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어떤 음식 드셨나요? 요즘 저는 잘 익은 김치로 찌개를 많이 끓여먹고 있습니다. 뭐니 뭐니 해도 겨울에는 찌개가 대세인 것 같아요. 특히나 여러 번 손이 가서 만들어진 김치가 최종적으로 뭉근히 익을 때 나는 냄새는 참으로 감동적이고, 때론 뭉클한 여운도 줍니다.
한국인들은 음식에 유달리 공을 들이는 민족이기에 음식이 삶에 지대한 영향을 주기도 하지요. 음식과 여성의 삶에 대한 글을 많이 쓴 작가 박완서의 소설에서는 이런 점이 많이 발견됩니다. 그녀는 자신의 친정이나 시댁이 옷치레나 집치레는 하지 않아도 음식치레는 반드시 했다고 생전에 밝힌 바 있습니다. 그만큼 시기나 절기에 맞게 음식을 차려 먹고, 그 추억을 가족과 고이 간직하는 것은 어찌 보면 한국인에게 가장 필요한 치레가 아닐까 합니다.
특히 작가 박완서는 그녀의 고향인 개성을 무대로 한 장편소설 <미망>에서 그런 생각들을 간접적으로 내비쳤습니다. 개성은 고려의 왕도라는 역사적 여건에다 상업의 발달지라는 특성으로 음식 재료가 풍부했던 맛의 고장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는 음식에 돈을 아끼지 않는 개성상인들의 자부심이 반영된 맛깔스러운 음식들이 있었습니다.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는 상인들을 통해 각종 식재료를 손쉽게 구할 수 있었던 연유로 개성 음식은 화려했고, 더욱이 조선 왕조에 대해 반감을 가졌던 개성 사람들은 지나간 고려시대의 화려한 음식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무엇보다 컸기에, 검소한 생활을 하면서도 음식만큼은 재료와 정성을 아끼지 않았다고 합니다. 물론 화려하고 맛난 개성 음식도 특색 있지만 그에 못지않게 소박하지만 맛난 음식도 많습니다. 소설<미망>에 보면 꼭 그런 음식이 나옵니다.
소설 속 머릿방아씨는 남편과 사별 후 일순간의 실수로 친정 머슴의 아이를 갖게 됩니다.이후 주위의 눈이 두려워진 그녀가 대청마루에서 목을 맨 것을 시아버지가 구하고는 그녀가 아이를 낳으러 몰래 친정에 가도록 해줍니다. 친정에 도착한 머릿방아씨는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 겨우 마음을 추스르며 밥 한술로 생의 의지를 내어보는데, 그때 요청한 음식이 제육을 넣어 끓인 호박김치찌개였습니다.
"뺨이 여위어 드러나 보이는 광대뼈에 검버섯이 얼룩진 딸의 얼굴을 보자 모질게 먹은 마음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다시금 설움이 복받쳐 입을 삐죽 대고 섰는데, 딸이 눈을 번쩍 떴다.
"어머니 점심때가 겨웠나봐. 뭣 좀 주세요"
"오냐 오냐. 암 먹어야구 말구. 뭐가 구미가 당길 것 같는? 뭐든지 해줄 테니까 말만 하려무나."
"된밥에 호박김치나 푹 무르게 끓여주세요. 제육 몇 점 넣으면 참 맛있겠다."
꼴깍 소리가 나게 침까지 삼키며 말하고 나서 돌아눕는 딸을 보고 박씨는 가슴이 천길 만길 내려앉는 것 같았다. (중략) 서둘러 밥을 앉히고 제육 몇 점 썰어 넣은 호박김치 뚝배기를 화로에 얹어놓고 이것저것 밑반찬을 챙기는 사이에, 다시 아까의 의심이 흉한 그림자처럼 박씨의 마음을 어둡게 차지했다." - 소설 <미망> 중에서
결코 화려하지 않을 것 같은 이 음식에 대한 묘사는 머릿방아씨와 노모의 심정을 간접적으로 내비쳐주는 좋은 소재인 듯합니다. 과연 이 음식은 어떤 맛을 가지고 있을까 궁금했었는데 오늘은 이 음식 호박김치찌개를 만들어 봤습니다.
우선 호박김치를 만드는 것이 먼저겠지요. 늦가을에 울에서 뚝 따서 뒤주 위에 올려놓으면 어울릴 것 같은 그런 크기의 늙은 호박을 준비해야 겠고요. 늙지도 않고 너무 어리지도 않은 중간 정도의 그 늙은 호박의 껍질을 깨끗이 벗겨서 두껍게 숭덩숭덩 썰어놓습니다. 그리고 열무나 무, 시래기 같은 채소도 깨끗이 다듬어 씻습니다.
이제 썰어둔 호박과 채소를 소금에 켜켜이 절였다가 건져내고, 남은 소금물에 밀가루를 풀어서 끓입니다. 이것을 절인 호박과 채소에 부어 약 일주일간 익힙니다. 이후 재료가 누렇게 익으면 건져 씻은 후 꼭 짜서 솥에 준비해 놓고, 박완서 작가가 소설에서 이야기 한 것처럼 제육을 넣고 끓입니다. 된장과 고추장도 조금 풀어서 끓이면 호박김치찌개가 완성됩니다. 호박은 쉽게 무르기 때문에 호박김치는 먹을 만큼만 만들어서 바로 먹어야 하고, 이것을 끓인 찌개는 새콤한 것이, 입맛 없을 때 먹으면 좋다고 생각합니다.
뜨끈한 국물 속에 호박과 제육의 구수함이 어우러져서 꽤 눅진한 풍미를 자랑합니다.
밥과 함께 푹푹 떠먹다 보면 겨울의 스산함이 저리 사라지고 훈훈한 기운이 내면에 꽉 들어차는 것이, 어쩐지 '살아있는 행복이 바로 이것이구나' 하는 기분이 듭니다. 음식이란 것이 마음을 헤아려 주는 것이고 시기에 맞춰 맛있게 만들어먹는 음식이야말로 살아서 즐기는 가장 화려한 호사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것이 비싼 음식이건 아니건 상관이 없습니다. 음식에 추억과 이야기가 들어있고, 그 음식을 먹으며 그 여운을 느낄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참으로 귀한 음식치레가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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