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국내서 가장 승승장구한 재벌은 단연 현대기아자동차 그룹이다. 200조원이 넘는 사상최대의 매출과 함께 20조 원에 달하는 순이익을 올렸다. 순이익 규모만 따지면 삼성을 앞설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지난 2000년 정몽구 회장이 자동차 계열사로만 그룹을 독립한 이후 처음이다. 덕분에 현대차는 글로벌 빅5 자동차회사로 성장했다. 하지만 이들의 화려한 성장 뒤편에는 짙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공장에선 노동자들의 밤샘노동과 비정규직의 차별이 여전하다. 이들의 잇단 자살과 분신도 이어진다. 중소협력 하청업체들도 마찬가지다. 정 회장의 아들 정의선 사장의 일감몰아주기 등 편법 경영권 승계도 논란거리다. MB정부 최대 수혜그룹으로 꼽히는 현대차 성장의 이면을 들여다본다. [편집자말] |
"(회사에서) 징계받는 자리에서도 절반은 졸고 있었어요. 얼마나 피곤하면 그럴까, 싶기도 하고." 지난 8일 오후 울산에서 만난 윤영호(48)씨의 말이다. 그는 자동차부품업체 유성기업에 일하다가 해고당했다. 유성기업은 현대자동차의 주요 부품을 납품하는 1차 협력업체다. 작년 5월 이곳 노동자 550명이 파업을 벌였다. 이들 요구는 단순했다. '밤에는 잠 좀 자자'는 것이었다.
윤씨의 동료인 국석호(41)씨는 "야간조 근무자는 밤 10시에 출근해 이튿날 오전 8시까지 일한다, 새벽 2시부터 30분간의 식사시간 빼고는 쉬지 못한다"고 말했다. 이어 "예전에는 1시간에 10분의 휴식시간을 보장해줬지만 지금은 아예 없어졌다"면서 "퇴근 3분 전까지 일하고 있다"면서 고개를 떨구었다.
유성 파업이 전국적으로 떠들썩했던 이유는 단 하나였다. 현대자동차 생산에 영향을 줬기 때문이다. 경제신문을 비롯한 보수언론은 앞다퉈 "1300원짜리 피스톤링을 만드는 회사가 현대차 라인을 멈추게 했다"면서 비판의 날을 세웠다. 심지어 이명박 대통령까지 나서 '귀족 노동자의 파업'이라고 했다. 결국 파업 6일 만에 공권력이 투입됐고 파업은 끝났다.
현대차의 피스톤링 납품가 인상... 노조 "회사에 이익 챙겨주며 관리"파업 후폭풍은 거셌다. 노조원들을 기다린 것은 대대적인 해고와 징계였다. 노조 쪽에선 배후로 현대차를 꼽고 있다. 이미 유성기업 노사간 합의했던 '야간노동 폐지'도 현대차의 개입으로 어그러졌다는 것이 노조 쪽 이야기다.
성세경 금속노조 대전충북지부 조직부장은 "회사는 파업으로 인해 막대한 손해를 입었다고 했지만, 실제는 파업 이후 오히려 큰 이익을 올렸다"고 말했다. 유성은 작년 3분기까지 89억 원에 달하는 영업이익을 올렸다. 2010년 같은 기간에 비해 89%나 증가한 금액이다.
이유는 유성이 현대차에 납품하는 부품 단가가 크게 올랐기 때문이다. 노동자운동연구소가 유성기업 사업보고서를 분석한 것을 보면, 지난 2010년 유성의 피스톤링 납품 가격은 개당 1155원이었다. 하지만 작년 파업 이후 3분기에 1424원으로, 23.3%나 크게 올랐다. 2007~2010년 피스톤링 납품가격이 4.4% 인상된 것을 감안하면, 파격적인 셈이다.
특히 작년 현대차의 1차 부품 협력업체 가운데 납품 가격이 오른 곳은 그리 많지 않다. 한국프렌지공업과 파크코 등은 1%대 인상에 그쳤다. 인지컨트롤스의 경우 7.9%나 깎이는 등 줄어든 곳도 많았다. 1년 새 20% 넘게 부품값이 오른 곳은 유성기업이 거의 유일하다.
