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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0일, 두 번째 가는 길이다. 다산 초당. 2년 전 여름, 아이들과 함께 했던 초당과 지금 바라보는 겨울의 초당의 모습은 어떻게 다를까 하는 생각들이 다산 초당을 오르기까지 내내 맴돌았다.

지난 여름에는 하루치기로 전남 강진의 다산초당을 들른 후 영랑 생가를 둘러보고 왔었다. 이번에 동료들과 문학기행이라는 이름으로 최초의 가사문학이라는 <상춘곡>의 배경인 정읍 칠보의 원촌마을을 거쳐 보성에서 하룻밤을 묵고 다음날 다산 초당이 있는 만덕산(강진 사람들은 만덕산을 '다산'이라고도 한다. 주변에 야생 차밭이 많기 때문이다)에 오르기로 했다.

가사문학의 탯자리, 정읍 칠보에서 정극인을 엿보다

상춘곡의 배경인 정읍 칠보(옛 태인현)의 원촌마을의 정경
 상춘곡의 배경인 정읍 칠보(옛 태인현)의 원촌마을의 정경
ⓒ 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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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시절, '흥진에 뭇힌 분네 이내 생애 엇더한고~'로 시작되는 정극인의 <상춘곡>을 가사문학의 효시라 배웠다. 우리는 <상춘곡>을 배우며 아름다운 봄의 경치를 완상하며 강호가도를 노래한 작품이라 들었다. 그렇지만 송강 정철이나 면앙정 송순에 비해 정극인은 꽤 먼 곳에 있는 존재였다. 아마 위치와 거리상의 문제가 아닌가 싶다.

송순이나 정철의 문학이 담양 지역을 중심으로 펼쳐졌고 그곳에 가면 '면앙정'이나 '송강정'이 인접해 있다. 또 자연과 인공이 어우러진 가장 한국적인 정원이라는 '소쇄원'은 물론 '죽녹원'까지 둘러 볼 수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았다. 그러나 '상춘곡'의 배경인 칠보(옛 태인현)를 찾는 이는 그리 많지 않았다. 주변에 내장산이 있지만 볼거리가 담양만큼 근접거리에 있지 못하기 때문은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왜 정읍 칠보를 가사문학의 출발점이라 볼까? 상춘곡이 첫 가사 작품이기도 하지만 송순이나 정철이 정극인과 교류하며 그의 문학과 사상을 익히고 공유했기 때문이라고 전북도립미술관의 이흥재 관장은 이야기한다.

"하서 김인후, 면앙정 송순 송강 정철 등이 당시 호남의 중심인물인 정극인 살던 이곳 칠보를 자주 찾았어요. 그러면서 상춘곡을 익혀 담양을 중심으로 가사문학을 꽃피웠다고 봐요."

그러면서 상춘곡에 대해 색다른 이야길 한다.

"정극인은 상춘곡을 통해 이곳에 성리학의 유교문화 가치를 실현하려 했어요. 문학이라는 형식을 빌려서요."

이어 이흥재 관장은 201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무성서원과 정극인의 묘소까지 안내하며 조선 초 불교의 영향이 아직 많이 남아있는 이곳에서 유교문화의 가치를 꿈꾸었던 불우헌 정극인에 대해 여러 이야기를 해준다.

치마폭을 잘라 그림을 그려 딸에게 선물한 다산

정극인의 삶과 사상에 대한 이야기를 추적추적 흔들리는 이슬비 사이에 남겨놓고 보성으로 향했다. 추위에 움츠러들던 몸은 다슬기탕으로 달랬다. 차창 밖으로 스치는 이슬비와 텅 빈 들녘이 봄준비로 기지개를 켜는 것처럼 보였다.

보성에서 하룻밤을 묵고 다산유물전시관을 들러 다산의 생애와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후 초당으로 향했다. 산행하기에 날씨는 맑게 개어 너무 좋다. 새로 낸듯한 두충나무가 가득한 길을 걸으며 누군가 한 마디 한다.

전시관에서 초당으로 가는 초입에 두충나무길이 나있다. 풍경이 상당히 운치있다.
 전시관에서 초당으로 가는 초입에 두충나무길이 나있다. 풍경이 상당히 운치있다.
ⓒ 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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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도 초당에 오르기 위해 이 길을 걸었을 것인디."
"이 길이 아닐 수도 있지. 근디 얼마나 가야 하남."
"얼마 안 갈려. 이삼십 분이면 가."

