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조선시대 효 이야기>
 <조선시대 효 이야기>
ⓒ 전북문화원연합회

관련사진보기

부모와 마을 어른들을 찾아뵙고 새해 인사를 드리는 임진(壬辰)년 벽두에 전북문화원연합회(회장 이복웅)에서 펴낸 <조선시대 효 이야기> (신아출판사) 한 권을 받았다. 돌아가신 부모가 생각나는 정초에 효(孝) 이야기를 대하니까 느낌이 남달랐다.

책은 모두 300쪽(표지 제외)으로 효 이야기 65꼭지를 도(道)별로 나눠 소개하고 있었다. 등장인물은 일반 백성에서 정승 출신까지 신분과 나이가 층층이었으며 충효(忠孝)는 물론 부부애, 부모의 자식 사랑, 형제자매간 우애 등 소재도 다양했다.  

이복웅(67) 회장은 "책에 소개되는 효 이야기들은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하여 각 지방의 도지(道誌), 군지(郡誌), 읍지(邑誌)와 문중에서 발행한 효행록, 그리고 인물전, 문집 등에서 발췌 재구성했다"라고 밝혔다.   

효 이야기 주인공들은 짧게는 100년 남짓 길게는 500년 전에 살았던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실존했던 인물의 행적을 기록한 기록서임에도 내용이 감동적이었고, 겨울밤 이불 속에서 듣던 옛날이야기처럼 구수했다.

"효(孝)를 얘기하면서 남북을 가를 수 없어"

 효 사상에 대해 설명하는 이복웅 회장. 군산문화원 원장을 겸임하고 있다.
 효 사상에 대해 설명하는 이복웅 회장. 군산문화원 원장을 겸임하고 있다.
ⓒ 조종안

관련사진보기

<조선시대 효 이야기>에는 이명박 정부 출범(2008년 2월)과 함께 교류와 대화가 단절되면서 미국보다 먼 나라처럼 느껴졌던 북한의 함경도, 평안도, 황해도 지역에서 전해지는 효 이야기가 20꼭지 넘게 소개되고 있어 고향에서 날아든 소식지처럼 반가웠다.    

이 회장은 "한국의 자랑스러운 전통문화 효는 백행(百行)의 근본(根本)으로 사상과 이념, 국경을 초월한다"라며 "우리가 본받아야 할 선조들의 행실(孝)을 얘기하면서 어떻게 특정 지역을 제외하고 남북을 가를 수 있겠느냐?"라고 반문했다.

나아가 이 회장은 "잠시 화해의 돌파구를 찾았던 남북은 냉전 시대로 되돌아간 느낌이고, 정치·경제·사회적으로 갈등이 증폭되고 있는 이때 '효'는 외침이자 절규"라며 "참사랑을 동반한 진정한 '효 사상'은 실타래처럼 엉킨 문제들을 풀어갈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라고 말했다.

이 회장이 말하는 "효는 백행의 근본"은 효 정신만 제대로 실행에 옮기면 다른 인간의 규범은 저절로 이루어진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졌다. 효가 정착하는 곳에 사람다운 사람이 살면서, 살 만한 세상이 만들어진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었다.

효의 유래에 대해 이 회장은 "가족 단위 씨족 단위로 무리지어 살면서부터 공동체를 유지하고 화합하기 위한 자연스러운 윤리였으며 선조들은 생활 속의 덕으로 또는 자긍심으로 여기면서 살아왔는데 요즘은 너무 자기중심적으로 변하고 있는 것 같다"라며 안타까워했다.  

이 회장은 "물질만능주의에 익숙해진 현대인들에게 효도(孝道)는 무엇이고, 형제(兄弟)는 무엇이며, 불효(不孝)는 무엇인지 생각할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라며 "효의 실천이 생활이었던 선조들의 숭고한 정신을 이어받고자 책을 냈다"라고 덧붙였다.

다음은 '청렴(淸廉)한 정치가' 출신이 주인공인 함경도 이야기와 '집안의 우애'를 소재로 한 경상도 이야기, 그리고 십여 세 아이의 '효행'을 다룬 전라도 이야기를 골라 간략하게 정리했다. 

어머니 생각하다 '청백리' 된 심수경

"함경도 풍산 사람 심수경(1516년~1599년)은 중종 때부터 선조 때까지 다섯 군데 판서와 여섯 군데 감사, 두 군데 병사 등을 지낸, 한마디로 부귀공명을 누린 보기 드문 정치가요 학자였다. 거기다가 후세에 청백리(淸白吏)로 기록되었다." (<조선시대 효 이야기> 207쪽) 

심수경은 13세 때 부친이 여진족에게 살해되자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자랐다. 그는 뇌물 앞에서 분개할 줄 아는 목민관이 되라는 어머니의 가르침대로 급제 후 관청 송사를 수없이 치르면서도 뇌물을 받지 않았다. 어머니를 욕되게 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는 중요한 결단을 내릴 때마다 어머니 훈계를 떠올렸다며 부모의 뜻을 받들기 위해 자세를 바르게 할 수밖에 없었다고 실토하고 있다. 그에게 효심이 없었다면 "어머니를 생각하여 청렴한 공직자가 되려고 했다"는 말은 남기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심수경은 81세에 벼슬을 사직하고 "내가 이렇게 수를 누리는 것은 어머니의 여경(餘慶)으로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그는 벼슬살이를 오래 하고, 고위직을 두루 거친 것도 어머니가 생전에 끼친 덕이라며 모든 업적을 어머니의 공으로 돌리고 있다.

