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에스티로더 제품이랑 닮았네."1월 31일 저녁 서울 신촌역 부근 미샤 화장품 매장은 퇴근길 손님들로 붐볐다. 손님들 시선은 유독 요즘 한창 비교 광고 중인 한 제품에 쏠렸다.
국내 중저가 화장품 대명사인 미샤는 1월 2일 새 화장품 '나이트 리페어 사이언스 액티베이터 엠플'을 발표했다. 이른바 '갈색병'이라 불리는 에스티로더의 베스트셀러 '어드밴스드 나이트 리페어'를 겨냥한 제품이다. 미샤는 에스티로더의 카피 제품을 발표한 뒤 '갈색병 vs 보라색병'이라는 비교 광고에 나섰다.
미샤는 '저가 이미지'를 벗으려고 해외 유명 브랜드 제품과 비교 마케팅을 펼쳐왔다. 지난해 10월에도 수입 브랜드 SK-II '페이셜 트리트먼트 에센스'를 겨냥한 '타임레볼루션 더 퍼스트 트리트먼트 에센스'를 선보여 재미를 봤다.
비교 품평에 대해 소비자들은 "비교를 통해 안심하고 질 좋은 화장품을 저렴하게 만나 볼 수 있어 좋다"는 호의적인 반응도 있지만 "너무 대놓고 베끼는 것 아니냐"는 우려 섞인 목소리도 있다.
소비자들이 '저렴이' 화장품에 꽂힌 까닭요즘 국내 화장품 업계는 비교 마케팅이 대세다. 그 중심에는 실속파 소비자를 중심으로 형성된 '저렴이' 시장이 있다. 저렴이란 중저가 화장품 브랜드에서 고가 화장품 브랜드 제품을 '미투(Me too, 모방)'한 것을 뜻한다. 이들 제품은 고가 제품과 효능은 비슷하지만 가격은 절반에도 못 미친다. 저렴이 화장품은 기초인 수분크림과 에센스부터 색조화장품인 립스틱, 아이섀도까지 다양하다.
소비자들에게 저렴이로 선택되는 방법은 2가지가 있다. 전자는 미샤처럼 처음부터 노골적으로 미투 제품을 만들어 소비자에게 알리는 경우이고, 후자는 소비자들이 스스로 발견하는 경우이다.
예를 들어 한 여성 화장품 커뮤니티 게시판에 "C사의 ○○○ 립스틱과 비슷한 발색을 지닌 저렴이 아시는 분 있나요"라는 글을 누군가 올리면 "E사의 ○○랑 비슷한 듯! 발색도 좋고, 느낌도 좋고 무엇보다 5000원도 안 되는 저렴한 가격"과 같은 댓글이 수십 개씩 달린다. 소비자들이 각자 상품 후기를 공유하고 이후 다수의 공감을 얻은 제품은 '인기 저렴이'가 된다.
일단 소비자들 입소문을 탄 저렴이는 실제 매장에서도 반응이 뜨겁다. 지난달 말 찾아간 신촌과 홍대 부근 화장품 매장에는 "○○○랑 비슷하게 나온 제품 어딨죠?", "액티베이터 앰플 샘플 좀 주시면 안 될까요" 등 손님 대다수가 저렴이 제품을 찾았다.
또 지난해 케이블 방송 온스타일의 프로그램 <겟잇뷰티>에서 실시한 '블라인드 테스트'를 비롯해 각종 패션 매거진의 뷰티 어워드(Beauty Award)가 제시한 저가 화장품들은 보도 직후 화장품 베스트셀러로 떠올랐다. 무엇보다 인터넷 파워블로거나 뷰티 커뮤니티에게 추천된 저렴이들은 사용자의 세세한 후기들이 공유되어 소비 욕구를 더 자극한다.
치솟는 수입 화장품 값, '저렴이'가 대안? 이처럼 저가 화장품이 각광 받는 이유는 경기 불황과 고물가로 지갑이 얇아진 소비자들이 저렴한 제품에 눈을 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1월 25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수입 화장품브랜드인 라프레리·랑콤 등이 가격을 약 4~10% 인상하고, SK-II·키엘·비오템·슈에무라 등 최대 10% 인상, 에스티로더·바비브라운·크리니크·랩시리즈·맥·오리진스 등도 최대 14% 인상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처럼 수입 브랜드 화장품 가격이 지속적으로 오르다보니 소비자들도 지갑 열기를 망설일 수밖에 없다.
2009년 식품의약품안전청 조사에 따르면 수입 화장품들의 국내 판매가가 수입원가(관세포함)에 비해 3~6배 높게 형성된 것으로 드러났다. 수입 원가만 따지면 국내 제품 저렴이 가격과 큰 차이가 없다.
