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권인가 절실한 외침인가? 지난 13일, 김상곤 경기도교육감은 기자회견을 자청해 "재정지원을 통한 교육복지 확대는 꼭 필요한 일로써 환영할 일이지만, 그것이 우리 교육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해법의 전부가 될 수 없다"며 '대학교육 혁신 문제'를 전면에 제기했다.
김상곤 교육감은 초·중등교육을 관할하는 임무를 지니며 대학교육은 교과부 소관이다. 그런데도 그는 기자회견문에서 "최근 국민적 공감을 얻으며 확산되고 있는 초·중등 혁신교육의 철학과 내용을 담아내고 이어갈 수 있는 대학교육의 혁신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일갈했다. 기자회견문 제목도 "초·중등교육정상화를 위한 대학교육 혁신 제안"이다. 그만큼 대학문제는 대학의 경계를 넘어선다는 말이다.
초·중등교육을 담당하는 교육감이 '대학 좀 바꿔달라'고 요구한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아니,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외국에서 살다 갓 들어온 사람이 아니라면 다들 알고 있다. 한국에서는 대학이 초·중등교육, 아니 이제 영·유아교육까지도 '잡아먹고' 있는 불편한 진실을.
빡빡해서 질식해버릴 것 같은 서열화의 피라미드
자본주의는 불평등이 구조화돼 있다. 불평등이 존재해야 사람들이 열심히 일하며 끊임없이 혁신을 이뤄 발전할 수 있다고 믿는 체제다. 이 때문에 가장 정직하고 깨끗한 자본주의 체제에서도 경쟁은 필수적이다. 조금 더 좋은 집, 좋은 차를 굴리고 싶은 인간의 욕망은 장려된다. 무진장,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을 숙명으로 아는 '자본주의 정신'말이다.
한국사회에서 교육이 신분상승의 주요 수단이 되었던 호시절은 지나갔다. 없이 살아도 자식을 좋은 대학에 보내면 가문을 일으킬 수 있다는 희망은 극소수에게만 허락되는 영광이다. 게다가 예전에는 '대학'만 가면 됐지만, 이제는 '어떤 대학'이냐가 중요하다. 이제 대학생은 흔해졌기 때문이다. 이미 대학생수는 20~24세 인구수보다 많아졌다. 그래서 '어떤 대학'에서 끝나지 않는다. 이제는 '전공이 뭐냐'도 서열화의 범위에 들어왔다.
한국에서 대학은 교육기관이 아니라 브랜드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돈을 주고 직접 거래할 수는 없는 모양이다. 투자를 통한 경쟁력 확보가 필요하다. 이런 상황에서 초·중등, 아니 옹알이를 할 때부터 브랜드 획득을 위한 치열한 경쟁의 장에 내쳐지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다. 모두가 대학입시라는 결승점을 향해 달려가는 상황, 끝이 보이지 않는 무한 경쟁, 상대평가의 악순환. 여기에서 참교육, 전인교육이 싹 틀 여지가 있는가?
초·중등교육을 담당하는 교육감이 '대학 좀 바꿔라'고 외친 것은 결코 월권이 아니다. 정수기 꼭지에는 세균이 넘쳐나는데, 정수기능만 개선한다고 될 일은 아니지 않은가?
학벌 타파의 승부수, 권역별 혁신대학
물론 김 교육감이 내놓은 대안들이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다. 그동안 진보정당과 교육운동단체 등에서 꾸준하게 제기했던 것들을 바탕에 두고 있다.
구체적 내용으로는 ▲ 고등교육정책기조 전면 재검토(국공립대 비율 50%이상 확대/국공립법인화 계획 중단) ▲ 혁신대학 지정운영(권역별 혁신대학) ▲ 대입체제 개선(질 높은 내신체제/모집단위별 특성화 전형) ▲ 반값등록금 실현(보편적 방식/사학부패 방지법 제정) ▲ 지역균형선발제와 사회배려대상자 전형 확대(지역할당제 25%/입학사정관제 정착) ▲ 국가직업교육위원회 설치를 통한 전문대학체제 개편(기업 연계형 전문대학육성/ 재직자 특별전형 확대) ▲ 국가교육위원회 설치 운영(교육혁신정책마련/시도교육청 및 교과부 위상정립) 등이다.
이 중 핵심은 '권역별 혁신대학'이라 할 수 있다. 권역별로 특정 국립대학을 혁신대학으로 지정하고 서울대 수준으로 육성하면서, 이 대학을 중심으로 권역별 대학혁신 네트워크를 형성하자는 것이다. 여기에 공무원이나 공기업 채용에서 권역별 할당제를 결합시키면 대학의 서열체제를 완화시킬 수 있다는 발상이다.
