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8월 마지막 날 밤이었습니다. 동생이 우리 곁을 떠나고 1년 하고 한 달이 지났을 때였습니다. 동생의 부재가 불러오는 여전한 혼란스러움과 외로움과 허허로움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날 밤 동네에 있는 영화관에 홀로 영화를 보러 갔습니다. 큰 유리창 너머에 비치는 조금은 야윈 듯한 내 모습을 보면서, 동생이 떠난 후 시간은 그냥 흘러만 가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무더운 여름날, 바람 한 줄기 흘러가는 시간에도 동생은 멀어져가고, 나도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습니다. 하루만큼의 나이테가 그려지고 있었습니다.
영화 제목은 <인셉션>이었습니다. 꿈에 관한 영화라고 할 수 있겠네요. 다른 사람들과 함께 꿈을 꾸고, 꿈 속에서 다시 꿈을 꾸고, 또 꿈을 꾸고, 마지막엔 주인공이 있는 세상이 꿈인지 현실인지 알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마는 영화였습니다. 그 꿈속에서 주인공은 죽은 아내를 만납니다. 아내를 기억하는 에너지가 너무나 강해서 어떤 꿈을 꾸더라도 그 꿈속에 아내가 나타나는 거지요. 상영시간이 2시간에 가까운 영화를 보고 나와,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만약 꿈속의 장소를 설계하여 그곳에 누군가를 불러들일 수 있다면, 그곳은 동생과 함께 떠났던 피피섬의 바닷가이고, 동생이 어딘가에서 아이스커피 한 잔을 들고 나타나 "언니야, 커피 사왔어" 했으면 좋겠다. 만약 동생이 없는 이 현실이 내가 꾸는 꿈이라면 내가 꿈을 깼을 때, 동생과 함께했던 그 피피섬 바닷가에서 낮잠을 잔 거라면 좋겠다.'영화를 보면서, 자연스럽게 동생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건 어쩌면 논리도 이유도 필요없는 조건반사 같은 거였습니다. 꿈에서만 내게 말을 걸고, 꿈에서만 내게 웃음을 보이고 꿈에서만 숨을 쉬고 걷고 뛰고, 꿈에서만 살아 있는 동생이었으니까요.
여행을 좋아했던 동생은 더 이상 살아있지 않습니다동생을 보내고, 그 현실이 너무나 믿기지 않았을 때는 '현실 1, 2, 3, 4'에 대한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나만의 '현실 1, 2, 3, 4'입니다.
'현실1'에서는 동생은 더 이상 살아있지 않습니다. 동생은 4년여 암투병을 하다 결국 너무나 뜨거웠던 한 줌 재가 되어 바람을 타고 멀리멀리 흩어져 버립니다. 서른한 살. 여행을 좋아했던 동생이 자유롭게 전 세계를 돌아다닐 수 있도록 마음속으로 빌어주었던 현실입니다.
'현실2'에서는 동생은 여전히 암 투병을 하고 있습니다. 지독히도 싫어했던 CT촬영 조영제를 맞고, 긴장된 표정을 숨기지 못한 채 결과를 확인하러 의사선생님을 만나고, 일반인 눈으로는 알 수도 없는 흑백 암 덩어리의 크기에 일희일비하는 그 현실이, '현실2'입니다.
'현실3'에서도 동생은 암 판정을 받았지만 다행히도 완치되어 있습니다. 그리하여, 동생은 그 또래들처럼 지긋지긋하기도 하고 또 가끔은 행복하기도 한 그런 30대의 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현실4'에서는, 동생은 한때 몸이 안 좋아 병원에 갔지만 검사 결과 큰 병이 아니어서 간단한 치료만 받고 퇴원해서 평범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역시나 그렇고 그런 30대의 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내가 언니보다 오래 살 테니 걱정하지 마셔!"
이런 생각이 돌고 돌다 보면 마지막엔,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현실이 실제가 아니고 꿈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닿고 맙니다. 동생이 떠나고 없는 이 꿈은 '현실2'의 내가, 혹은 '현실3'의 내가, 혹은 '현실 4, 5, 6' 그 어느 곳에서의 내가 꾸는 꿈인 거지요. 그리고 <인셉션>에서처럼, 큰 충격을 받아서 잠을 깨면, 나는 '현실 2, 3, 4, 5…' 어딘가에서 눈을 뜨게 되는 거지요.
그리고 눈을 떴을 때의 현실은 한여름, 동생과 함께 떠난 어느 여행지이기를 바랍니다. 시원한 주스를 한 잔씩 마시면서 그 더위가 무색하게 오싹하게 만들었던 악몽에 대해 동생한테 얘기하는 거죠.
"내가 좀 전에 꿈을 꿨는데, 네가 암에 걸렸고, 그리고 결국엔 조금 고통스럽게 죽었어. 무섭지?"그러면 동생은, 말도 안 된다는 듯 코웃음을 치겠죠.
"내가 언니보다 오래 살 테니 걱정하지 마셔!"이렇게요.
