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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발의 노인이 담요 하나를 덮고 잠을 청하고 있다.(자료사진)
백발의 노인이 담요 하나를 덮고 잠을 청하고 있다.(자료사진) ⓒ 선대식

가족과 헤어져 홀로 쓸쓸히 살아가는 독거노인 한 분이 계십니다.

자식이 있되 연락이 두절 된 지 수년. 수급자의 자격도 갖추지 못해 얼마 안 되는 정부 보조금도 받지 못하는 처지의 어르신들, 하루종일 폐지를 주워서 힘겹게 살아가는 분을 우리는 주변에서 쉽게 만나볼 수 있습니다. 선거철을 맞이하여 복지 논쟁은 그 어느 때보다 뜨겁지만, 국가의 돌봄 서비스는 헐겁고 산적한 사회문제들을 해결해 가기에 나라 살림은 늘 곤궁하기만 합니다.

복지 사각지대에서 힘겹게 사는 이 분을 도울 방법은 없을까요? 불우이웃 돕기 같은 민간 자선활동을 활성화하거나 정부 복지재정을 확충하여 좀 더 촘촘한 사회안전망을 만드는 방법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민간 자선활동은 경기에 따라 부침이 많고, 보편적 복지의 혜택이 소외된 곳, 어두운 부분까지 고루 펼쳐질 가능성은 그리 높아 보이지 않습니다.

복지 사각지대서 힘겹게 사는 독거노인 도울 방법은?

그런데 이런 접근방법 말고도 동네 어르신들을 잘 모실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만일 이 노인이 사는 마을에 지역화폐가 통용되고 있다면 말이죠. 지역화폐 시스템이 작동하는 곳에서는 돈이 없어도 '상품'을 얻을 수 있고, 그 대가를 돈이 아닌 '서비스(노동력)'로 갚을 수 있습니다. 한겨울 엄동설한에 폐지를 줍기 위해밖에 나가지 않아도 동네 가게에서 라면 몇 봉지를 '당당히' 가져올 수 있습니다.

이 노인분이 동네 가게에 들러 먹을거리를 '외상으로' 가져왔다면 일정한 시간 동안 골목청소를 하는 대가로 부채를 청산할 수 있고, 직업을 얻지 못해 놀고 있는 백수 청년이 동네 피자가게에서 만 원짜리 피자를 주문해 먹었다면 다음 날 이웃집 가게에서 한 시간 동안 배달을 해서 빚을 갚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1시간의 노동량은 만 원에 가치에 해당한다는 등가물의 원칙을 정하고, 동네 사람들이 이 거래 표준을 합의하면 됩니다.

마을에는 돈은 없지만, 재능과 기술을 가진 이들이 많으며, 해야 할 일 또한 많습니다. 돈이란 상품과 서비스를 제공해서 받은 대가일 뿐이고, 사람들은 다시 그 돈을 가지고 자신이 필요로 하는 것을 구매하려 할 것이므로 만일 상품과 서비스가 서로 맞교환될 수 있는 기준이 있다면, 화폐라는 매개수단이 없어도 거래는 가능합니다. 돈이 없어도 서로 가진 것을 나누며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멋진 일입니까?      

이론적으로 지역화폐 시스템은 상품과 상품, 서비스와 서비스의 교환 등 지역에서 생산되는 모든 상품과 서비스 유통 및 소비를 매개할 수 있습니다. 지폐방식을 사용하든 계좌방식을 사용하든, 지역화폐는 시장 원리(화폐금융을 통해 상품과 서비스가 교환되는 질서)를 따르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거래 품목과 내용을 지역사회의 필요에 따라 자유롭게 조직화할 수 있습니다.

교환의 대상이 많으면 많을수록, 이 화폐 시스템에 참여하는 사람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지역화폐는 더 활성화됩니다. 서로 가진 것들을 교환하는 방식이 비효율적이고 훌륭한 시스템은 아닐지 몰라도 금융회사에 빚을 지지 않아도 되고 이자비용이 외부로 빠져나갈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 지역화폐 시스템은 마을 살림살이를 윤택하게 하는데 '마중물'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국가통화 이외에 별도의 대안화폐를 고민해야 하는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요? 현대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금융 시스템에 심각한 균열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금융 그 자체가 지닌 악마적 속성 때문에, 많은 사람이 돈에 지배당하며 고통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은 나름대로 재능과 능력을 갖추고 있으므로 돈이 없어도 각자 지닌 능력을 발휘하면서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들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만 원짜리, 우리가 그것을 만 원이라 믿기 때문

애당초 화폐란 물물교환의 불편을 덜기 위해 자연히 발생한 것입니다. 애덤 스미스의 표현을 빌자면, '인간의 교환 성향과 분업 조건이 곧 화폐의 기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만 원짜리 지폐가 만 원인 이유는 우리가 그것을 만 원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화폐란 특정한 상품이 아니라 상품들 사이의 관계가 반영된 그 무엇, 즉 상품관계를 잇는 '도구'일 뿐입니다.

