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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개혁과 경제민주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거세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대다수 국민들의 소득은 오르지 않고 고용 불안정성은 높아졌으며, 그 결과, 사회의 불평등과 양극화는 심해졌다. 반면 친 기업적 이명박 정부가 집권하면서 규제완화, 감세, 고환율 유지의 지원을 받은 재벌 대기업 집단은 경제위기 와중에서도 '나 홀로 성장'을 누렸다.

대기업의 성장이 중소기업과 자영업, 노동자로 전달될 것이라던 적하효과는 작동하지 않았고, 99%의 국민과 1%의 재벌 대기업 집단의 격차는 점점 벌어졌다. 급기야 이명박 정부마저 '동반성장'과 '공정사회'로 방향을 전환했지만 실제로 변화한 것은 없다.

위험수위에 도달한 재벌의 경제력 집중

타락한 금융자본주의와 경제적 불평등에 항의하면서 시작된 미국 뉴욕 월스트리트 점거 시위
▲ 분노한 미 청년들, '자본주의 심장' 월가 점령 타락한 금융자본주의와 경제적 불평등에 항의하면서 시작된 미국 뉴욕 월스트리트 점거 시위
ⓒ 최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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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 대기업이 어려운 대외경제 여건에서도 경쟁력을 갖추고 수출을 늘리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재벌에 대한 국민의 분노가 커져가고 있다. 이는 단지 이들의 사회적 기여도가 적기 때문이 아니다. 이들이 해외시장 진출에 그치지 않고 국내시장에서의 독과점을 심화하고, 심지어는 골목상권까지 잠식해나가면서 중소기업, 자영업과 상인, 소비자들의 생활을 위협하는 수준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최근 불거진 재벌자녀들의 빵집, 외식업 진출이 단적인 사례다. 이명박 대통령까지 나서서 "재벌 2~3세 본인들은 취미로 할지 모르지만 빵집을 하는 서민 입장에서는 생존이 걸린 문제"라고 지적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만큼 재벌 대기업 집단의 경제력 집중과 독과점이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말해준다. 이명박 정부 집권 4년 동안 재벌의 경제력 집중이 급격히 높아진 결과, 현재는 15년 전 외환위기 직전 수준까지 집중도가 높아졌거나 그 이상일 가능성이 크다.

5대 재벌(삼성, 현대차, 에스케이, 엘지, 롯데)의 국내총생산 대비 매출액은 2010년 55.7%이고 이는 1997년 수준에 육박한다. 53개 대기업 집단이 전체 제조업에서 차지하는 출하액 비중은 2009년 50.1%로 절반을 넘겼다. 상위 100대 제조업이 전체 제조업에서 차지하는 출하액 비중도 2008년 이후 역사상 처음으로 50%를 넘기고 있다. 동네 골목까지 대기업 계열사들이 들어오고 있다는 세간의 느낌을 통계가 뒷받침해주고 있는 것이다.

경제력 집중이 과도하면 사회 권력이 된다

외환위기 이전 수준, 또는 그 이상으로 재벌에게 경제력이 쏠리면 어떤 문제가 생기는가? 일차적으로는 독과점이 생기고 시장에서 공정한 경쟁질서가 무너져서 경제의 효율이 떨어진다. 이뿐 아니라 소비자와 노동자, 상인과 중소기업으로부터 독점 대기업으로 이익과 부가 편중됨으로써 공평한 분배를 달성할 수 없어진다. 사회적 양극화와 불평등의 한쪽 끝에 재벌 대기업이 있다는 국민의 인식과 분노는 여기서 나온다.

그러나 재벌개혁이 현재 시점에서 절박한 이유는 그 이상이다. 힘이 집중되면 그 힘은 남용된다. 정치권력이 집중되면 독재가 나타나고 시장 점유율이 집중되면 독점이 나타난다. 특정 재벌이 국민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압도적으로 커지면 자신의 모든 사업영역에서 독점력을 강화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영향력을 이용하여 경제운용의 틀 자체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끌어나가려는 욕구를 갖게 된다.

사회적 여론 형성과 정치적 방향마저도 자신에게 우호적으로 움직일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재벌이 사회 권력을 쥐게 된다는 것이다. 삼성그룹은 이미 이 반열에 올라섰다. 삼성공화국이라는 말이 이를 대변해준다. 이 순간 우리사회에서 민주주의는 사라진다.

