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이 제 모습을 찾아가고 있다. 1995년, 우리마음 한구석을 짓눌렀던 옛 조선총독부 청사가 철거됐다. 2006년, 마침내 경복궁 북문인 신무문(神武門)이 열렸고 이와 함께 집옥재·팔우정·협길당이 개방됐다. 2009년에는 향원정 서쪽 태원전이, 2010년, 건청궁이 복원·개방됐다.
지난 11일 찾은 경복궁은 모습만 변한 것이 아니었다. 답사객이나 관람객의 수준도 높아져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기도 한다. 근정전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북악과 함께 지붕선을 보기도 하고 땅에 깔려있는 박석의 촉감을 느껴보기도 한다.
소그룹의 학생들이 문화해설사와 동행해 구경한다. 해설사도 따분한 이야기는 피하고 영화에 나온 장면을 상기시키거나 관련 일화를 들려주며 재미있게 설명한다.
영제교 근방에서는 학생들이 '메롱' 동물을 찾겠다고 달려가는 광경을 쉽게 볼 수 있다. 영제교 양옆에 있는 네 마리의 천록(天鹿)중에 혓바닥을 반쯤 내보이며 귀엽게 금천(禁川)을 쳐다보는 서수(瑞獸)를 찾는 것이다.
경복궁에 있는 '메롱' 동물을 아시나요?
사악한 기운을 물리치는 천록이 '메롱'을 하고 있다니 해학이 넘치고 기발하다. 이런 재치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게 아니다. 송광사 관음전소맷돌 사자, 해남 대둔사 대웅전소맷돌 돌사자, 홍천 괘석리사사자탑 사자상 등에 해학과 재치가 숨어 있다. 시대와 왕조를 뛰어넘어 경복궁 석공에게로 전해진 우리의 아름다움인 것이다.
근정전에 이르러서는 근정전 월대에 조각해 놓은 십이지(十二支)상 중에 자기 띠에 해당하는 동물을 찾아 갖은 표정을 지으며 사진을 찍는다. 공간과 방위를 상징하는 사방신(四方神)중에 남쪽의 주작 앞에 자기가 닭띠라고 하면서 포즈를 취하는 가하면, 서쪽을 지키는 백호 앞에 호랑이와 같은 표정을 짓기도 한다.
얼핏 보아 주작은 닭처럼 보이니 그럴 만도 하다. 용·개·돼지 띠 관람객은 자기 띠가 보이지 않는다고 투정을 부리지만 모두 즐거운 표정이다. 십이지상중에 용·개·돼지는 빠져있으니 아무리 찾아도 찾지 못하는 게 당연하다.
경회루 누각에 오르니... 왕이 부럽지 않네
경회루도 2005년부터 제한적으로 개방하고 있다. 본래 경회루는 담으로 둘러쳐져 보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은 폐쇄적 공간이었다. 2층 누각에 오르면 경복궁 사방이 보인다. 동쪽으로 근정전, 사정전, 강녕전, 교태전의 지붕과 합각이, 북쪽으로는 북악의 산봉우리가 보인다. 서쪽엔 인왕산이 보이고 남쪽으로는 수정전이 보인다. 경복궁 앞 높은 건물에서 내려다보는 맛하고는 차원이 다르다. 경회루의 주인이 된 기분이 드는 것이다.
아미산 굴뚝과 교태전 꽃담이 산뜻해졌다. 깨지고 뭉개진 벽돌을 다시 쌓았고 밝기도 밝아져 더욱 화려해 보인다. 꽃담과 굴뚝으로 장식된 아미산 후원을 지나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전엔 힐끗 지나치고 말았을 공간이 이제 경복궁에서 제일 아름다운 곳 중 하나로 인식되고 있다.
최근 가장 많이 변한 곳은 경복궁 북쪽이다. 경회루 이층 누각에서 볼 때 멀리 보이던 북악이 가깝게 보인다. 예전에 안 보이던 것들이 보인다. 북악에서 흘러내린 물길이 보인다. 그 서쪽으로 태원전, 북서쪽으로 팔우정·집옥재·협길당 건물이, 북쪽으로 건청궁이 한눈에 들어온다.
