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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나꼼수>의 정봉주 전 의원에 대한 대법원 판결과 영화 <부러진 화살>의 개봉으로 사법부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크게 높아지고 있는 듯하다. 아마도 존경과 경의보다는 불신과 실망이 커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지난 15일, 나는 대전지법의 한 판결을 보고 나서 현재 판사들의 자격과 상식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15일 대전지법 민사3단독 김재근 판사는 시각장애인의 홀로 목욕탕 출입1과 관련해 어이없는 판결을 내렸다.

지난해 12월, 시각장애 1급의 김아무개씨는 대전의 한 목욕탕 업주로부터 "시각장애인 혼자서는 목욕탕 출입을 할 수 없다"며 출입을 제한당했다. 김아무개씨는 "시각장애인의 출입을 제한한 것은 장애인에 대한 차별"이라며 목욕탕 업주를 상대로 정신적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한 바 있다.

이 소송을 담당한 김 판사는 판결문에서 "시각장애인인 원고가 목욕탕 내에서 시설을 이용하던 도중 사고가 발생하게 되면 업주인 피고가 그 책임에서 언제나 완전하게 자유로울 수 없고, 피고가 동성 보호자를 동반하지 않은 원고를 목욕탕에 입장하게 하는 것은 피고에게 과도한 부담이나 현저히 곤란한 사정 등이 있는 경우에 해당하므로 정신적 손해의 배상을 청구한 원고의 주장은 이유가 없다"고 밝혔다.

또 김 판사는 판결문을 통해 "원고가 입장, 탈의, 샤워기, 온탕, 냉탕, 착의, 퇴장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데 이런 도움을 피고에게 일방적으로 부담 지우는 것은 합리적이라고 보기 어렵다"고 명시했다.

김 판사, 장애인이 전체 구성원의 '부담'인가

동네 목욕탕.
 동네 목욕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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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이번 판결문대로라면 시각장애인은 비단 목욕탕뿐만 아니라 모든 사회생활을 포기해야 한다. 대중교통은 어떤가? 시각장애인이 대중교통을 이용하려면 아무래도 지하철역의 공익요원이나 주변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만약 위 판결문을 그대로 적용해 본다면 시각장애인이 대중교통 수단을 이용하는 것은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하고, 이는 대중교통 서비스를 제공하는 업주에게 과도한 부담으로 작용된다는 이야기인가.

아니, 어쩌면 시각장애인을 포함한 장애인의 생존 자체가 이 사회에 부담으로 작용하는 것일 수도 있는 걸까. 장애인은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생산적 활동에서 열등한 지위에 있고, 이는 우리사회 전체 구성원의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는 것 아닐까. 나는 이렇게 김 판사에게 묻고 싶다.

그럼 정말 시각장애인이 이번 판결을 맡은 김 판사의 주장처럼 목욕탕에서 사고의 위험에 노출되고 따라서 목욕탕 업주에게 과도한 책임을 전가할 수 있는가? 이를 알아보기 위해 과거 목욕탕 관련 사고에서 시각장애인이 얼마나 사고를 당했는지 살펴보자.

현대해상화재보험 사보 2009년 5월 호에는 목욕탕 사고 관련 한국소비자보호원의 조사결과가 실렸다. 2006년부터 2008년까지 소비자보호원에 신고된 사고 76건 중 소비자와 연락이 가능했던 47건에 대한 설명이 담겨 있다. 먼저 상해 원인을 살펴보면, 욕실·탈의실의 바닥이 미끄러워서가 22명(46.8%), 출입문에 손이나 발이 끼어서 8명(17.0%), 수도꼭지·샤워기에서 갑자기 뜨거운 물이 나와서 5명(10.7%), 욕실 내 계단이 미끄러워서 4명(8.5%), 기타 8명(17.0%)이었다.

이 조사에서 장애인이 사고를 당했다는 보고는 없었다. 또 다른 조사에서는 남녀 68명의 연령과 성별을 살펴봤을 때 남녀비율은 반반으로 엇비슷했다. 연령별로 20대가 27.9%를 차지해 가장 많은 것으로 조사됐다. 9세 이하 어린이 사고자는 22.1%였으며, 30대가 10.3% 순으로 집계됐다. 역시 시각장애인 사고는 보고되지 않았다.

장애인을 사회 구성원으로 보지 않는 판결

4.27 재보궐선거가 치러진 2011년 4월 27일 경기 성남 분당구 정자동 한솔종합사회복지관에 마련된 투표소에서 한 시각장애인이 안내견의 도움을 받아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하고 있다.
 4.27 재보궐선거가 치러진 2011년 4월 27일 경기 성남 분당구 정자동 한솔종합사회복지관에 마련된 투표소에서 한 시각장애인이 안내견의 도움을 받아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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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열거한 조사 외에도 지금까지 목욕탕 등 공중위생시설의 안전사고에 관한 여러 가지 조사 결과에서 시각장애인이 사고를 당했다는 결과는 아직 찾을 수 없었다. 관련 기사 역시 찾을 수 없었다. 굳이 이런 통계를 들이밀지 않더라도 이번 김 판사의 판결은 문제가 많다.

첫째, 시각장애인의 능력에 대한 인식부재다. 시각장애인은 아무런 활동도 할 수 없다는 전제가 이번 판결문에서 보인다. 판결문에서는 "원고가 입장, 탈의, 샤워기, 온탕, 냉탕, 착의, 퇴장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데"라고 명시돼 있다.

1급 시각장애인인 나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대목이다. 우리나라의 목욕탕 구조는 대부분 대동소이하다. 시각장애인도 목욕탕 구조를 누구나 알고 있으며 자신이 이용하는 목욕탕은 특히 더욱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특별한 사유 말고는 남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거의 없다. 특별한 사유란 탈의실에서 자신의 옷장을 찾을 경우 등 극히 한정된다. 그럼에도 김 판사가 판결문을 통해 이런 내용을 이야기한 것은 시각장애인에 대한 인식 부재를 스스로 시인한 것과 같다.

둘째, 김 판사의 판결은 건전한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장애인을 부정하는 판결이다. 설령 시각장애인이 혼자서 목욕탕 이용을 할 수 없다고 치자. 그럼 시각장애인은 혼자서는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말아야 하는가? 앞서도 말했듯이 그렇다면 장애인차별금지법이나 장애인복지법 등 관련 법규는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사회가 이런 법을 규정하고 있는 것은 사회적으로 소수이고 사회적 배려가 필요한 장애인들이 신체적으로 어려움에도 함께 살기 위한 길을 모색하기 위해서다.

셋째, 이번 판결은 헌법에 위배되는 위헌적 판결이다. 헌법은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제10조)라고 밝히고 있다. 이는 비 장애인 뿐만 아니라 장애인도 마찬가지이다. 목욕탕은 자신의 신체를 모두 노출해야 하는 공간이다. 아무리 동성 보호자라고 해도 자신의 신체를 알고 있는 사람에게 보이기 꺼려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으며 보호자와 함께 할 수 없는 사람도 존재한다. 만약 이번 판결대로라면 이런 사람은 목욕탕에서 자신의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것인가.

중요한 것은 이런 이유가 아니다. 이번 판결문은 한 사회에서 장애인의 존재를 어떻게 보는가에 대한 그릇된 시각이 오롯이 담겨 있는 판결문이다.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이번 판결에 절대 승복할 수 없다. 이렇게 사법부에 대한 신뢰가 조금씩 허물어질 때 사법부의 위기가 찾아오는 것이 아닐까.

<부러진 화살>은 영화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태그:#시각장애인, #목욕탕 판결, #부러진 화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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