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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올림 연대 주점 '연쇄살인을 묻는날'
▲ 반올림 연대주점 포스터 반올림 연대 주점 '연쇄살인을 묻는날'
ⓒ 이동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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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일의 금요일 밤. <오마이뉴스> 인턴기자들이 들어선 곳은 서울 서대문 신촌에 위치한 학사주점 '명월이네'였다. 이곳에서는 '전자산업 연쇄살인을 묻는 날'이라는 모토를 내건 '반올림 연대주점'이 열리고 있었다.  

혹시 '반올림'(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이라는 단체를 들어보았나? 2007년 삼성반도체 기흥공장에 다니던 황유미씨가 백혈병으로 사망했다. 아버지 황상기씨는 "삼성 반도체를 만들다가 발암물질에 노출돼 딸이 백혈병에 걸렸다"며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유족급여를 신청했다. 그 과정에서 보건단체, 노동조합, 인권단체 등이 힘을 합쳤다.

그리고 2008년 '삼성'과 '백혈병'에 국한된 문제를 넘어 모든 반도체 전자산업 노동자들의 건강권을 지키기 위해 '반올림'이 출범했다. 올해로 출범 5년째를 맞이한 반올림은 앞으로 더욱 많은 산재노동자 지원활동과 예비 반도체 노동자인 실업고 학생들의 직업병 예방활동을 펼쳐갈 계획이다.

"어떻게 근로복지공단이 삼성 편에 설 수 있어요?"

무대에서는 사회자가 이날 연대주점의 제목인 '연쇄 살인을 묻는 날'에 관해 열심히 설명하고 있었다. '연쇄살인'은 삼성반도체에서 일하던 고 황유미씨, 황민웅씨, 이숙영씨, 이윤정씨 등이 백혈병과 희귀암 등으로 연이어 사망한 것을 가리키고, '묻다'라는 단어에는 이런 연쇄죽음과 관련된 삼성의 책임을 묻고 산재 인정을 받아내겠다는 뜻이 담겨 있다.

13일의 금요일이라는 시점과 맞물려 연대주점 홍보 포스터 속에서 방진복을 입은 채 삽을 든 반도체 노동자들과 '연쇄살인'이라는 말이 묘한 조화를 이룬다.

옆자리에서 술도 없이 사이다 한 병을 시켜 놓고 차분하게 무대를 바라보고 있는 한 여성에게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알고 보니 영화평론가 황진미씨였다. 황씨의 남편은 G20정상회의 당시 '쥐 그림'을 그렸다가 곤욕을 치른 박정수씨다.

"근로복지공단이 항소를 했다면서요? 어떻게 근로복지공단이 삼성의 편에 설 수 있죠? 아주 노골적이에요. 노동자를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라 사측을 위해 존재하는 거잖아요. (근로복지공단은) 자신의 존재의 가치가 무엇인지 다시 고민해야 합니다."

황씨는 부드럽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고 황유미씨와 이숙영씨의 산재판결에 불복해 항소한 근로복지공단을 비판했다. 이어 고 황유미씨 아버지 황상기씨가 무대에 올랐다. 황씨는 주점을 찾아준 사람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 뒤 행운번호를 추첨해 주최 쪽에서 마련한 선물을 나눠줬다.

행운번호에 당첨된 한국노동보건 연구소의 한 연구원에게는 <삼성이 버린 또 하나의 가족>이라는 책이 상품으로 건네졌다. 그는 "제가 이 책을 5권이나 사서 장인 장모님 그리고 부모님께 나눠드렸다"며 "반도체 노동자들의 진실을 알릴 수 있다면 기꺼이 다른 분께 나눠드리겠다"고 말해 박수를 받았다.

백혈병으로 숨진 고 황유미씨의 아버지 황상기씨가 행운권을 추첨하며 웃고있다.
▲ 행사경품을 추첨하는 황상기씨 백혈병으로 숨진 고 황유미씨의 아버지 황상기씨가 행운권을 추첨하며 웃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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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미한테 한 약속의 70%밖에 못지켰어요"

오후 10시가 넘어서자 황상기씨가 속초로 돌아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마이뉴스> 인턴기자들은 그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반올림과 연대하게 된 계기, 고 황유미씨 산재 판정 이후 계획 등을 물었다.

"우리 유미나 숙영이(고 이숙영씨) 모두 다른 데서는 안 받아 줬어요. 지금의 반올림(당시 공대위) 친구들이 유미의 일에 힘을 실어주면서 다른 단체들까지 모여 상당히 좋은 성과를 거두고 있어요."

지난해 6월 23일, 5년의 긴 시간 끝에 행정소송을 통해 고 황유미씨는 산재판정을 받았다. 하지만 근로복지공단은 이에 불복해 같은 해 7월 항소했다.

"법무부, 검찰, 근로복지공단이 노동자를 상대로 항소를 하다니... 저는 (공단이) 산재노동자들을 기만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애초 항소하지 않기로 약속했던 공단의 항소에 유족들이 항소했고, 공단은 "검찰의 지휘 때문"이라고 변명했고, 법무부는 "공단의 요청 때문"이라고 서로 책임을 떠넘겼다.

"유미가 백혈병에 걸려 죽음을 맞이했을 때 제가 한 가지 약속을 했어요. 제가 반드시 유미의 죽음이 그 애의 책임이 아닌 삼성의 책임이라는 것을 밝혀내겠다고 말이에요. 그런데 아직도 그 약속의 70%밖에 못지켰어요."

황씨는 "근로복지공단이 항소를 했기 때문에 그렇다"며 "꼭 유미의 산재판정을 지켜내야 100% 약속을 지킨 거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기자들이 "먼 길 조심해서 가세요"라고 인사를 건넸더니 그는 이렇게 당부했다.

"오는 3월 15일 2차판결에 꼭 관심을 가져 주세요."

기자들이 주점을 나서는 늦은 저녁 시각에도 연대주점은 여전히 뜨거웠다. 밤을 꼬박 새울 분위기였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연대주점에서 거스름돈 2만 원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러자 동행한 기자가 "반올림을 위한 착한 기부라고 생각하라"라고 말했다.

참가자가 반올림 주점에서 흥겹게 엄지춤을 추고 있다.
▲ 엄지춤 추는 아저씨 참가자가 반올림 주점에서 흥겹게 엄지춤을 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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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강혜란·이동철 기자는 제15기 <오마이뉴스> 대학생 인턴기자입니다.



태그:#반올림, #삼성반도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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