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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일, 전국의 수많은 초·중·고등학교에서 새내기들을 맞이하는 입학식이 열렸다. 일렬로 줄지어 선 아이들을 앞에 두고 국민의례와 교장 선생님 말씀, 담임 발표와 선배들의 축하 말로 이어지는 입학식 풍경은 너무나 익숙하다.

기대 반 두려움 반으로 새로운 학교에 첫 발을 들여놓는 의미 있는 날, 새로운 출발선 앞에선 아이들을 한껏 축하해주고 격려해주어야 하는 이날이 형식적인 의례로 딱딱하게 굳어 있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잔뜩 기대한 눈빛으로 연단을 바라보고 있는 아이들, 이 아이들에게 지루하지 않은 따뜻한 입학식을 선물해주고 싶었습니다.
▲ 무슨 일이 벌어질까? 잔뜩 기대한 눈빛으로 연단을 바라보고 있는 아이들, 이 아이들에게 지루하지 않은 따뜻한 입학식을 선물해주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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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학교는 올 3월 서울형 혁신학교로 지정받은 새내기 혁신학교다. 혁신학교 교사들은 봄방학도 포기하고 매일 같이 모여서 어떻게 말랑말랑한 입학 축하 잔치를 열어야 할지 고민했다.

늘 그렇듯이 관행과 관례는 우리 삶에 편리함과 명쾌함을 준다. 관행대로 하면 간단할 것을 뭔가 바꿔보고자 하면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고민과 논의의 대상이 된다. 아이들이 입학식 날 일렬로 서 있는 것은 어떤가? 연단 위에 어른들이 의자를 놓고 앉아 있는 것은 어떤가? 정작 그날의 주인공이 되어야 할 아이들과 담임 선생님들은 그저 얼굴 인사만 하는 것은 어떤가? 고학년 대표가 나와서 축사를 읽어주는 것은 어떤가?

다목적교실에 모여 앉았습니다. "입학을 축하합니다" 현수막은 몇 년동안 사용해온 것 그대로입니다. 좀더 따뜻한 새로운 문구로 바꾸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멀쩡한 것을 버리고 새 것을 쓰는 것보다 내용을 새롭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의견에 따라 그냥 사용했습니다.
▲ 입학을 축하합니다. 다목적교실에 모여 앉았습니다. "입학을 축하합니다" 현수막은 몇 년동안 사용해온 것 그대로입니다. 좀더 따뜻한 새로운 문구로 바꾸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멀쩡한 것을 버리고 새 것을 쓰는 것보다 내용을 새롭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의견에 따라 그냥 사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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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고민 끝에 우리 학교는 따뜻한 입학식, 말랑말랑한 입학식을 하는 것으로 방향을 잡았다. 교사와 학생, 학부모가 서로에 대한 따뜻한 마음을 느낄 수 있도록, 그래서 자칫 경직되기 쉬운 첫 만남을 말랑말랑한 일상생활을 말들로 잘 풀어 내보자는 것이다.

먼저 2학년 형님들은 '노래 선물'을 준비했다. 입학식 날이 개학하는 날이어서 그날 1시간 만에 충분히 익힐 수 있으면서도 의미 있는 노래를 찾았다. 이 노래는 대안학교인 꽃피는 학교에서 김희동 선생님이 만들어 낸 노래책 속에 있는 '우리들의 날은 아름다워'라는 노래인데, 음원이 따로 없어서 피아노 반주를 녹음해서 봄방학 동안 선생님이 먼저 연습하고 노래를 배웠다.

식이 시작하기 전부터 울려 퍼진 아이들의 노래, 2학년 학생들이 1학년 학생들을 위해 불러 준 노래 선물은 입학식 전체를 훈훈하고 따뜻하게 만들어주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1학년 담임 선생님들은 '편지'를 썼다. 아이들이 엄마의 태를 떠나 이렇게 자라서 새로운 배움길 앞에 선 것을 축하하고, 감사하고, 격려하는 마음을 담기 위해서 애를 썼다. 어렵고 힘들 때 선생님과 친구들과 잘 나누는 것이 학교생활에 중요한 일임을, 교사들 역시 어렵고 힘들 때 아이들과 잘 나누면서 갈 것을 다짐하는 내용의 편지였다. 편지를 읽어 가던 교사가 울컥할 정도로 긴장되면서도 솔직하고 진솔한 마음을 담았다.