재벌의 과도한 권력을 견제할 세력이 없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문제는 한국의 재벌들이 이처럼 경제력 집중을 통해 무소불위의 권력을 획득해가고 있음에도 이를 견제할 수 있는 사회 세력이 없다는 사실이다. 재벌의 과도한 경제력 집중을 억제하는 법과 제도, 감독기관도 중요하지만 현실 사회구조에서 항상적인 견제세력이 존재해야 한다. 특히 한국의 재벌집단과 같은 엄청난 권력집단에 대해서 아무런 견제 세력이 없다는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다.

과거에는 재벌 위에 정치권력이 존재했기 때문에 정치권력에 대한 시민사회의 견제는 곧 재벌의 견제를 수반했지만, 지금의 재벌은 정치 권력의 힘 밖에 있다. 국회 지식경제위원장 민주당 김영환 의원은 2011년 7월 "나라 안에 대기업을 공격할 만한 용기 있는 집단이 아무도 없다"며 "정치권도 (대기업과) 종횡으로 연결돼 있기 때문에 대기업의 그물에 걸려 있는 물고기 같은 신세고, 촘촘하기 때문에 이 문제를 정치 생명을 걸지 않고는 다룰 수 없는 문제라 생각하고 국민들만 믿을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야당을 포함한 정치권도 재벌 대기업 집단의 견제 세력이 되지 못한다고 고백한 것이다.

통상 노동조합이 재벌 대기업의 견제세력이 돼야 하지만 삼성그룹에는 노동조합 자체가 없으며, 노동조합이 있는 재벌 대기업에서도 견제 세력으로서는 역부족이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자의 이사회 참여 등의 경영 참여는 먼 얘기고 우리사주조합 등을 구성해 노동자가 주주로서 견제하는 것도 제한성이 너무 명백하다. 중장기적으로 독일의 '공동결정제도'에 준하는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로 기업사회가 변해야겠지만, 당장은 어렵다. 그렇다면 시민사회에는 재벌을 감시하고 견제할 만한 사회세력이 있는가.

지금까지는 주주자본주의 등에 영향을 받으면서 주로 소액주주 등을 참여시켜 자본시장을 통해 재벌 대주주를 견제하는 운동이 발전해왔다. 증권집단소송제나 집중투표제, 그리고 논의 중인 다중주주대표소송제 등이 그러한 제도 사례들이다. 그러나 주주라는 투자자의 이익을 고수한다는 제한된 관점을 넘기 어려움은 물론, 외국인 소수 주주에게 휘둘리기 십상이었다. 최근 개인주주가 아닌 연기금과 같은 공적 기금이 나서서 재벌 대기업에 대한 주주권 행사를 적극적으로 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제한적이지만 의미 있는 시도가 될 것이다.

일방적인 약자로서 당하기만 했던 지역 자영업자들이나 납품 중소기업들이 직접 자신들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재벌 대기업 집단과 맞서려는 조짐도 보인다. 바람직한 현상이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상인이나 중소기업 협동조합에 대기업과 협상할 단체 협상권 등이 법적으로 보장돼야 한다.

지금은 공정거래법 안에 중소기업의 단체 협상을 일종의 '담합행위'로 간주해 인정하지 않는 모순이 있으므로 시급히 법을 개정을 해야 한다. 이들이 스스로 자신의 이익을 보호하도록 제도적 뒷받침을 해줘야 한다. 그러나 이 역시 재벌의 절대적 영향력을 견제하기에는 부족하다.

국민들이 재벌 대기업의 제품을 쓰는 소비자로서 직접 나서서 재벌을 견제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당연히 소비자들도 견제세력으로 집단화해야 한다. 최근 삼성과 엘지의 세탁기, TV 가격 담합행위를 공정거래위원회가 적발하자 녹색소비자연대에서 소비자 피해 집단소송을 제기하겠다고 나선 바가 있다. 신용카드 대기업들의 과도한 수수료 책정에 맞선 중소 가맹점들의 카드 결제 거부운동도 의미 있는 저항이다.

이밖에 통신비와 석유가격 독과점 가격 의문이 소비자 단체들에서 지속적으로 제기되기도 했다. 사실은 공정거래위원회가 가지고 있는 '전속 고발권'을 풀어서 소비자, 상인, 중소기업들이 직접 법적 문제제기를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아직 대기업에 대한 소비자 운동이 충분히 활성화되지 않은 상황이어서 재벌의 견제 세력을 말하기에는 이르다.   