정약용의 생애는 일반적으로 3단계로 나누어 이야기 한다. 먼저 약용이 22살 때 벼슬길에 오른 후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지내다가 신교유옥 사건으로 강진에 유배되기 전까지 18년(당시 나이 40세), 강진에서 유배생활하며 외로움 속에서도 목민심서 같은 수많은 책을 저술하며 유배에서 풀려나기까지 18년(그의 나이 58세), 유배에서 벗어나 그의 고향에서 유유자적하며 마지막 생을 보냈던 18년의 생애까지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지만 그의 삶에 18이라는 숫자가 자리 잡고 있다.

다산이 강진으로 유배 온 후 지금의 다산초당에 거처를 정하기까지 불안한 나날의 연속이었나 보았다. 유배 온 후 강진 읍내 주막에 방 한 칸을 얻은 다산은 석 달 동안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두문분출 했다 한다. 이를 보다 못한 주막집 할머니는 기가 죽어 있는 젊은 사람의 모습이 안타까워 한 마디 했다 한다.

"아직 젊고 많이 배운 사람이 머땀시 그리 있능교. 재주 썩히지 말고 여그 있는 젊은 사람들이라도 가리치면서 살으야지."

그때서야 다산은 밖으로 나왔다 하니 당시 다산의 절망적인 심정이 어떠했는지 짐작이 갔다. 정조의 죽음과 함께 꽃을 활짝 피우기도 전에 날개가 꺾였으니 그럴 만도 했으리라.

그렇게 강진 읍내에서 8년을 보냈고, 초당에서 10년을 보냈다. 후세 사람들은 그 18년의 세월을 전화위복처럼 말하기도 하지만 어쩌면 책을 읽고 시를 짓고 글을 쓰는데 온 공력을 바치지 않았다면 다산은 그 긴 유배생활을 견디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다산이 시집가는 딸에게 그려줬다는 그림
 다산이 시집가는 딸에게 그려줬다는 그림
ⓒ 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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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런 강진에서 생활이 정도 들었나 보았다. 다산은 자신의 딸을 강진으로 시집까지 보냈다. 다산은 시집가는 딸에게 '매조도(梅鳥圖)'라는 족자를 만들어 주었다. 다산의 말을 보자.

"내가 강진에서 귀양살이 한지 여러 해가 지났을 때 부인 홍씨가 헌 치마 여섯 폭을 보내왔다. 이제 세월이 오래되어 붉은 빛이 바랬기에 가위로 잘라 네 첩을 만들어 두 아들에게 주고 그 나머지로 이 족자를 만들어 딸에게 준다."

그림도 그림이려니와 가족과 자식을 생각하는 아버지의 마음이 고스란히 묻어 있어 그림을 보는 내내 딸을 위해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는 다산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허면 왜 아내가 보내준 치마폭을 잘라 그림을 그렸을까. 다른 것도 있을 텐데. 아마 멀리 시집가는 딸에 대한 부정(父情)을 그림 한 장으로 표현했을 아비의 마음이 아니었을까.

다산이 찻물로 쓰던 약천은 점차 줄어들고...

다산초당. 1월 말의 한겨울인데도 햇볕이 초당 마루를 따스히 비추고 있다.
 다산초당. 1월 말의 한겨울인데도 햇볕이 초당 마루를 따스히 비추고 있다.
ⓒ 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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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유물전시관에서 다산초당까진 금세다.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초당이 나온다. 그런데 여름에 걸었던 길이나 지금 겨울에 걸었던 길이나 차이가 없다. 여름 더위 때문에 땀을 뻘뻘 흘리거나, 푸른 초목의 잎이 진 것 빼곤 느낌은 비슷했다. 걷기엔 여름보다 지금이 더 좋다.

초당에 도착하니 초당 서쪽에 있는 서암을 몇 몇 사람들이 깔끔하게 청소를 하고 있다. 해설사 김혜숙씨에게 누구냐 물으니 봉사활동을 하는 문화재지킴이라 한다. 이들은 순전히 이 지역 문화재를 보존하고 지키기 위해 쓸고 닦고 쓰레기를 줍는 일을 하고 있다 한다. 그들의 손길을 뒤로 한 채 일행들은 사진을 찍으며 여행의 기본적인 행사를 치루기에 바쁘게 움직인다.