성 부장은 "현대차의 이같은 부품값 인상은 그동안 전례를 볼수 없었던 일"이라며 "현대차가 유성의 부품 단가를 크게 올려주는 대신, 경영과 노사문제에 교묘하게 개입하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유성의 보복... 대대적인 해고와 징계, 그리고 회유유성기업의 노조에 대한 보복도 이어졌다. 파업을 이끌었던 노조간부 27명은 해고됐다. 이어 남아 있는 직원들에게는 노조 탈퇴 요구가 끈질기게 이어졌다. 대신 친회사 성향의 새로운 노조에 가입하라는 회유가 따랐다. 다시 윤영호씨의 말이다.
"회사는 아내, 사돈의 팔촌, 시의원까지 동원해 노조 탈퇴와 어용노조 가입을 종용했어요. 징계나 고소고발에서 빼주겠다거나, 빚 탕감과 퇴직금 중간 정산을 우선적으로 해준다고도 했지요."
그는 또 "유성과 관련없는 다른 회사를 통한 압박까지 들어오면서 많은 노조원들이 힘들어했다"면서 "회사의 이같은 회유와 협박으로 사람들이 '미안하다'며 어용 노조에 가입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윤씨처럼 기존 노조에서 버틴 조합원들에겐 대대적인 징계가 내려졌다. 334명의 노조원이 정직과 출근정지 등을 받았다. 이 가운데 7명은 해고를 당했다. 또 노조원 88명을 상대로 회사는 17억5500만 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반면, 새 노조에 가입한 이들 대부분은 주의 등 가벼운 징계를 받는 데 그쳤다.
홍종인 금속노조 아산지회장은 "회사에 출근한 노조원들에게 인근 농가에 가서 고구마 캐는 일을 하도록 시키거나, 녹 제거나 청소 등의 허드렛일을 시키는 경우도 있다"면서 "조합원에 대한 회사의 노동 탄압이 심하다"고 강조했다.
홍 지회장은 이어 "요즘처럼 대중소기업 불공정 하청에 대한 사회적 비판이 높을 때는 현대차도 과거 다른 방법으로 접근하는 것 같다"면서 "회사 쪽에 일정한 인센티브 등을 줘가면서 협력업체의 노사관계에 대한 지배와 개입을 강화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윤씨는 "작년 10월 회사관계자들이 '새로 만든 노조가 노조원의 과반을 차지해 대표 교섭노조가 되지 못하면 현대차에서 물량을 줄이겠다고 했다'면서, 어용노조 가입을 독려했다"고 주장했다.
성세경 조직부장 역시 "유성기업 사태 이후 다른 부품사들도 현대차로부터 압박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현대차 관리자들이 지역 부품사에 상주하면서 동조파업과 연대를 차단했다"며 "금속노조가 지난해 공권력 투입 이후, 동조 파업을 하려 했지만 현대차의 압박에 부담을 느낀 부품사 노조가 파업에 참여하지 못했다"고 전했다.
유성기업 "현대차 지배개입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물론 이같은 노조의 주장에 대해 회사 쪽에선 "사실과 다르다"는 입장이다. 이기봉 유성기업 아산 공장장은 현대차의 회사 노사문제 개입 주장에 대해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상식적으로 현대차 입장에서는 부품 업체가 불안정할 경우 당연히 어떤 사정이 있는지 들여다 보려 할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며 "현대차의 지배 개입이나 부품사 길들이기와 같은 노조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피스톤링 납품가격 인상에 대해, "고급 사양으로 피스톤링을 만들다 보니, 높은 원가 탓에 납품가격도 오른 것"이라고 해명했다. 현대차가 길들이기 차원에서 올린 것이 아니라, 원자재 값 상승에 따른 인상이라는 것이다.
조합원 대량 징계에 대해서도 책임론으로 맞섰다. 그는 "회사를 일 주일 동안 점거해 큰 손해를 끼쳤다면, 당연히 책임질 사람은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법원은 본안판결 때까지 해고자 생계 차원에서 (노조쪽) 가처분을 받아들였지만, 법적인 판단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다"고 전했다.
'밤에는 잠 좀 자자'는 유성기업 사람들. 그들의 요구는 아직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여전히 그들은 밤늦은 시간에, 열악한 작업환경 속에서 일하고 있다. 오히려 동료들의 징계와 해고로 남아 있는 이들의 노동강도는 더욱 세졌다. 유성 사건은 대중소기업 간 불편한 진실을 우리에게 그대로 보여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