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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하고 가세요. 대형마트 휴점 반대 서명입니다. 소비자의 권리를 찾는 서명하고 가세요."

서점에 들른 지난 일요일(26일) 오후. 대형마트 길목에 '대형마트 강제 휴점 반대'라는 입간판을 양쪽으로 세워 놓고, 점원인지 아르바이트생인지 모를 사람들이 서명을 권유하고 있다. 책상위에는 대형마트 강제 휴무의 부당성(?)을 알리는 전단과 서명용지, 사탕과 비스킷, 음료수까지 준비해 놓고 있었다.

소비자는 대형마트, 슈퍼마켓 SSM의 강제 휴점을 반대합니다.

입간판 큰 글씨 밑에 반대 이유가 가지런히 적혀 있다. ▲ 소비자의 선택권 무시 ▲ 장바구니 물가상승 초래 ▲ 쇼핑불편 초래 ▲ 좋은 상품을 싸게 사는 기회 박탈 ▲ 임대업자 및 근로자 피해 ▲ 농어민 피해 ▲ 소비침체로 친서민정책 역행.

참, 읽어볼수록 묘하다. 대형마트, 기업형 슈퍼마켓(SSM)의 난립으로 전통시장 전체가 초토화되고 영세 자영업자들이 길거리에 나앉는 참극이 하루가 멀다 않고 신문지상에 오르내리는데 이 궤변은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사탕과 비스킷으로 아이를 불러세워 부모들의 서명을 유도하는 저급하기 짝이 없는 '100만 소비자 서명운동'. 사탕 하나를 아이에게 물려주고 음료수 한 잔을 받아 든 젊은 부부. 서명이 어떤 미래를 불러올지 알기는 하는 걸까?

대형마트가 강제 휴점 반대를 위한 소비자 서명 운동을 받고 있다.
▲ 대형마트 100만 소비자 서명운동 안내문 대형마트가 강제 휴점 반대를 위한 소비자 서명 운동을 받고 있다.
ⓒ 안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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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기를 앞두고 '폐업떨이'에 나선 동네 문구점

"요즘 누가 문구점에서 가방 사고 공책 사요? 마트에서 설 끝나자마자 '신학기 대전'이라고 문구 세일하는데. 신학기 대목 장사도 옛말이지요."

동네 중학교 초입에 있던 문구점이 며칠 전에 문을 닫았다. '전 품목 50% 세일' 며칠에 '폐업떨이'를 마친 문구점. 때 묻은 진열대가 실려 나가고 유리문에 '임대 문의' 안내판이 붙었다. 중학교가 생겨날 때부터 장사를 했다는 문구점 주인은 하나라도 더 팔아치우기 위해 신학기를 앞둔 지금으로 폐업 시기를 잡았다고 한다.

작년 연말 동네 어귀에 삼겹살 식당이 폐업을 하고, 단골 식당은 주인이 바뀌었다. 걸어서 갈 수 있는 백화점과 대형마트만 세 곳. 기업형 슈퍼마켓과 대형 쇼핑몰이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위치한 우리 동네. 십수 년 들락거리던 식당이 문을 닫고 서점과 동네 빵집이 없어지는 것, 더 이상 놀랄 일도 새로운 일도 아니다.

비단 내가 사는 동네의 문제만 그런 것도 아니다. 하루에 200만 원 매출을 올리던 생선 가게가 30만 원도 못 번다는 하소연, 아침 7시에 문을 열어 낮 12시까지 개시도 못했다는 슈퍼 주인의 이야기는 1월 말 이마트가 들어선 서울 공덕시장 상인들의 이야기다.

전주, 부천, 대구, 부산, 광주, 대형마트와 기업형 슈퍼마켓(SSM)은 전국 곳곳의 골목을 파고들었고 자영업자의 절규는 그칠 날이 없었다. 그러나 자본에서 밀리고 법의 보호도 없는 싸움은 승패가 예견되어 있었다.

중소기업청과 시장경영진흥원에 따르면 2003년부터 7년 동안 전통시장 178곳이 줄어들었고 2005년부터 5년 동안 3만7000여 개 점포가 감소했다. 반면 대형마트는 2003년 265곳에서 2010년 450곳, 기업형 슈퍼마켓은 같은 기간 234곳에서 866곳으로 늘었다고 한다. 또 매출액도 2010년 기준, 대형마트 3사의 매출액이 전통시장 전체의 매출액보다 9조7000억 원이나 많다고 한다.