"그런데 초당의 기와는 짚으로 바꾸지 않나요?"

언젠가 초당의 기와지붕을 초가로 바꾸어 본래의 모습을 찾는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있어 물었다.

"그냥 기와지붕으로 놓기로 했어요.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 강진 군민들이 반대를 했어요."
"군민들이요?"
"네. 이곳은 습한 곳이라 지붕을 자주 이어야 해요. 그런데 지붕을 이을 때 등록한 사람만 해야 한다고 해요. 그 비용이 만만치 않구요."

2년 전 여름에 봤을 땐 무너질 듯 허름했는데 보수를 했는지 깔끔해졌다.
 2년 전 여름에 봤을 땐 무너질 듯 허름했는데 보수를 했는지 깔끔해졌다.
ⓒ 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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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의 제자들이 공부하며 잠을 잤다는 서암. 방이 무척 좁은데 이곳에서 장정 사오명이 잠을 잤다고 한다.
 다산의 제자들이 공부하며 잠을 잤다는 서암. 방이 무척 좁은데 이곳에서 장정 사오명이 잠을 잤다고 한다.
ⓒ 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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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에 잘 느끼지 못하지만 여름에 이곳을 들르면 무척 습하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습하다 보니 지붕의 이엉이 쉽게 썩어 자주 이어야 한다고 한다. 그런데 그 비용이 만만치 않아 강진 군민들이 반대를 했다고 한다. 마을 주민들이 이엉을 이으면 어떠냐는 물음에 문화재라 등록한 사람만이 지붕을 이을 수가 있어 마을 사람들은 손을 댈 수가 없다고 한다.

예전부터 시골 어른들은 겨울에 짚으로 울타리를 만들고 지붕을 이을 이엉을 엮었다. 주민들 중에서도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지만 등록자만이 할 수 있어 이들은 손을 댈 수가 없다 한다. 그러다 보니 일도 일이려니와 비용이 많이 든다는 것이다.

다산초당은 집필 공간으로 사용된 초당을 가운데 두고 제자들의 숙소로 사용한 서암과 도서관 역할을 한 동암으로 이루어졌다. 초당 앞 작은 마당에 다산이 차를 다려먹었다는 바위 다조가 있다. 뒤쪽엔 다산 4경인 정석바위와 약천이 있다. 동암으로 가는 오른쪽에 다산이 직접 만들었다는 연못과 연못 가운데 연지적석가산이 있다. 이 또한 다산이 직접 만들었다는데 외로움을 달래기 위함이 아니었다 싶다.

그런데  김혜숙씨가 초당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면서 작년 여름부터 약천의 물이 줄어들고 있다고 했다. 이유를 물으니 산 아래에 대형 관정들을 많이 팠는데 그 영향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조심스레 내놓는다. 몇 백 년이 흐르면서도 샘물은 아무리 물을 퍼도 그대로였는데 줄어드는 모습을 보면서 이곳을 아끼는 사람들이 염려를 하는 듯 했다.

사실은 약천은 다산이 직접 판 샘물이다. 이 샘물로 차를 끓이고 밥을 지었다. 약천에 대해 다산은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약천
 약천
ⓒ 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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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정이 흐레는 없고 모래만 깔렸으니
한 바가지 떠 마시면 찬하(餐霞)보다 상쾌하다오
처음엔 돌틈의 승장혈를 찾았는데
도리어 산중에서 약 달이는 사람이 되었네
길을 덮은 연한 버들 비스듬히 물에 떠있고
이마에 닿은 작은 복숭아 거꾸로 꽃을 달고 있네
담도 삭이고 묵은 병도 낫게 하는 약효는 기록할만하고
나머지 또 길어다가 벽간다(碧磵茶) 끓이기에 좋다오

다산초당과 백련사를 오가는 옛길 발견

초당을 떠나기 전 뒤쪽으로 가봤다. 헌데 깨끗한 앞에 비해 뒤쪽은 어지러운 사랑의 낙서들이 여기저기 적혀있다. 그런 모습을 보고 동료 중의 한 사람이 툭 내뱉는 말이 씁쓸하게 다가왔다.