동생이 우리 곁을 떠난 '현실1'에서 이 글을 쓰면서, 동생이 있는 '현실 2, 3, 4'에 가보고 싶습니다.
동생의 49재를 지냈을 무렵, 전 이런 글을 써놓았습니다.
'동생의 49재를 지낸 이후로는 동생이 더 이상 꿈에 나타나지 않는다. 나는 몰랐는데, 동생이 꿈에 나타나지 않는 게 더 좋은 거라고 엄마는 말씀하셨다. 49재 전에는 그래도 세 번쯤 꿈에 나타났던 거 같은데….' 동생을 보내고 그동안 잘해주지 못했던 일들이, 기억 속에 있는지조차 몰랐던 일들이 생생하게 떠오르면서 후회와 미련과 아쉬움과 죄책감으로 스스로를 괴롭히던 날들이었습니다. 꿈속에서도라도 동생을 만나 다시 한 번 되돌려보고 싶었던 듯도 합니다. 내 사랑을 증명해보고 싶었던 듯했습니다.
하지만 그때 엄마는 꿈에 죽은 사람이 나오는 게 좋지 않다고 했습니다. 떠나야 할 사람이 떠나지 못하고 미련을 두고 이 세상을 헤매는 것은 좋지 않은 거라고. 이 세상에 더 이상 애증도 남기지 않고 좋은 곳으로 가서 꿈에 나타나지 않는 게 좋은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일까요, 그때의 나는 동생 꿈을 꾸지 않으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말씀을 해주셨던 엄마마저 세상을 떠나고 어느 순간, 생각을 바꿨습니다. 삶에 조금 지칠 때면, 어디로 내달려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할 때면, 주기적인 우울증이 찾아와 허기가 질 때면, 나는 동생이 너무나 만나고 싶기 때문입니다. 동생은 내게 세상 그 누구보다 좋았던 친구였고, 그리하여 내가 힘들 때면 꿈속에 나타나서 내 두 손을 힘 있게 잡아줄 것 같기 때문입니다. 힘내라고 하면서 말이죠.
할머니가 된 나와 주름 가득한 동생, 만날 수 없습니다
올해도 한 살을 더 먹었습니다. 몇 년 후면 40대가 될 거고, 또 내가 모르는 사이 50대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동생은 언제나 서른하나입니다. 그게 참 속상한데, 그렇게 나만 나이가 들어가는 게 이상하기까지 합니다.
내 꿈에서 동생은 언제나 31살보다 많을 수가 없고, 꿈속에서 동생을 만날 때 나는 동생이 내 곁을 떠났던 그해, 33살보다는 많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40대의 자매로서는 꿈에서 만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흰머리가 난 할머니가 된 나와 역시나 주름살 가득한 할머니가 된 동생은 만날 수가 없습니다.
만약 중년이 된 동생이 내 꿈에 나타난다면, 나는 과연 그 동생을 알아볼 수나 있을까요. 나는 중년이 된 동생을 본 적이 없는데, 그 사람은 내 동생이라고 할 수 있는 걸까요.
영화 <오픈 유어 아이즈>를 보면, 남자 주인공은 냉동인간이 되면서 자신이 원하는 꿈을 꾸는 옵션을 선택합니다. 자신이 지우고 싶은 기억이 있는 지점보다 앞선 어느 순간에서 삶을 새로 만들어 갑니다. 과거 어느 순간으로 돌아가 새로운 삶을 사는 꿈을 꾸게 되는 거지요.
내게도 영화처럼 냉동인간이 되면서 옵션을 선택할 수 있다면, 돈을 꽤 많이 주고서라도 이 옵션을 선택해야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건 동생에게 내가 줄 수 있는 마지막 선물입니다.
나는 꿈을 꿉니다. 나는 동생이 서울로 올라오는 그 시점에서 꿈을 시작합니다. 암환자가 아닌 평범한 20대 자매로 우리는 그 아름다운 시절을 보내는 거지요. 암병동이 아닌 곳에서, 항암주사를 맞지도 않고, 머리카락이 빠지지도 않고 구역질을 하지도 않는 그런 평범한 20대를 보내는 거지요.
그리고 다른 여느 아가씨들처럼 동생도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합니다. 귀여운 조카도 생기고, 그렇게 우리는 나이가 들어갑니다. 언니와 동생, 두 살 터울로 이 세상에 나왔던 그대로, 두 살 터울의 언니와 동생으로 그렇게 계속 나이가 들어가는 겁니다. 동생의 삶이 31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동생도 33살이 되고 35살이 되고, 40이 되고, 50이 되는 겁니다. 동생도 32번째 삶을 살고, 33번째 삶을 살고, 34번째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꿈속에서 내가 꿈을 꾼다면 나는 31살을 훌쩍 지난 동생의 모습까지도 꿈꿀 수 있습니다. 꿈속에서 나는 동생에게 31살 너머의 삶을 선물해 줄 거니까요. 내가 결코 만나지 못했던 그 시간들을 동생은 아마 알뜰히 살아내고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