소비자 인식도 변하고 있다. 무조건 고가 브랜드를 선호하던 소비자들도 "고가 브랜드가 아니더라도 효능만 좋다면 괜찮다"라는 식으로 바뀌고 있다. 또 화장품 소비에서 광고보다 소비자들의 직접적인 경험 공유가 더 큰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뷰티 커뮤니티 회원인 양아무개(여·24)씨는 "고가브랜드는 비싸서 손이 안 간다"며 "저렴이라고 불리우는 저가 화장품들도 어감상 효능은 별로일 것 같아 보이지만 막상 써보면 생각이 달라진다"고 말했다.
안산에 사는 김아무개(여·21)씨는 기초부터 색조까지 다 저가 화장품을 쓰고 있다. 김씨는 "뷰티 커뮤니티 회원들이 귀신같이 비교 품평을 올려주기 때문에 안심하고 산다"며 "이미 저렴이도 브랜드가 돼 굳이 저렴이 10배 가격을 주고 고가 화장품을 살 생각은 없다"고 밝혔다.
일례로 케이블 방송 온스타일 프로그램 <겟잇뷰티(Get it Beauty)>에서 실시한 비비크림 관련 블라인드 테스트에서 고가 브랜드인 L사(7만3000원) 제품을 제치고 중저가브랜드인 H사 제품(2만6000원)과 M사 제품(7600원)이 1, 2위를 차지했다.
비비크림을 제외한 다른 상품 계열에서도 저가 브랜드의 우세가 두드러졌다. 즉, 저렴이라 불리우는 저가 화장품들이 가격뿐 아니라 자체의 품질면에서도 승산이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저렴이 비교 마케팅, 선도업체에 숟가락 올리기?
물가상승에 따른 소비 감소에도 지난 한해 중저가 화장품 매출 규모는 전년 대비 32.1% 상승한 것으로 조사됐다. 해외 방문객들의 잦은 방문과 국내 소비자들의 지속적인 사랑이 중저가 화장품 시장에 활력이 되고 있다.
하지만 소비자들에게 저렴이 확산은 양날의 검이다. 화장품 소비자들은 점점 '새로운' 효능을 가진 화장품보다 고가 브랜드와 '비슷한' 값싼 화장품을 찾게 되면 일부 화장품 브랜드에선 이런 소비자 심리를 악용해 비슷한 제품만 양산할 가능성이 있다.
한 트위터 사용자(@latantation)는 "그게 미샤의 건전하고 적법한 마케팅인가? 애초에 모방한 제품인 티를 팍팍 낸 것도 모자라…"라고 미샤 마케팅 방식을 비판했다. 또 다른 트위터 사용자(@flowershirts) 역시 "미샤의 비교 마케팅이 성공을 거둔 이후 다수 브랜드들이 수입 화장품과 콘셉트나 용기를 비슷한 게 디자인해 런칭하고 있다"면서 "이것도 '짝퉁' 심리에 기인하는 것인가"라고 따졌다.
국내 화장품 브랜드 역시 자사 제품이 저렴이라고 불리는 데 거부감을 표시하기도 한다. 한 화장품 브랜드 관계자는 "소비자들이 우리들의 파우더를 모 브랜드의 저렴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우리 입장과 전혀 다르다"면서 "제작 당시부터 우리 스스로 만들었지 특정 제품을 타깃으로 만든 게 아니기 때문에 우리 제품을 저렴이 버전이라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미샤의 공격적 비교 마케팅 대상자인 에스티로더 측은 "이미 비교 광고가 합법화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의 광고 행태에 대해서는 관여하지 않는다"면서도 "어차피 고객들이 판단하는 것이고 우리 고객들은 비교 광고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불편해하지 않기 때문에 상관 없다"고 말했다.
이처럼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새로운 소비 시장을 형성한 저렴이는 생산자들에게는 '맛없는 당근'이다. YSM 마케팅 컨설팅 대표이자 윤수만화장품경영코칭연구소 화장품 경영코치인 윤수만 대표는 "기본적으로 화장품 산업 자체가 카피 시장"이라면서 "외국이든 국내든 좋은 화장품이 나오면 카피하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윤 대표는 "미샤처럼 특정 브랜드를 거론하며 직접적인 비교 마케팅을 시도한 것은 문제가 있다"면서 "오랫동안 축적해왔던 명품 브랜드와 비교 마케팅을 통해 급속한 가치 상승을 이루려는 모양인데, 소비자들에게 성능은 똑같은데 가격이 싸다는 저렴이 인식을 심어 소비자를 끄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덧붙이는 글 | 김혜승 기자는 오마이뉴스 15기 인턴기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