"양심은 있나 보네."
"왜?"
"앞에서 하기 창피하니까 뒤에 숨어서 저렇게 낙서를 해 놨잖어."
"저렇게 안 하믄 사랑이 안 이뤄지나 보지. 문제야."

초당 뒤 아궁이가 있는 벽면에 가득한 낙서들. 어떤 이는 이곳에 사랑의 서약도 해놓고 갔다
 초당 뒤 아궁이가 있는 벽면에 가득한 낙서들. 어떤 이는 이곳에 사랑의 서약도 해놓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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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를 지키는 지킴이들. 이들의 작고 큰 손들이 우리 문화재들을 지키는 것 같다
 문화재를 지키는 지킴이들. 이들의 작고 큰 손들이 우리 문화재들을 지키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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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은 아궁이에 불을 때며 저 멀리 있는 가족들 생각에 눈물을 지었을 것인데 지금의 사람들은 사랑의 낙서나 끄적이고 있는 현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 천일각에서 다산이 그리운 이들을 생각하며 바라봤다는 강진만 바다를 감상하고 백련사로 향했다. 백련사는 다산초당에서 800미터 정도 걸어가면 나온다. 시간으로 20여 분 정도 걸리는 산책길이다.

백련사로 가는 이 길을 다산은 수없이 다녔으리라 했는데 지금 우리가 걷는 이 길이 다산이 걸었던 길이 아니라 한다. 백련사 총무스님에 의하면 산허리 옆쪽에 초당과 백련사를 오가는 옛길이 있었고, 그 길을 다산은 오고갔다 한다. 그 옛길을 복원할 예정이라는데 몇 년 후엔 다산이 오갔던 길을 많은 사람들이 걸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다산과 아암, 혜장 스님의 발자취를 떠올려 볼 수 있을 것이다.

다산초당에서 백련사 가는 오솔길. 다산이 걸었던 길은 이 길이 아니라 다른 길이라 한다. 그 옛길이 발견되어 복원할 예정이라고 하니 곧 그길을 걸을 수 있을 것 같다.
 다산초당에서 백련사 가는 오솔길. 다산이 걸었던 길은 이 길이 아니라 다른 길이라 한다. 그 옛길이 발견되어 복원할 예정이라고 하니 곧 그길을 걸을 수 있을 것 같다.
ⓒ 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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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과 아암 이야기를 잠시 보자. 다산은 아암과 첫만남에서 손을 붙잡고 시냇물이 흐르듯 쉬지 않고 이야기를 나눴다 한다. 다산은 비로소 아암을 만나 후 지적, 심리적 갈등을 풀어낼 수 있었고 둘은 강진과 해남의 대흥사를 오가며 차를 마시고 우정을 쌓아갔다. 아암이라는 이름도 다산이 지어주었다 한다. 불교의 아암, 유교의 다산, 그 둘은 모든 것을 떠나 죽이 잘 맞는 연분이었나 보았다. 그러나 아암이 사십에 세상을 떠남으로써 둘의 관계는 단절되지만 다산과 아암의 만남은 다산에게 있어 유배생활의 단비와 같은 것이었다.

백련사의 절경 중의 하나인 동백나무 숲과 꽃망울을 터트린 동백
 백련사의 절경 중의 하나인 동백나무 숲과 꽃망울을 터트린 동백
ⓒ 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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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당에서 백련사 쪽으로 걷다보면 오솔길에서 백련사의 고즈넉한 모습이 한눈에 보인다. 그리고 삼분 쯤 더 걷다보면 울창한 동백숲이 눈에 들어온다. 가까이 가보니 벌써 꽃망울이 열려 있다. 동백하면 고창의 선운사가 유명하지만 이곳의 동백도 그 못지않다. 헌데 이곳의 동백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나무들마다 혹덩이들을 달고 있다. 이유를 물으니 바닷가에 위차하다 보니 왜구의 침입이 많았다 한다. 그 왜구의 침입에 대응하다 보니 나무들도 혹을 지니게 됐다 하니 강진 사람들의 아픔이 나무에도 깃들여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백련사와 관련된 이야기를 총무스님에게 맛깔나게 들은 후 돌아오는 길, 강진만 바다는 늘 있던 그대로 오가는 길손들을 잔잔히 바라보고 있었다.

백련사에서 바라본 바다
 백련사에서 바라본 바다
ⓒ 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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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다산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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