재벌개혁을 위한 시민들의 연대를 만들자

1월 15일 오후 서울 금융위원회, 서울역 등 도심 곳곳에서 30여개 시민단체가 모인 <99%행동준비회의> 주최 '1%에 맞서는 99%, 분노하는 99% 광장을 점령하다(Occupy 서울)'  중
 1월 15일 오후 서울 금융위원회, 서울역 등 도심 곳곳에서 30여개 시민단체가 모인 <99%행동준비회의> 주최 '1%에 맞서는 99%, 분노하는 99% 광장을 점령하다(Occupy 서울)' 중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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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재벌의 경제력은 외환위기 이전 수준을 넘어 계속 확대되고 있고, 그 결과 동네 상권까지 직접적인 영향권 안에 들어왔음에도 제대로 된 견제 세력이 한국사회에 없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더욱 우려할 만한 현실은 재벌 집단은 일찍이 '재벌 - 언론 - 학계 - 관료 엘리트'의 동맹 체제를 확고히 구축하면서 우리 사회를 지배해왔다는 것이다. 재벌의 지배 동맹은 탄탄한데 국민들의 민주적 주권은 모아지지 않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물론 통합진보당과 민주통합당은 물론 보수적인 새누리당(옛 한나라당)까지 재벌개혁을 하겠다고 나설 정도로, 최근 다시 재벌개혁에 대한 포괄적인 사회적 합의가 이뤄져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정도로 될까? 일찍이 한 법학자는 이미 10년 전에 외환위기 이후 김대중 정부의 재벌개혁이 실패할 것을 걱정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던 적이 있다.

"재벌 개혁은 평상시에 민주적인 정부가 통상적인 권력행사의 방법을 통해서는 실현하기가 매우 어려울 것이며, 아마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이것은 세계의 역사가 증명하는 일이기도 하다. 역사상 재벌개혁에 성공한 나라는 일본과 독일 두 나라밖에 없는데, 이들도 따지고 보면 재벌개혁을 자력으로 실현한 것이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 후 점령 당국의 힘에 의지해서 강압적으로 실현했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재벌개혁은 역사적으로 전쟁과 같은 심각한 상황을 거친 후에나 제기될 만큼 쉽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점을 생각한다면 지금 정치권에서 전개되고 있는 재벌개혁 논쟁은 상당히 가볍다. 책임성이 느껴지지 않는다. 선거의 계절이 끝나면 '경제 성장과 세계적 경쟁력 회복'이라는 구호가 다시 울려 퍼지면서 재벌개혁은 사라질 가능성이 높다. 그러면 다시 중소기업들의 납품단가는 내려갈 것이고, 상인들은 거대 유통대기업들에 자리를 빼앗길 것이며 소비자들은 독과점 가격을 지불해야 할 것이다.

양극화·불평등을 없애기 위한 99%의 연대

어떻게 할 것인가? 시민들이 나설 수밖에 없다. 지금 글로벌 경제위기가 수년 째 장기화되는 가운데 사회적 불평등 해소를 주장하는 99% 운동과 저항이 세계화되고 있다. 미국에서는 99%의 대척점에 선 1% 월가의 탐욕에 대한 분노가 커지고 있다. 한국에서 불평등의 1%는 재벌 대기업 집단이다. 때문에 일상적 시기에는 쉽게 제기되지 못하던 재벌개혁 요구가 외환위기 이후 실로 15년 만에 다시 우리사회의 주요 의제로 부상하고 있다.

우리 시민들은 지금의 재벌 개혁 기회를 정치권의 구호 성찬 한번으로 끝내버려서는 안 된다. 지금부터 제대로 재벌개혁을 말하고 그 방안을 합의하고, 그 힘을 지속적으로 모아나갈 '재벌개혁 시민연대' 같은 단단한 시민 연대조직이 필요하다.

과거 수십 년 동안 '반독재 정치 민주화'를 위한 시민연대가 발전해왔다면, 지금은 '재벌 개혁 경제 민주화'를 위한 시민연대가 절실한 시점이다. 이것이 최근까지 형성된 복지 동맹을 넘어 우리 사회의 진보를 향한 올바른 시민운동의 방향이 될 것이다.

특히 재벌개혁은 당위적 운동으로서가 아니라, 현재 재벌의 과도한 경제력 집중으로 직접적으로 피해 받고 있는 노동자와 소비자, 자영업과 상인, 중소 기업인들을 포괄하는 '민생 연대'의 성격이 돼야 한다. 나아가서 우리사회의 양극화와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99%의 연대'가 돼야 할 것이다. 시민사회의 적극적인 움직임을 기대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를 작성한 김병권 기자는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새사연) 부원장입니다. 이 기사는 새사연 누리집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재벌개혁, #시민연대, #시민운동, #경제민주화, #삼성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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