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가을 이후로 아내의 출퇴근을 도와주는 일에서 종종 생각나는 게 하나 있습니다. 아내가 현재 근무하고 있는 초등학교는 우리 집에서 15분 거리에 있습니다. 태안군 원북면 반계리라는 곳에 있지요.
우리 집이 있는 태안읍 남문리에서 거기를 가려면 태안읍 삭선리와 원북면 대기리, 청산리를 거쳐야 합니다. 그런데 청산리 초입을 지날 때는 한 가지 안타까움으로 마음이 스산해지곤 합니다.
한쪽 길가에 긴 포도밭을 거느린 양옥집이 한 채 있답니다. 이웃집과 조금 떨어져 있긴 하지만 그다지 외딴집은 아닌데, 어두운 밤에는 이웃집이 좀 더 멀게 느껴질 법도 한 형국이지요.
그 집에는 노인 부부가 살고 있답니다. 봄여름 동안 노인 부부가 포도밭을 가꾸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습니다. 8월부터는 포도를 수확하는데, 그 집 마당에는 포도상자들이 많이 쌓였고, 2차선 도로를 오가는 차량들이 그 집 앞마당에서 쉬어 가는 모습도 자주 볼 수 있었습니다. 포도농사의 노고 속에서도 수확의 기쁨과 보람이 노인 부부에게 한 아름씩 안겨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지요.
그런데 그 집에 두 번이나 밤손님이 들었답니다. 일주일 간격으로 한밤중에 밤손님이 들어서 한 번은 140여 만 원을, 또 한 번은 86만원을 빼앗아 갔다고 하더군요. 노인네들이 어렵게 땀 흘려 포도농사를 지어서 번 돈을 밤중에 방문을 따고 칼 들고 들어가서 빼앗아 간 도둑은 얼굴도 사지도 멀쩡한 사람일 게 분명했습니다. 육신이 멀쩡하니 기력 좋게 그런 강도짓을 할 테지요.
하지만 그가 어떻게 생긴 위인인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경찰이 열심히 단서를 찾고 수사를 했을 테지만, 범인을 잡기는 영 글은 것 같습니다. 또 모르지요, 그 범인이 다른 데서 다시 도둑질 강도질을 하다가 붙잡혀서 여죄를 모두 토설하게 될지도….
아내의 출퇴근을 돕느라 차를 몰고 청산리 2차선 도로를 달릴 때마다 자꾸 그 집을 돌아보게 됩니다. 한밤중에 강도가 들었을 당시 노인 부부가 얼마나 놀라고 무서워했을지, 땀 흘려 포도농사를 지어 번 돈을 모두 빼앗기고 났을 때의 허탈한 심정과 비감은 또 얼마나 컸을지…. 생각할수록 마음이 아픕니다.
그런데 하루는 그 집 앞을 지날 때 불현듯 옛날 일 한 가지가 부옇게 떠올랐습니다. '설렁줄'에 대한 기억이었습니다. 1950년대 말, 내 초등학생 시절이었던 것 같습니다. 집집마다 설렁줄이 설치된 때가 있었습니다.
설렁줄이란 빈 깡통이나 방울을 달아서 흔드는 줄을 이르는 말입니다. 국어사전에는 명사로 '설렁을 울릴 때 잡아당기는 줄'이라고 풀이되어 있습니다. 사람을 부르거나 이웃 간에 무슨 신호를 보낼 때 사용하는 일종의 통신 수단이지요.
그게 먼 옛날부터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월탄 박종화 선생의 역사소설 <임진왜란> 속에 원균과 함께 설렁줄이 등장하고, 최명희 선생의 대하소설 <혼불>에서도 설렁줄이 방울소리를 들려준다고 하는군요.
그 설렁줄을 나는 어렸을 때 실제로 접해 보았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와 어머니가 마루 위 처마 밑으로 설렁줄을 설치하는 것이었습니다. 작은 깡통과 방울들이 달린 설렁줄은 옆집에서 우리 집으로 이어진 것이었고, 또 우리 집에서 다른 이웃집으로 이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옆집에서 와서 우리 집 마루를 거쳐 다른 이웃집으로 가는 설렁줄은, 줄이 꽤 튼튼한 것 같았고, 내 눈에 신기하게만 보였습니다. 아버지는 마루 위 처마 밑을 지나는 설렁줄에 또 한 가닥의 줄을 연결하여 방문 틈으로 넣어서 방 안에서도 설렁줄을 흔들 수 있도록 해놓았습니다.
