 끌려나가 죽으나 그 돈받고 나가서 죽으나 마찬가지"라며 "끝까지 싸울 것"이라고 말했다. 이야기하는 중간에 손님이 들어왔다. 영업에 방해가 될까 봐 일어서려는데 그가 "괜찮다"고 했다. 그 손님을 마지막으로 한참 동안 손님은 오지 않았다.  

용산 3구역 철거대책위원장 김인순씨가 운영하는 옷가게에도 철거반대 구호가 붙어있다.
▲ 꼼수보상 중단하라 용산 3구역 철거대책위원장 김인순씨가 운영하는 옷가게에도 철거반대 구호가 붙어있다.
ⓒ 이동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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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곳에나 있는 '또다른 용산들'을 잊지 말아 달라"

김씨의 가게에서 나오는데 진눈깨비가 흩날리기 시작했다. 용산역 광장으로 가는 길 어귀마다 걸려 있는 '재개발 규탄' 현수막은 용산참사가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용산참사 유가족 정영신(40)씨는 "3년이 지났지만 용산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정씨는 용산참사 당시 경찰의 진압으로 사망한 고 이상림씨의 며느리다. 지금은 용산참사 진상규명 및 재개발제도개선 위원회 활동가로 일하고 있었다.

참사 속에 시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남편을 감옥에 보낸 후 갈 곳이 없었던 정씨는 아픔 속에 1년을 홀로 보냈다.

"함께 손잡아준 박래군 인권재단 '사람' 상임이사의 격려로 '희망버스'를 통해 한진중공업 김진숙 지도위원의 크레인 농성에 힘을 보태며 마음을 추스르게 되었다."

정씨는 지금도 여전히 사람사는 곳을 포클레인으로 내리깔아 버리는 북아현동 철거현장, 용역깡패들의 비인간적 폭력이 난무했던 명동 '마리' 등 '또다른 용산들'과 연대하는 데에 힘을 보태왔다.

그런데 정씨는 용산참사 3주기를 앞두고 자신에게만 언론의 관심이 쏟아지는 것에 많은 부담을 느꼈다. 그는 직접적인 이해당사자들도 아닌데 용산으로 인해 지금도 고통받고 있는 많은 이들을 안쓰러워했다. 용산 참사 3주기 추모행사를 준비하며 시작했던 광화문 1인 시위에 언론의 관심이 저조한 데 서운함을 나타내던 그는 "늘상 어느 곳에나 일어나는 또 다른 '용산'을 잊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용산참사 3주기를 맞아 참사를 겪은 유족들과 살아남은 동료들은 용산을 비롯해 재개발이라는 이름으로 폭력이 자행되고 있는 곳들을 돌아볼 계획이다. 그런 작업을 통해 그 곳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평범한 진실을 이야기하려 한다. 그리고 "용산을 잊지 말아 달라"고 호소할 것이다.

"용산을 잊는 순간 우리들의 삶은 철거당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동철 기자는 제15기 <오마이뉴스> 대학생 인턴기자입니다.



태그:#용산참사, #남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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