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마포구에 사는 이아무개씨(48, 여)는 지난해 11월 18일 오전 9시 30분께 이상한 전화 한통을 받았다.
"대검찰청 금융범죄특별수사팀 김홍일 수사관입니다. 이아무개씨죠? 오늘 검찰 소환인데 왜 안 나왔죠? 소환장 안 받으셨나요? 왜 소환장 안 챙기셨죠? 오늘 출두했어야 했는데... 본인은 사건 번호 '0130'번인 <박창식 명의도용사건>에 연루되었고 본인명의의 대포통장으로 6000만 원이 거래 되었습니다. 이 사건의 200명이나 관련되었고 피해자 모두 오늘 출두해야 합니다. 아마 소환장을 못 받아서 안 온 것 같은데..."당황한 이씨는 어쩔 줄 몰랐다. 자신도 모르는 통장에서 6000만 원이나 거래되었다는 소리에 놀란 마음을 다스리는 동안 전화에서는 다급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더구나 걸려온 전화번호는 '3180-2000'번으로 정말 검찰청 번호인 것 같았다.
"우선 검찰청사이트 들어오셔서 민원신청하시고요. 지금 알려주는 사이트 들어가서 민원란에 접수해주세요"그가 알려준 곳은 금융감독원 홈페이지(이곳은 가짜였다)였고 민원 접수란도 마련돼 있었다. 기재란은 계좌번호, 카드번호, 카드비밀번호, 공인인증서, 보안카드번호 등을 입력하는 30개의 칸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사실 이씨는 '혹시 보이스피싱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했다. 그러나 자신이 알려주는 계좌번호는 월 평균 지출이 20만 원 정도가 되는 현금통장이고, 돈 역시 적게 들어 있어 크게 염려하지 않았다. 수화기 너머로 수사관을 사칭한 남성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계좌 입력 다 하셨으면 이제 핸드폰 잠시 꺼두세요. 전화를 조회해야 합니다. 박창식이랑 내통했는지 조사해봐야 합니다."이씨는 핸드폰 전원을 껐다. 몇 시간 후 휴대폰 전원을 켜보니 국민은행으로부터 카드론 대출 문자가 와 있었다. 휴대폰을 꺼둔 사이 이씨 자신도 모르게 카드론을 신청해, 대출금까지 빠져나간 상황이었다. 이른바 '카드론 피싱'이었다. 30만 원도 예금돼 있지 않은 이씨의 2개 통장에서 각각 1690만 원, 300만 원이 빠져나갔다.
진화하는 '보이스피싱'... 세금, 택배, 상황극 연출까지전화를 이용한 대출사기 수법인 '보이스 피싱'이 진화하고 있다. 금액도 소액에서 고액으로, 대상은 다수에서 소수로 바뀌는 추세다. 방법 역시 다양해지고 있다. '세금 보험금 환급 빙자', '납치 협박 빙자', '택배 반송 빙자', 'ARS카드를 이용한 카드론 피싱'에서 '상황극 연출'까지 더욱 고도화된 방법으로 사람들을 낚고(?) 있다.
특히 2011년 들어 카드론을 이용한 보이스 피싱인 '카드론 피싱'의 피해가 크게 늘고 있다. 지난해 1분기 처음으로 발생한 '카드론 피싱'은 같은 해 11월까지 1999건으로, 피해금액만 202억 원에 달했다. 신고되지 않은 사례까지 합하면 피해액은 더욱 클 것으로 보인다.
'카드론 피싱'의 경우 전화를 통해 피해자의 카드번호, 비밀 번호, 공인인증서 등 각종 개인정보를 알아내 해당 금융기관에 카드론을 신청한다. 이후 피해자 계좌로 들어온 대출금을 다른 계좌로 옮겨, 돈을 빼내가는 수법이다.
문제는 보이스피싱이 날로 지능화되고, 피해가 늘고 있지만 구제할 수 있는 방법이 미흡하다는 점이다. 최근 들어 보이스피싱이 사회문제화되자, 카드사가 정부의 요구에 마지못해 일부 피해액을 감면해주는 대책을 내놓은 것이 전부다. 하지만, 이 역시 감면 대상 기간에 피해를 입은 경우에만 해당한다.
김아무개씨(60, 여)의 경우는 2010년 12월 31일 카드론 피싱으로 1027만 원의 피해를 입었다. 최근 카드사의 보이스피싱 피해 감면 소식을 듣고 해당 카드사에 문의를 했지만, 거절 당했다. 이유는 감면 대상 기간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이다. 카드사는 작년 1월부터 보이스피싱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고객에 한해서, 피해액의 일정 부분을 감면해 준다는 것이다. 김씨는 "불과 몇 시간 차이로 피해를 입어, 감면을 받지 못한다니 답답할 뿐"이라고 말했다.
'보이스 피싱' 피해자 소송 모임 이대원 대표는 "보이스 피싱 피해자들의 경우 대부분 자기 책임이 크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사고 후 우울증을 겪고 있다"며 "최근 성남에 사는 64세 한분도 피해 발생 후 4일 만에 자살했다"고 말했다.
보이스피싱, 범 정부차원의 협의회를 구성해 대응해야
따라서 보이스피싱의 피해를 막기 위한 제도적 방안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많다. 27일 한국금융연구원 주최로 열린 보이스피싱 피해방지를 위한 토론회에 나선 전문가들은 관련법 개정과 범 정부차원의 정책협의회를 구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자봉 한국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사실 보이스 피싱은 계속 변화되는 수법으로 인해 피해자 지원에 현실적 한계가 있다"며 "그러나 적극적인 사전 예방 및 실효성 있는 지원 방안이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보이스피싱 예방을 위해 금융위원회를 비롯해 금융감독원, 방송통신위원회, 경찰청 등이 참여하는 범정부 차원의 협의회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한편 이날 토론회에서 나온 '사전 방지 대책'으로 ▲ 보이스 피해 방지를 위한 정책 협의회 구성 ▲ 제도적 보완을 위한 환급금 특별법 전면 개정 ▲ 대포통장 관련 통합관리시스템 구축 ▲ 공인인증서 발금 빛 사용절차 강화 ▲ 지연인출 제도 도입 ▲ 카드론 취급 강화 ▲ 발신번호 조작 금지 등이다.
또 '사후 적발 및 구제강화 방안'으로는 ▲ 보이스 피싱 전담 팀 구성 및 기획수사 ▲ 해외 범죄조직 검거 ▲ 피해자 지원 등이 제안됐다.
덧붙이는 글 | 김혜승 기자는 오마이뉴스 15기 인턴기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