도둑이 많던 시절이었습니다. 뭐 도둑이야 지금도 없을 수가 없고, 오히려 지금이 더 이런저런 형태의 도둑이 많을 수도 있지만…. 그리고 방범 시설이며 통신 수단이 거의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도둑이 들거나 어떤 위급한 일이 발생했을 때 즉시 이웃집들에 알리기 위해서 가가호호 설렁줄이 연결된 것이었지요.
그 설렁줄이 얼마나 이용되고 실효를 거두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내 기억으로는 그 설렁줄이 오래 가지도 않았던 것 같습니다. 아마 이용도가 낮고, 간혹 한 집에서 설렁줄을 흔들어 신호를 보낸다 해도 옆집에서 즉각적으로 확실하게 반응하는 경우도 드물고 해서 자연 유명무실하게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 설렁줄을 처음 설치했을 때는 이장님도 와서 보고, 면서기와 지서 순경도 와서 검사를 하고 했는데, 우리 집에서 설렁줄을 흔든 일은 한 번도 없었고, 또 이웃집에서 설렁줄을 흔들어 우리 집에 신호를 보내온 일도 전혀 없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밤손님은 두 부류일 터였습니다. 방 안에서 잠자는 사람들이 깨지 않도록 쥐도 새도 모르게 은밀히 일을 하는 부류가 있고, 복면 쓰고 칼 들고 들어와서 노골적으로 강도짓을 하는 부류가 있을 터였습니다.
밤손님이 전자일 경우 주인은 아예 설렁줄을 흔들 기회도 없을 테고, 후자일 경우에는 강도를 만난 상황에서 주인이 설렁줄을 흔들고 어쩌고 할 여유가 없을 터였습니다. 자칫했다간 설렁줄이 오히려 화근이 될 수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도둑이 대개는 집 안 형편이며 설렁줄 같은 것들을 미리 알고 주거 침입을 할 터이니 사전에 설렁줄을 무용지물로 만들 수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이래저래 설렁줄을 활용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고, 집집마다 설렁줄을 연결한다는 것이 그럴듯한 발상이긴 하지만 애초부터 무용지물을 비용 들여 만든 것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선친께서 살아계실 때 언젠가 한 번 내 어렸을 때의 설렁줄 기억이 떠올라서 말을 꺼낸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선친은 기억을 더듬으며 그 설렁줄 설치공사 덕에 옆으로도 뒤로도 돈을 챙긴 사람들이 있을 거라고 하시더군요. 그 '돈' 때문에 그런 발상과 공사가 가능했을 거라는 얘기였지요.
가가호호 설렁줄을 연결하는 공사 계획이 애초 누구의 머리에서 나왔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또 그게 전국적인 사업이었는지 지역적인 사업이었는지도 확인해보지 못했습니다. 그 시절에는 면장과 면의원도 투표로 뽑는 등 5·16군사혁명 이전의 지방자치 시절이었으므로, 설렁줄 공사는 지역단위 사업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어쨌거나 나는 오늘 어렸을 때의 그 희미한 기억을 다시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아침저녁으로 원북면 반계리를 가고오며 청산리 초입머리 포도밭 옆의 노인 부부가 사시는 집 앞을 지날 때마다 설렁줄 기억이 떠오르곤 합니다.
물론 설렁줄 같은 것은 지금 세상에 전혀 필요가 없는 것이겠지요. 설령 설렁줄이 설치되었다 하더라도 그 밤손님이 그걸 그대로 두었을 리 만무하고, 또 설령 설렁줄이 온전했다 하더라도 노인 부부가 강도 앞에서 설렁줄을 흔들 수는 없을 터였습니다.
그래도 나는 자꾸만 이상하게 설렁줄 생각이 납니다. 전혀 이용가치가 없었던 옛날의 그 설렁줄을 오늘날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하루 종일 포도를 판 노인 부부가 고단한 몸을 뉘고 자고 있는 방문을 몰래 따고 들어가서 돈을 모두 강탈해간 복면강도가 전화선도 잘라 버리고 휴대폰도 빼앗아간 사실, 20미터쯤 떨어진 이웃집에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던 사실 등을 떠올리면 괜히 설렁줄 생각이 나는 거지요.
옛날에도 유명무실했던 그 설렁줄은 오늘날 아무런 필요도 없고, 또 설렁줄에 대한 내 기억 역시 별 연관이 없는 것이건만, 나는 자꾸만 옛날 생각이 납니다. 헛농사를 지은 셈인 그 노인 부부를 생각하면 너무 안타깝고, 괜히 설렁줄이 지니는 원시성에 대한 그리움 같은 것이 작동하기 때문일 것도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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