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일 온도계는 영하 6도를 가리키지만 살갗을 할퀴는 바람은 무딘 감각마저 잃게 한다. 이런 날 약속을 잡은 내가 원망스러울 정도다. 카페에 들어서자 "어서 오세요. 이음입니다"하고 발음은 서툴지만 밝은 표정에 말쑥하게 차려입은 이주여성 2명이 우리 일행을 반긴다. '날 알고 있나' 싶을 정도로 친절하다. 그윽한 커피향이 짙게 밴 실내는 여느 프랜차이즈 커피 전문점처럼 화려하진 않지만 소박한 소품과 책으로 단아하게 꾸며져 아늑하다.
중년 남성 3명과 여성 1명이 창가에 앉아 커피와 빵이 놓인 탁자를 사이에 두고 담소를 나누고 있다. 다른 한편에는 40대로 보이는 여성 2명이 연방 웃음을 터뜨리며 입에서 깨소금을 쏟아낸다. 이곳이 이주여성들이 운영하는 사회적 기업 '카페 이음(e-um)' 이다.
카페 '이음'을 찾게 된 것은 카페 매니저를 자청한 충북 음성군다문화가족지원센터 소진원(45) 센터장을 만나기 위해서다.
"이주여성 생활 수준 올라가면 소비자 돼... 결국 상생 아닌가"
부부갈등이 있는 이주여성과 상담을 마친 소진원 센터장이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았다. 아담한 체격, 안경 너머로 보이는 선한 눈매, 실제 나이보다 젊어 보인다.
소 센터장은 대한성공회 금왕교회 신부다. 2002년부터 음성군 삼성면과 금왕읍 등에서 나눔의 집을 통해 공부방, 재가노인결연사업 등 사회활동을 해왔다.
그는 또 시민단체인 가섭산 생명연대 집행위원과 학교급식연대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지난 2008년 5월 음성에서 열린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문화제 사회를 보기도 했다.
소 센터장은 지난 2010년 12월 음성교육문화연대 공현정 대표의 추천으로 음성군다문화가족지원센터와 인연을 맺었다. 같은 해 12월 삼성그룹이 5억9천만 원을 투자한 비영리법인 '글로벌투게더 음성'이 출범하고 몸담게 됐단다. 그는 이곳에서 다문화 가족의 안정적인 정착을 위한 한국어교육, 가족통합교육, 상담, 정보제공 등 사업 전반에 대한 책임을 맡고 있다.
'지난 행적을 보면 삼성과 안 친해 보인다'고 하자 소 센터장은 "'삼성이 돈을 써? 그럼 제대로 쓰게 하자'는 생각이 들었다"며 "내 색깔이 분명하기 때문에 삼성도 조심스러워 했다"고 귀띔했다. 그는 기업과 이주여성의 상생을 강조했다. "기업이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 선순환의 고리를 만들어야 한다"며 "이주여성의 생활수준이 올라가면 소비자가 돼 결국 모두가 상생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소 센터장은 이주여성들이 겪는 가장 큰 어려움은 소통의 부재라고 단정했다. 의사소통이 제대로 안 돼 갈등이 생기고, 오해가 오해를 낳고 결국 파경으로 치닫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문화 차이와 경제적 갈등도 이들을 힘들게 하는 한 요인이다. 시어머니가 때렸다는 제보를 듣고 가보면 며느리가 예뻐서 등을 토닥였는데 이를 오해한 사례였다고 전했다.
그는 이주여성은 국내 여성에 비해 우울증 지수가 2배 이상이라고 밝혔다. 이는 소통이 어려워 많은 시간을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아 나타난 결과라고 진단했다. 아이들도 언어발달이 느려 학교에 입학하면 왕따를 당하기도 한단다.
소 센터장은 "우리의 목적은 이주여성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이라며 "소통 부재로부터 오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역할에 충실하겠다"라고 강조했다.
카페 이음(e-um)
카페 '이음'은 음성군다문화가족지원센터가 세운 사회적 기업으로 인구 2만 명이 조금 넘는 읍 단위 지역에 있다. 이음이 입주한 건물은 버스와 택시 터미널, 750여 세대의 아파트 단지를 끼고 있어 유동 인구가 많아 노른자위 땅으로 불린다. 2011년 10월까지 읍사무소 부속 건물로 쓰였지만 읍사무소가 이전되고 지난해 12월 16일 이곳에 둥지를 틀었다. 이곳은 2층 건물로 1층에는 이음을 비롯해 사무실, 상담실, 놀이방, 공방 등으로 쓰이고 2층은 회의실과 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사업 선정이나 자리 잡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다'는 물음에 소 센터장은 "삼성사회봉사단이 전국에 다문화 사회적 기업을 3곳에 설립하려 했다"며 "많은 지역에서 신청했지만 이필용 음성군수의 추진 의지가 높은 점수를 받았고, 건물도 군에서 무상임대 해주는 등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고 고마워했다.
음성군은 '음성군 사회적 기업 육성 및 지원에 관한 조례'를 발의하고 2010년 12월 23일 이 조례가 군 의회를 통과해 삼성의 글로벌음성 법인 등 사회적 기업 육성을 위한 법적 토대가 마련했다. 아래는 소 센터장과의 일문일답 내용이다.
