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기억이 가물 하지만 몇 십 년 전에 저의 어머니는 신 김치 냄새가 물큰한 죽을 자주 끓여주셨습니다. 그건 저희 집 만의 별식은 아니었고 경상도 어느 집에서나 먹는 음식인 듯했지요. 유달리 음식을 밝히는 친구네 집에 숙제하러 갔던 날, 그 애 어머니도 이 죽을 푸르르 끓이셨습니다. 택시 운전을 하셨던 그 애의 아버지까지 때마침 늦은 점심을 드시러 오셨기에 식사 준비는 서둘러졌고, 저도 그 가족과 어울려 한 상에 둘러앉았습니다.
벌건 김치와 밥을 넣어서 푹 끓인 그 죽을 친구네 아버지는 얼큰하다 하시면 두세 그릇을 연거푸 드셨지요. 다소 비만기가 가득한 그 애네 식구들은 너나없이 솥 바닥까지 달달 긁어가며 열심히 먹었고, 친구의 동생은 죽 그릇에 콧물이 줄줄 빠지는지도 모르고 정신없이 먹어댔답니다. 저는 손가락으로 한입 두입 멀뚱히 뜨면서 얼른 집에 가서 제대로 된 밥 먹어야지 생각만 하고 있었습니다.
흔히 밥국, 밥죽 때로는 갱식, 갱식이, 갱죽 이라고 불리는 이 음식은 저의 집에서도 자주 보던 음식이었습니다. 그 친구네 가족만큼이나 이 음식 갱식이를 좋아하시는 저의 어머니 때문이었지요. 동네 아주머니들이 집에 놀러 오시면 어머니는 당연히 갱식이를 끓이셨습니다. 멸치 육수와 콩나물을 팔팔 끓여 육수를 내고, 숭숭 썬 김치와 식은 밥을 넣어 푹 끓이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때로 집에 칼국수가 있으면 그것을 훌훌 풀어서 함께 끓이기도 했습니다. 어쩔 땐 수제비를 얼른 떠서 넣기도 했지요. 겨울 같은 때는 무시래기를 총총 썰어 넣기도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 풍부한 영양까지 고려된 음식인 듯도 하고, 그런 의미로 보자면 그저 코웃음 칠 음식은 아닌 듯도 합니다.
갱식이? 이름이 참 이상하다 싶었지요. 밥을 다시 끓였기에 '다시 갱' 이란 한자를 사용해서 갱식이라고 했다는 설도 있고, 무 같은 야채와 고기를 넣고 오래 끓인 국을 '갱'이 라 한다는 말도 있더군요. 그리고 일반적인 죽이 생쌀을 넣어 끓이는 데 비해, 갱식이는 밥을 다시 끓인다는 게 차이점이겠지요. 그저 찬장에 남은 반찬을 이것저것 다 넣고, 때론 국이 남아있다면 그것도 넣고, 찬밥과 김치로 최종적인 간을 하며 끓인 것을 갱식이라 한다면 이해가 쉽겠네요.
이렇게 집에 있는 걸 활용해서 만드는 음식이다 보니 그 모양새가 단정치는 못했고, 죽이라고 하기엔 찰기가 좀 없을 수밖에요. 어려웠던 시절에 대충 허기나 가라앉히려 먹는 그런 음식들, 이를테면 부대찌개 같은 거랑 비슷한 의미를 갖고 있는 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구수하고 얼큰하다며 어른들은 그 음식을 좋아했습니다. 동네 아줌마들이 놀러오는 날에 갱식이를 끓이면 맛있다며 서로 더 먹으려 난리도 아니었고요.
학교가 파하고 집에 오는 길에 어느 집에서 갱식이 끓이는 냄새가 구수하게 나면 얼른 집에 가서 어머니를 보채서 얻어먹어야지 하는 마음에 발걸음이 빨라졌다는 이야기, 나무하러 산에 지게 지고 올라갔다가 집에 왔을 때 철없는 막내가 자신 몫의 갱식이를 다 먹어치워서 별나게 싸웠다는 이야기. 동네 할머니와 할아버지들도 갱식이를 드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로 꽃을 피우셨습니다.
물론 제가 갱식이를 알게 된 당시의 한국 경제는 최고조에 올라있었고 부모님의 경제 사정도 썩 나쁘진 않았기에, 꼭 그 음식이 아니라도 더 맛나고 영양 많은 것을 먹을 여유는 충분히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른들은 그 음식에 관한 추억을 오래 간직하고 계셨기에 그토록 맛나게 드시지 않았나 싶네요.
요즘은 좋은 음식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겉모양만 좋아뵈는 음식들도 슬금슬금 나오게 됐고요. 전복을 넣은 순대국, 가짜 푸아그라를 얹은 삼겹살 구이, 크림소스를 끼얹은 떡볶이 같은 음식들로 인해 소박한 음식들이 점점 명품화 되고, 더불어서 그 음식이 가진 고유의 의미가 사라지는 지금, 음식 상인들은 그저 손님의 눈과 입을 혼란케 해서 이목을 끄는 데만 집중하는 듯도 합니다. 가면을 쓰고 상대에게 입에 단 소리만 하면서 기실로 뒤에선 험상궂은 생각을 하는 사람을 보는 것 같아 섬뜩해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요즘 시내를 걷다보면 갱식이 파는 가게가 가끔 눈에 띕니다. 놀랍게도 오로지 그 음식 하나로만 장사하는 곳이 있단 말이지요. 젊은 사람들이야 '별것도 아닌 그따위 음식을 팔다니' 하며 어이없어 할 수도 있지만, 이제 갱식이는 갖가지 화려한 음식들이 뒤덮은 한국 사회에서 역사와 풍습을 품은 추억의 음식으로서, 누군가에게는 뜨끈한 소울푸드가 되고 있단 증거겠지요.
하늘에 걸린 쇠기러기벽에는 엮인 시래기시래기에 묻은햇볕을 데쳐처마 낮은 집에서갱죽을 쑨다밥알보다 나물이 많아서 슬픈 죽훌쩍이며 떠먹는 밥상 모서리쇠기러기 그림자가간을 치고 간다<안도현-'갱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