서울유현초등학교 1학년 어린이들, 그동안 건강하게 자라주어 고맙구나. 
부모님들, 지금까지 건강하게 키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애 쓰셨습니다.
건강하게 자라 이 자리에 서 있게 되어 감사하구나.
그리고 새로운 출발선 앞에선 너희들, 모두 축하한다.
삶은 늘 낯선 배움의 길 앞으로 인도하고 우리는 늘 배우면서 자란단다.
선생님도, 너희들도. 우리 함께 즐겁게 공부하고 행복하게 지내자.
▲ 편지를 읽어주는 1학년 담임 선생님들 서울유현초등학교 1학년 어린이들, 그동안 건강하게 자라주어 고맙구나. 부모님들, 지금까지 건강하게 키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애 쓰셨습니다. 건강하게 자라 이 자리에 서 있게 되어 감사하구나. 그리고 새로운 출발선 앞에선 너희들, 모두 축하한다. 삶은 늘 낯선 배움의 길 앞으로 인도하고 우리는 늘 배우면서 자란단다. 선생님도, 너희들도. 우리 함께 즐겁게 공부하고 행복하게 지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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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 문제로 둥글게 둘러앉지는 못해 의자를 놓고 앉았지만 1학년 동생 한 줄, 2학년 형님 한 줄씩 앉아서 준비한 선물 보따리도 주고 축하의 말도 건네주고 다독여주는 모습도 아름다웠다. 2학년 학생은 처음 형님이 된 날, 형님처럼 의젓하게. 1학년 학생은 처음 초등학생이 된 날, 개구쟁이 동생처럼 그렇게 입학식을 치렀다.

2학년 형님들이 노래선물과 함께 준비한 선물 보따리, 1학년 학교 생활에 필요한 학용품들을 담았다. 열어보면서 설명해주는 형님과 듣고 있는 동생
▲ 선물을 주고 받으며 2학년 형님들이 노래선물과 함께 준비한 선물 보따리, 1학년 학교 생활에 필요한 학용품들을 담았다. 열어보면서 설명해주는 형님과 듣고 있는 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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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길을 간다는 것은 늘 모호함의 연속이다. 서울형 혁신학교의 길 역시 모호함의 연속이기에 몇몇 선배 혁신학교의 사례를 공부하며 그 모호함을 배워가는 즐거움으로, 새로운 것을 만들어가는 즐거움으로 만들어가고 있다. 이제 입학식은 작은 시작일 뿐이다.

새로운 배움의 길 앞에 선 모두에게.

2005년 어느 날, 익숙했던 엄마의 심장 소리와 양수와 태를 떠나 좁고도 긴 산도를 따라 세상을 향해 얼굴을 내밀었던 작디작은 생명들아, 탯줄을 끊어내고 낯선 세상과 호흡하며 그렇게 봄, 여름, 가을, 겨울 예닐곱 해를 보내고 이렇게 이 자리에 함께하고 있구나.

엄마 젖을 빨며, 눈을 마주치고 웃기도 하고, 그 작은 입으로 하품하며 눈을 꿈쩍이고 옹알이를 시작하고, 몸을 뒤집고, 기어 다니더니 드디어 홀로 서서 한 발짝 내디뎠을 때 모두들 기뻐하던 그 순간이 꿈결같이 그려진다.

그렇게 이제 여기 이 자리까지 오게 되었어. 서울유현초등학교 1학년 신입생으로 말이야. 익숙했던 집, 어린이집, 유치원을 지나 새로운 친구들, 선생님, 형님들과 처음 마주하는 이 자리, 낯선 만큼 두렵고, 새로운 만큼 기대가 가득한 얼굴과 눈빛으로 살아 있는 너희들을 보니 선생님도 앞으로 펼쳐질 새로운 만남과 사건 앞에서 기쁘고 기대가 된단다.

모든 일이 다 새롭고 신기하겠지만, 한 달쯤 지나면 몸살을 앓기도 하고 무엇 때문에 공연히 마음이 쓰이고 학교가 재미없어지기도 할 거야. 늘 모든 것이 다 좋을 수는 없지만 지금 이 순간을 즐겁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무엇이 힘든지, 어려운지 잘 생각하고 그 생각을 선생님과 친구들과
정직하게 잘 나누는 것이 필요하단다.

그건 선생님들도 마찬가지야. 선생님들도 마음이 힘들고 어려울 때 너희들에게 '이러이러해서 선생님이 지금 힘들고 어렵단다, 너희들이 함께 도와주면 좋겠구나' 하고 솔직하게 이야기를 나눌거야. 마음을 다해 이야기할 때, 서로 마음을 다해 어려움을 풀어가려고 할 때 아름다운 길이 우리 앞에 펼쳐질 거라고 선생님은 믿는단다.

서울유현초등학교 1학년 어린이들, 그동안 건강하게 자라주어 고맙구나. 건강하게 자라 이 자리에 서 있게 되어 감사하구나. 부모님들, 지금까지 건강하게 키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애 쓰셨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출발선 앞에선 너희들, 모두 축하한다. 삶은 늘 낯선 배움의 길 앞으로 인도하고 우리는 늘 배우면서 자란단다. 선생님도, 너희들도. 우리 함께 즐겁게 공부하고 행복하게 지내자.

2012년 3월 2일 서울유현초등학교 1학년 선생님들이.


태그:#입학식, #서울형혁신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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