화폐는 관계의 사슬을 잇는 매개고리이고, 네트워크이며 하나의 시스템입니다. 화폐금융의 역사는 이 네트워크가 어떻게 작동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화폐 경제에 '포섭'되기 전에도 인류는 나름대로 잘 지내왔다는 사실입니다. 물물교환했다고 해서, 질 낮은 도구(주화)를 사용했다고 해서 큰 불편을 겪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단지 추론일 뿐입니다. 18세기 유럽의 역사서는 화폐가 인간의 삶을 오히려 더 힘들게 만들었다는 많은 증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역통화(local currency)는 언제부터 사용되기 시작했을까요? 지역통화는 국가통화가 아주 귀하거나 혹은 구할 수 없을 때 자연 발생적으로 만들어졌습니다. 1920년대 독일 바이마르 정권이 높은 인플레이션을 겪었을 때, 1930년대 미국 대공황 시절 일자리가 없어 달러를 구하기 어려웠을 때가 그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당시 많은 사람이 자체적인 지역통화를 만들어 서로가 가진 것들을 교환했습니다. 필요가 수단을 나은 것입니다.

스위스에는 76년의 역사를 가진 WIR(독일어로 '우리'라는 뜻이며, 통화이름임과 동시에 경제집단을 의미함)라는 대안화폐가 있습니다. 스위스 전체 중소기업의 약 20%가 사용하고 있는 이 통화는 맡기거나 빌릴 때 이자를 받지 않습니다. 오래전에 국제 공인을 받았고 국영 화폐인 스위스프랑과 1:1로 교환할 수 있으며, 이 통화를 기반으로 한 별도의 신용카드도 통용되고 있습니다.

브라질 사베, 돈 없어 학업 포기할 학생을 위한 교육통화

브라질에는 사베(Saber, 지식이라는 뜻임)라고 불리는 교육통화가 있습니다. 발행 규모만 20억 달러가 넘는 이 화폐는 청소년들의 교육진흥을 위해 설계되었습니다. 하급반 학생은 이 통화를 주고 상급반 선배에게 수업을 살 수 있습니다. 일종의 개인 과외 비용인 셈이죠. 상급반 학생은 하급반 후배를 가르치고 모은 통화를 하고 있다가 대학에 진학할 때 학비 대신 지급합니다. 이 화폐는 학습능력은 있으나 돈이 없어서 학업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학생들에게 교육기회를 제공해주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현재 지역통화는 세계 35개국 이상에서 합법적으로 운영되고 있고, 활용 목적이나 교환 방식도 매우 다양합니다. 금융 선진국인 미국을 포함하여 각국 정부들이 앞다투어 지역화폐 사용을 장려하는 이유는 현존하는 화폐시스템에 심각한 결함이 존재한다는 것이 확인되었기 때문입니다. 대안화폐 전문가인 베르나르 리에테르(Bernard Lietaer)는 "현존하는 통화시스템은 이미 기능을 상실했으며, 향후 몇 년 내에 총체적인 통화위기가 발생할 확률이 50%에 가깝다"고 언급한 바 있습니다.

혹자는 말합니다. 지역화폐 시스템은 기껏해야 국가통화를 보완하는 수준의 '보충적' 화폐일 뿐이고, 등가교환의 수단으로서 지녀야 할 내재가치도 부족하다고. 현재의 통화질서를 획기적으로 바꾸지도 못하며, 금융의 악마적 속성을 없앨 힘도 없다고 말입니다. 맞습니다. 지역통화는 '크고 위대하고 담대한' 목표를 추구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국가통화와 평화롭게 공존하면서도 금융 본래의 순기능을 통해 인간의 삶을 윤택하게 할 수 있는 도구로 쓰이기를 꿈꿉니다.

지구촌 곳곳에서 신선한 '화폐 실험' 진행


대립이 아니라 공존을, 부수고 다시 만드는 혁명적 방법이 아니라 기존에 있는 것들 안에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소박하지만 의미 있는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이 올바른 접근방법이라고 믿으니까요. 마치 사회적경제가 자본주의와 시장 질서를 부정하지 않고 그 안에서 새로운 경제 생태계를 만들어가는 것과 같은 원리라고 할까요?

문제는 이 '합리적 계산 가능성'을 지역 안에서 어떻게 구조화시키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시골의 작은 마을에서, 도시 기반의 공동체 안에서, 나눔과 호혜의 경제블록이라 할 수 있는 '사회적 경제' 영역 안에서 화폐 본래의 기능을 유지하면서도 서로가 가진 것들을 사이좋게 나눌 수 있는, 돈 중심이 아니라 인간 중심의 네트워크와 시스템을 짜는 것. 지금 지구촌 곳곳에서 아주 새롭고 신선한 '화폐 실험'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부'로서의 화폐가 아니라 '나눔'의 수단으로서의 그물망을 만드는 프로젝트 말입니다.      

당신이 살고 있는 마을에도 똑똑한 화폐 하나를 키워보지 않으시렵니까?

"이것은 돈입니다. 이 돈의 소지자는 한 시간의 노동이나 협정된 가치의 물건 및 서비스를 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을 받고, 또 소비해주시기 바랍니다. 이타카아워는 우리 재산을 지역에서 순환시킴으로써 지역 사업을 촉진하며, 새 일자리 창출을 위한 자금 마련에 기여합니다. 이타카아워는 실제 자본에 의해 뒷받침됩니다. 우리 기술, 우리 노동력, 우리 연장, 숲, 들, 강이 그것입니다." - 미 뉴욕주 이타카시에서 사용되는 대안화폐 이타카아워(Ithaca HOUR) 뒷면 글

덧붙이는 글 | 문진수 기자는 사회적경제센터장 (mountain@makehope.org)입니다.



#사회적경제#희망제작소#대안화폐#지역통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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