이런 생각은 오래 전부터 진보적 교육운동단체들이 대안적인 대안모델로 논의해온 '국립대 통합네트워크'에 기반하고 있다. 국립대 통합네트워크는 전국 국립대를 하나의 네트워크로 연결해 공동으로 입시전형을 실시하고 학점도 공동으로 한 뒤, 졸업 후에 받는 학위도 공동으로 하자는 주장을 핵심으로 한다. 부실 사립대를 국립대로 편입시켜 국립대의 비중을 확대하면 학벌과 대학서열문제가 획기적 돌파구를 마련함은 물론, 초·중등 교육의 천편일률적인 입시교육화도 해법이 보일 것이라는 주장이다.
김 교육감은 기존의 통합 네트워크 안에 있던 권역별 네트워크에 자신이 추진했던 '혁신학교' 모델을 결합시켜 '권역별 혁신대학'을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김상곤의 제안, 여러 측면에서 검증해야그의 제안은 오랫동안 진보교육운동단체에서 논의돼 오던 안을 종합한 것이기 때문에 비교적 쉽게 합의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지난해 기존의 국립대 통합네트워크안을 개선시킨 안과, 전면적 학제개편을 통해 고등교육의 기초단계를 '교양대학'으로 만들어 서열 없는 국립대로 운영하자는 안을 두고 교육단체 내부에서 논란이 있었으나, 지금은 서로의 장점을 잘 취합해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된 상황이다.
물론 더 논의가 필요한 부분이 없지는 않다. 예를 들어 권역별 혁신대학 모델은 약간의 개선이 필요하다. 강도 높은 서열화는 수도권 중심주의를 의미하는데, 전국 권역별로 동일한 형태의 혁신대학 모델을 만드는 것만으로는 강한 수도권 집중성을 막기 어렵다. 혁신대학 모델을 전국 권역마다 동일한 형태로 추진하기보다 계열별로 특성화된 혁신대학을 통해 지역대학으로 진학하려는 동기를 강화시키는 방식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김 교육감은 서울대학교를 비롯해 일부 대학이 실시하고 있는 '지역균형선발'을 모든 대학에서 실시하자고 제안하고 있지만(신입생 25% 지역할당), 이 제안 역시 수도권으로 진학하려는 강한 동기가 여전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 제안일 수밖에 없다. 혁신대학만으로는 뭔가 부족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권역별로 계열 특성화된 네트워크를 설정하고, 각 계열 특성화된 네트워크에 최우선의 국가 지원과 대우를 약속해야만 지역으로 내려가려는 동기가 발생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외에도 김 교육감의 제안은 다양한 측면에서 검증돼야 한다.
김상곤 효과로 대학 프레임 더 확장해야그러나 이런 세세한 논쟁거리가 있다 하더라도, 김 교육감의 제안이 던져주는 파장은 매우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올 것이 분명하다. 그동안 진행되어온 대학운동의 '재정확대' 프레임을 벗어날 돌파구를 열고 있기 때문이다.
'재정확대' 프레임을 주축으로 한 운동들은 여전히 매우 부족하지만 적지 않은 성과를 남긴 것도 사실이다. 일례로 서울시립대와 충북도립대는 반값등록금이 실현됐고(서울시립대는 올해부터 50%인하, 충북도립대는 올해 30%인하 후 단계적 실현), 강원도립대 역시 등록금을 20% 인하하고 향후 무상교육 방침을 선포했다. 서울시는 학자금 이자 지원 조례를 제정해 올해 예산으로 50억 원을 통과시켰으며, 국가장학금도 1.75조로 증액됐다.
든든학자금 역시 그동안 논란이 되었던 군복무 중 이자를 올해부터 면제키로 했고, 신청 기준도 기존의 B학점 이상에서 C학점 이상으로 완화되었다. 학자금 대출(든든학자금/일반상환학자금대출) 이자율 또한 지난해 4.9%에서 올해 3.9%로 추가로 인하됐다. 그러나 여전히 지독한 학벌과 서열문제, 필요 이상의 대학진학과 이에 따른 학력차별 문제, 또 이로 인한 입시 지옥의 만성화 문제 등은 제대로 논의되지 못하고 있다
대학을 근본적으로 혁신함으로써 초·중등교육을 정상화시키고자 했던 여러 교육단체에서도 자신들이 끌어온 논의를 아직은 대중적 논쟁의 장으로 끌어 내지 못했다. 여전히 %싸움에 골몰하고 있는 정치권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초·중등교육을 제대로 하려면 대학교육부터 바꿔야 한다는 김상곤 교육감의 주장은, 충분히 대중적 논쟁으로 가기 위한 출발점으로 삼아볼 만하다.
2012년은, 감히 말하건대 체제를 논해야 하는 시기다. 이름만 살짝 바꿔놓고 쇄신을 들먹이거나 정체모를 공약들을 마음대로 끼워 맞추고서 생색내는 이들에게 무엇을 지향하는 지, 그 실체를 물어야 하는 시기다. 그리고 우리가 올해 물어야할 핵심에 '대학'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덧붙이는 글 | 손우정 기자는 진보정책연구원(구 새세상연구소) 연구위원입니다. 13일 있었던 김상곤 경기도교육감의 기자회견문 전문 첨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