특히 "정치를 하고 백성을 다스리는 자가 주변에서 조롱을 받고 손가락질을 당한다면 그 폐해는 낳아주신 분에게도 끼쳐지게 된다. 그러면 자식의 위치는 어떻게 될 것인지 생각하면 끔찍하다"는 대목은 최근 비리에 연루된 정치인들에게 던지는 메시지로 받아들여졌다. 

'집안 화목'으로 친구에게 '효'를 깨우쳐준 정종익

경상도 성주군 동암에 살았던 정종악(鄭宗岳)은 진사(進士)로 마을에서 효자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그는 아침에는 부모에게 안부를 묻고, 저녁에는 이부자리를 펴 드리고, 음식은 잘 드시는지 신경 쓰는 등 누구나 하는 일을 했지 특별히 효성스런 면을 찾아볼 수 없었다.

하루는 이상하게 생각한 정 진사 친구가 찾아와 "자네더러 효자라며 칭송하는데 알 수가 없네! 말해보게"라고 했다. 그러자 정 진사는 "나도 동감이네, 하나 있다면 내 일가 전체를 눈여겨보면 어느 정도 짐작이 가리라고 보네!"라고 답했다.

친구는 정 진사 말대로 주변 사람들을 눈여겨보다가 "바로 이것이구나!"하고 감탄했다. 정 진사 집안은 매우 화목했던 것. 상하 예의가 분명하고, 대소사는 의논해서 마무리하고, 아랫사람을 나무랄 일이 있으면 어른들에게 허락을 받아 호되게 꾸짖었다.

그러므로 정 진사 집안에는 술 마시고 행패 부리는 남자나 잡기에 빠지는 여인, 하인을 함부로 부리거나 돈 좀 있다고 거들먹거리는 사람도 없었다. 벼슬했다고 떠벌리거나 자식의 출세를 자랑하는 사람도 없었다. 또한, 가난한 친척은 도와주었고, 돈을 갚지 않아도 업신여기지 않았다. 돈거래에 이자를 챙기는 일도 없었는데, 모두 정 진사 주관하에 이루어졌다.

마을 사람들은 정 진사가 사는 집을 '효목헌'(孝睦軒)이라 불렀고, 조금 후 동암마을에 별칭이 생겼는데 '효목동'(孝睦洞)이었다. 정 진사 노부모는 기쁘게 생각했다. 노부모가 좋아하자 정 진사는 사람들이 불러주는 대로 '효목헌'을 자신의 호로 삼았다.  

정 진사 양친이 기뻐하는 모습을 본 친구는 정종악의 효도는 바로 일가의 화목에 있다는 것과 효의 길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게 되었다. 또한, 맛있는 음식, 호화스러운 옷차림, 값진 금붙이로 부모를 모신다고 해서 효도가 되는 것이 아님을 깊이 깨닫고 부끄러워했다.

'계모'를 가르친 부안 아이 '박 겸'

전북 부안에 사는 박 겸(朴謙)은 십 여세 때 효행으로 훗날까지 기록으로 전해진 사람이다. 그에 대한 별다른 소재가 없이 어린 시절 행적만 전해지는 것은 그가 행한 일들이 그만큼 사람들의 정서에 깊은 인상을 남겼기 때문일 것이다. 

박 겸 이야기는 계모가 들어오면서 시작된다. 그의 아버지는 아내가 세상을 뜨자 새장가를 들고 집안 살림도 부인에게 맡겼다. 박 겸에게 계모가 생긴 것이다. 그런데 계모는 전처소생 박 겸을 장애물로 여기고 미워했다.

그러나 박 겸은 계모라고 해서 불손한 태도를 보이지 않고 순종했다. 아버지가 알면 속상해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잠자코 듣고 있다가 계모 마음이 풀어지면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을 다시 묻곤 하면서 친모처럼 모시려 애를 썼다.       

그럼에도 박 겸은 날이 갈수록 핍박을 받았다. 성질이 사나운 계모는 말로 할 것도 매질을 가하기에 이르렀다. 툭하면 트집을 잡아 내쫓기 일쑤였다. 남들이 눈을 흘겨도 아랑곳하지 않고 전실 자식을 구박했다. 이웃이 참다못해 박 겸 아버지에게 일러바쳤고 계모는 쫓겨났다.  

그러나 박 겸은 아버지에게 자신도 잘못이 있으니 노여움을 푸시라며 한밤중에 대문을 열고 계모를 다시 들어오게 했다. 그런 일이 있었지만, 계모는 박 겸을 계속 못살게 굴었다. 그래도 박 겸은 밖에서 먹을 게 있으면 가져와 계모에게 드리면서 효성을 다했다. 사람들은 그런 박 겸에게 바보라며 혀끝을 차는 이도 있었다.

어느 해 겨울, 계모는 박 겸에게 붕어가 먹고 싶으니 잡아오라 했다. 심술이 도진 것이었다. 북풍이 매섭게 몰아치는 바람 소리를 들으면서도 심부름을 시켰던 것이다. 강물은 꽁꽁 얼어 있었다. 하지만, 박 겸은 쇠꼬챙이를 들고 강으로 나가 얼음을 깨고 붕어를 잡아왔다.

처음부터 붕어를 잡아오리라고 생각 못했던 계모는 놀라며 박 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박 겸의 손을 잡고 뺨에 비비며 잘못을 빌었다.

"세상에 효자가 많다는 말을 자주 들었지만, 너만 한 효자가 또 어디에 있겠느냐. 너처럼 착한 자식이 또 어디에 있겠느냐. 너에게 비하면 나는 사악하기가 독뱀과 같다. 그렇지만 너로 인해 옳게 배웠으니 나를 용서해 주지 않겠느냐?"

어른의 훈계를 들어야 할 어린 나이의 박겸은 오히려 계모를 위로해주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신문고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조선시대 효#이복웅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