연중무휴, 24시간 영업, 신학기 세일, 바캉스 세일, 봄맞이 세일, 명절 세일, 김장 세일, 사시사철 할인 행사가 끊이지 않는 대형마트. 신학기를 앞두고 문구점이 폐업을 하고, 명절을 앞둔 재래시장에서 손님 없다는 푸념. 여름 휴가 전에 대형마트의 삼겹살 전쟁은 동네 정육점을 문 닫게 만들고, '통큰 치킨', '통큰 두부', '이마트 피자'에 이르기까지 독식을 위한 탐욕은 끝이 없었다. 그러면 그럴수록 골목과 재래시장은 황폐화됐다.

대형마트의 서명운동... '이유 같지 않은 이유'

김종훈 전 통상교섭본부장이 27일 오전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 대회의실에서 열린 '한미FTA 지키기 1000만 서명운동 돌입 및 한미FTA 반대 후보 낙선 운동 선포 기자회견'에 참석해 특강을 하고 있다.
 김종훈 전 통상교섭본부장이 27일 오전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 대회의실에서 열린 '한미FTA 지키기 1000만 서명운동 돌입 및 한미FTA 반대 후보 낙선 운동 선포 기자회견'에 참석해 특강을 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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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논의되었던 것이 상생법(대중소기업상생협력촉진법)과 유통법(유통산업발전법)이었다. 대형마트와 기업형 슈퍼마켓을 최소한이라도 통제해 재래시장과 자영업자도 살 수 있도록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 상생법·유통법의 개정 취지였다.

그러나 이조차도 쉽지 않았다. 당시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은 "국회가 쌍둥이법(유통법·상생법)을 모두 처리한다면 우리나라의 대외 신인도는 크게 떨어질 것"이라며 WTO규정 위반이란 이유를 들어 반대했다. 여당과 야당의 극심한 대치 속에 파행을 거듭하다가 2011년 12월 30일이 되어서야, 영업시간을 제한하고 의무휴업일을 매월 1일 이상 지정토록 한 유통법·상생법 개정안이 통과될 수 있었다.

전주시의회가 대형마트는 자정부터 오전 8시까지 폐장하고, 둘째주와 넷째주 일요일은 강제 휴무하도록 하는 조례 계정안을 2월 7일 통과시키자 서울, 부산, 경기, 인천 등 지방자치단체에서 관련 조례 개정을 검토하겠다고 나섰다.

이에 대해 대형마트의 반발은 거세다. 대형마트와 SSM 등이 회원으로 참여하고 있는 체인스토어협회는 지난 2월 17일 헌법소원과 가처분신청을 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YTN 2012. 2. 17. 보도). 아르바이트 사원 6000여 명이 일자리를 잃고, 농축산물 판매량 감소로 5500억 규모 피해가 농민에게 돌아가고, 장바구니 물가가 상승할 것이라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라고 한다.

판매 사원의 50% 이상을 협력업체 직원으로 고용하고 계산원 등을 비정규직으로 채용하며 저임금 구조를 조장해왔던 대형마트. 산지 소 값 폭락에도 쇠고기값이 여전히 비싼 것은 백화점, 대형마트의 폭리 때문이라는 공정거래위원회 발표(서울신문 2012.1.21 보도)도 아랑곳없이 강제 휴무가 농민들의 피해로 돌아가리라는 억지. 소비자에게 농민의 이름을 빌린 겁박이 아니고 무엇인가?

4년 전 이마트와 거래를 하다 20억 손해를 보고 분신한 차아무개씨의 죽음(여성조선 2008.3.18 보도). '통큰 두부' 전쟁에 거래를 일방적으로 거부당한 두부 제조업체. 30억을 대출받아 공장 증설까지 마친 그 두부 회사를, 직원 80명을 내보낼 처지로까지 몰았던 것(SBS 2011.2.19 보도)은 대형마트의 횡포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이제 와서 협력업체 피해를 운운하고 소비자 장바구니가 걱정된다니. 1000원에 생닭을 팔고 1500원에 시장 3배 크기의 두부를 팔았던 것이 협력업체를 위한 일이었나(오마이뉴스 2011.3.28 보도)? 아니면 소비자 장바구니를 위한 일이었나?