태원전은 경복궁의 빈전(殯殿)이다. 빈전은 국상(國喪) 때, 상여가 나갈 때까지 왕이나 왕비의 관을 모시던 전각이다. 왕과 왕비가 죽으면 빈전(殯殿)에 관을 모시고 교외에 마련된 산릉(山陵)에 시신과 관을 묻은 후에 혼전(魂殿)에 신주(神主·죽은 사람의 위패)를 모신다.
왕의 경우 3년간 혼전에 모시게 된다. 그 후 종묘에 신위를 모시게 되는데, 태원전은 경복궁의 빈전으로 건립됐다. 문경전은 혼전으로 세워졌으며 이와 함께 선원전은 영정을 모신 곳으로 건립됐다. 문경전과 선원전은 복원을 기다리고 있다.
다시 열린 신무문, 참 반갑다
경복궁 북문인 신무문이 열려 광화문으로 들어와서 신무문으로 나갈 수 있게 됐다. 북방을 관장하는 신령한 동물인 현무(玄武)를 뜻해 신무문이라 이름 붙여졌단다. 5·16 쿠데타 이후 30경비대가 경복궁에 주둔하면서 폐쇄된 후 45년 만에 다시 우리의 품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팔우정, 집옥재, 협길당은 대원군이 경복궁을 재건할 때는 없었던 건물이다. 고종이 창덕궁에 있을 때 지은 것을 고종 28년 경복궁으로 돌아오면서 이 자리로 옮겨 온 것이다.
이 3채의 건물은 이름은 다르지만 전체가 하나로 연결돼 있다. 원래 임금의 영정을 모시기 위해 지어졌으나 고종은 서재 겸 외국사신을 만나는 장소로 이용했다.
집옥재(가운데 건물)는 지붕은 맞배지붕이고 좌우 벽체와 뒷벽 모두 적황색 벽돌로 쌓았다. 뒷벽 반월창은 화강암으로, 만월창 아랫부분은 화강석으로, 윗부분은 적황색 벽돌로 원을 돌렸다. 건물 중앙계단에는 사악한 기운을 물리치는 동물인 서수상을 조각해 건물의 격을 높였다는 평이다.
내부 가운데에 만월창을, 좌우 양쪽에 반월창을 뒀다. 분합문의 창살장식은 모두 이 당시 신식으로 인식되던 중국식을 따랐다. 현판은 송나라 명필 미불의 글씨를 집자해 만들었고 중국풍으로 세로로 길게 세웠다.
집옥재가 중국색채가 강한 건물이라면 동쪽에 있는 협길당은 우리 고유의 전통건물이다. 집옥재 서쪽에 있는 팔우정은 건청궁의 장서고로 증층팔각의 정자형 건물인데, 집옥재가 주요건물이고 양쪽 두 채는 부속 건물로 보면 된다.
향원정 북쪽, 건청궁도 완전 복원됐다. 건청궁은 경복궁에서 제일 북쪽, 한적한 곳에 자리하고 있다. 경복궁이 중건되고 5년이 지난 고종 10년(1873년)에 지어졌다.
건청궁에는 고종의 침소인 장안당과 명성황후가 머문 곤녕합이 있으며 누마루인 옥후루가 그 옆에 붙어있다. 장안당에도 추수부용루(秋水芙蓉樓)라는 누마루가 딸려있는데 수리가 날개를 활짝 펼친 듯 그 위용이 대단하다. 건청궁은 사랑채인 장안당과 안채인 곤녕합 그리고 부속건물인 복수당으로 구성돼 있어 이름은 궁이라 하나 사대부 살림집 구조를 하고 있다.
살림집에서 힘들게 지냈던 고종
혼돈의 정치 환경으로 고종은 이곳에서 편안하게 머무르지 못한다. 대규모 화재와, 임오군란, 갑신정변이 연이어 일어났다. 결국, 1895년 명성황후가 옥후루에서 시해되기에 이른다. '모처럼 장만한 살림집'에서 살림의 맛을 보진 못했다.
건청궁에 들어 평안한 마음과 혼란한 마음이 교차하는 것은 건청궁이 살림집구조를 하고 있다는 역설적 사실 때문일 것이다.
건청궁은 일제에 의해 철저히 망가진 이후 복원된 곳이고, 태원전은 1990년대까지 군부대가 주둔한 후 복원된 곳이다. 색칠을 다시 하고 벽돌을 새로 쌓는 것과는 다른 의미가 있다. 일제뿐만 아니라 군사문화로부터의 완전한 복원이라는 점에서 우리의 마음을 후련하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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