- 커피 전문점 운영이 하루 이틀 교육으로 불가능 할 것 같다."본인 의사와 가족 동의에 따라 이주여성을 대상으로 지난 1년 동안 바리스타(barista·커피전문가)와 제과·제빵, 천연비누 만들기, 홈패션, 요리, 포크아트 기술교육을 진행했다. 학력 수준도 높고 다재다능해 교육을 잘 따라줬다"
- 어려운 점은 없었나."이주여성들이 실기에는 전문가 못지않지만 언어의 장벽에 막혀 자격증 취득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올해 자격증 취득이 최대 목표다"
- 카페를 운영한 지 54일이 됐다. 손익을 따지긴 이르지만 어떤가."1일 매출 25만 원 선이고, 80~90명의 손님이 이곳을 방문한다. 가격이 저렴하지만 분위기와 맛 면에서 대형 프랜차이즈 점에 뒤지지 않다는 입소문을 타고 단골이 꾸준히 늘고 있다. 지난 1월에는 한국건강가정진흥원에 천연비누 2천 개를 납품해 400만 원의 수익을 내기도 했다"
- 어느 정도 저렴하고 가격을 낮출 수 있는 요인이 뭔가. 지역 커피전문점은 몇 개나 있나."대형 커피전문점에 비해 40%가량 저렴하다. 프랜차이즈 점은 인테리어, 운영, 커피원두에 마진을 붙이고 건물 임대료, 인건비, 운영자 수입 등을 고려해야 한다. 또 브랜드 이미지 상 가격을 다운시킬 수 없는 입장이지만 우린 이런 거품을 확 뺐다. 지역 커피 전문점은 대형 2곳, 중형 1곳, 개인 운영 2~3곳이 있다"
- 인건비 수준과 근무 조건은 어떤가"인건비는 120만 원 수준으로 8시간 일하고 있다. 육아와 출산 등 변수가 많아 이주여성을 대상으로 교육을 더욱 확대해 운영할 예정이다"- 그동안의 성과와 앞으로의 계획은"지난해 8월 고용노동부 주관으로 개최된 '지역브랜드 일자리사업 경진대회'에서 사회적 기업 부문에서 '이음(e-um)' 사업이 우수상을 받았다. 이곳을 잘 운영해 2012년 하반기에 2호점을 내는 것이 단기적 목표고 장기적으로는 전국으로 확대하고 싶다"
'2호점은 어느 지역을 점찍고 있냐'고 하자 그는 "영업상 비밀"이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고향에서 커피전문점하고 싶다
베트남 호찌민이 고향이라는 투김화(29)씨는 2남 5녀 중 셋째 딸로 2004년 7월 결혼하면서 한국에 정착한 이주여성이다.
'한국에선 셋째 딸은 얼굴도 안보고 데려간다는 속담이 있다'고 하자 이해를 못했는지 어리둥절한 표정이다. 풀어서 자세히 설명하자 흰 이를 드러내며 크게 웃는다. 때 묻지 않은 소녀의 모습이다.
'힘들지 않냐'는 질문에 그녀는 "한국 손님이 많아 한국말도 쉽게 배우고 친구도 많이 만날 수 있어 기쁘고 즐겁다"며 "이곳의 도움을 운전면허도 취득했다"고 자랑했다.
그녀는 올해 이름을 '가인'으로 바꿀 예정이다.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딸이 엄마 이름 때문에 마음을 다칠까 걱정돼서다. 말과 글을 배워 딸 교육을 잘 시키는 것이 꿈이다. 또 바리스타 자격증을 따 고향에 기술전수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녀는 오후 1시부터 5시까지 4시간 동안만 이곳에서 일한다. 딸 때문이다. 인터뷰 중 손 전화기를 꺼낸 그녀가 딸 사진을 보여준다. 천사가 따로 없다.
'센터장님 나쁜 사람 아니냐'는 짓궂은 질문에 정색을 한 그녀가 "너무 좋은 분"이라며 "재미있고 바쁠 때는 커피도 내려주고, 설거지까지 해 준다"고 추켜세웠다.
카페 이음 팀의 반장을 맡고 있는 킷팔라(29)씨는 캄보디아가 고향이고 2007년 9월 결혼하면서 한국에 왔다. 한국에 온 후 얼마 있지 않아 섬유 공장에 취업해 1주일 단위로 주간과 야간으로 돌아가며 일했다. 하지만 잠이 모자라 적응도 안됐고, 대화할 상대가 없어 더욱 힘들었단다. 지난해 바리스타 교육을 받았고 그때 반장 직을 맡아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이곳 일이 어떠냐'는 질문에 "대화가 안 돼 답답했는데 재미있고, 기분 좋고, 친구를 만날 수 있어서 계속 일하고 싶다"며 "이곳은 모든 걸 이해해 준다"고 웃어 보였다. '첫 월급으로 뭐 했냐'고 묻자 "여행도 가고 싶고 맛있는 것도 먹고 싶지만 미래를 위해 은행에 저금했다"는 야무진 답이 돌아왔다.
그녀의 꿈은 고향 캄보디아의 최고 관광지인 앙코르와트에 커피전문점을 여는 거다. 돈을 많이 벌어 어려운 사람도 도와주고, 가족과 함께 여행을 다니고 싶단다.
충북 음성군에는 중국 350명, 베트남 200명을 비롯해 필리핀, 몽골 등 이주여성 679명이 살고 있다. 음성군다문화가족지원센터가 생긴 첫해인 2010년 170명이 이곳을 찾았고, 지난해에는 이보다 82%가 늘어난 310명이 안식을 얻었다.
'이음(e-um)'은 다문화 가정을 이어주고 사람을 이어주는 공간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어떤 이에게는 마음을 이어주고, 어떤 이 에게는 꿈을 이어주는 공간으로 커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