최소한의 자영업자 보호 장치인 상생법의 강제 휴무조차조차도 무력화시키려는 서명운동과 헌법소원. 소비자와 농어민, 협력업체와 비정규직 노동자까지 끌어 들여 탐욕을 감추는 저급한 술책. 후안무치가 아니면 무엇이라 하겠는가?  

대형마트의 골목시장 잠식을 이 정당은 막아줄 수 있을까?
▲ 선거를 앞두고 공약을 내건 현수막 대형마트의 골목시장 잠식을 이 정당은 막아줄 수 있을까?
ⓒ 안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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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마트가 골목상권까지 들어온다고? 안대~!"

아무리 선거가 코앞이라도 하지만 그 변신이 놀랍다. 상생법이 한-EU FTA와 충돌한다며 법안 상정에 딴지를 걸었던 이명박 정부. 대형마트 때문에 장사가 안 된다는 상인들의 하소연에 인터넷 판매라도 해보라던 대통령. 비정규직법을 움켜쥐고 값싼 노동력을 제공하며 대형마트를 지원해왔던 여당이 이제 와서 골목상권을 지키겠다니, 선거를 앞둔 변신, 여자의 변심처럼 무죄일까?

한 달에 2일 강제 휴무로 시장이 예전처럼 되살아나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한꺼번에 왕창 구매하는 과소비가 일어날 수도 있고, 24시간 영업하는 대형 쇼핑몰에 어부지리를 가져다 줄 수도 있다. 그러나 한 달 2일의 강제 휴무와 영업시간 제한은 골목 상권을 살리려는 시작이고 최소한의 시도일 뿐이다. 앞으로도 더 많은 시도와 논의가 없다면 논란 많은 강제 휴무도 언발에 오줌 누기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

저렴한 노동의 악순환, 소비자가 나서서 끊어야

저렴한 상품이 뒷받침해 왔던 저렴한 노동. 저렴한 노동을 조장해온 저렴한 국가 정책. 이를 극복하지 못한 미래는 암울할 수밖에 없다. 단지 골목 상권이 초토화되고 영세 자영업자가 거리에 나앉고 끝나는 문제가 아니라, 우리 미래, 우리 후세대의 미래가 영원히 저렴한 노동의 노예가 될 수 있다.

폐업한 자영업자가 비정규직으로 줄을 서고, 회사에서 밀려난 정규직이 마지막 자본을 털어 치킨집 사장이라는 자영업자가 되는 싸구려 노동의 악순환. 우리의 자식들이 마트 계산원이 되기 위해 대학을 가고, 비정규직으로 평생을 살아야 한다면 너무 비참한 것이 아닌가?

소비자인 서민들이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 단지 편리하다는 이유로 주말에 한 주의 살림살이를 카트에 쓸어 담는 소비 문화를 바꾸어 내지 않으면 1%를 제외한 99%에게는 미래가 없다. 자본과 부화뇌동했던 정부. 선거 때가 되어서야 태도를 바꾸어 골목시장을 지키겠다는 정당을 믿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의 미래, 우리가 설계하고 만들어 가야 한다.

시장을 지키고 자영업자를 지켜낼 힘. 더 나아가 동전의 양면 같은 노동자·자영업자가 자본에 종속되지 않고 서민의 한 몸으로 살아 갈 수 있는 힘. 그것은 정치권에서 나오는 것도 정권의 힘에 의해 강제되는 것도 아니다. 저렴한 상품을 위해 미래를 저당 잡히지 않으려면 착한 소비, 상생의 소비가 공유되어야 한다.     

"늘 가까이에서 고객 여러분을 모시고자 하는 저희들의 뜻과 고객 여러분의 쇼핑권리를 찾는다는 심정으로 아래 양식지에 서명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달콤한 사탕과 비스킷과 음료수가 놓인 서명 가판대. 당신은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태그:#대형마트 강제 휴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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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진보는 냉철한 시민의식을 필요로 합니다. 찌라시 보다 못한 언론이 훗날 역사가 되지 않으려면 모두가 스스로의 기록자가 되어야 합니다. 글은 내가 할 수 있는 저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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