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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터치 오브 스파이스>를 보면 주인공인 파니스(조지 코라페이스 분)는 사이프러스 분쟁으로 이스탄불에서 그리스로 쫓겨나게 됩니다. 하지만 파나스는 어린 시절을 추억하며 그리스에서 이스탄불 음식을 만듭니다. 

이런 음식을 컴포트 푸드(Comfort food)라고 부릅니다. 단순히 음식으로서 존재를 뛰어넘어 그 음식을 먹음으로써 유년기의 기억이나 가족을 상기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것은 명절음식이 돼 뭔가를 기념하는 수단으로도 사용됩니다.

한국인의 자존심이 돼 버린 김치

톡 쏘는 맛이 일품인 돌산갓김치. 돌산도 특산품이다.
 톡 쏘는 맛이 일품인 돌산갓김치. 돌산도 특산품이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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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 한국인은 역시 김치. 과학적으로 우수한 이 음식. 일본의 '기무치'는 절대 용납할 수 없는 한국인의 자존심입니다. 서양인과의 대결에서 그들이 치즈맨이면 우리는 김치맨이 됩니다. 김치는 한국인의 자부심입니다.

저는 본가가 전라남도 해남입니다. 그래서 어릴 적부터 해산물을 많이 먹었습니다. 맵고 짠 음식들이 주된 반찬이었지요. 그리고 제 어머니의 자랑 중 하나는 아들이 김치를 잘 먹는 것이었습니다. 이미 전라도 음식으로 단련된 제 입맛은 어떤 음식을 먹어도 매움을 못 느낄 정도였습니다. 김치를 먹는 것이 한국인임을 증명하는 것일까요? 지금 생각해보니 왜 김치를 잘 먹는 것이 자랑인지는 모르겠으나 당시 저는 남들이 못 먹는 것을, 즉 남들이 못하는 것을 해내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렸다는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저는 매운 것을 '심각하게' 잘 먹습니다. 집에서 끓이는 국은 청량고추가 들어가지 않으면 먹질 않고, 밖에 나가면 무조건 맵게 해달라고 합니다. 맵다고 소문난 음식점을 일부러 찾아가 먹을 정도입니다.

어느 날, 어떤 음식점에서 가장 높은 단계 매운 맛을 먹고 나온 후 제가 한심하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배가 부른데 맛있게 먹었다는 느낌은 들지 않고, 물배만 가득 차 헉헉 거리고 있었습니다. 제가 돈을 지불하고 얻은 것은 음식을 먹었다는 포만감보단 '내가 이 집에서 가장 매운 음식을 먹고 나왔다'는 허영 가득한 자부심이었습니다.  

사실 우리 주변엔 매운 것을 못 먹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한국인은 김치의 민족이라는 자부심 덕분인지 매운 음식을 먹는 것을 능력으로 인식합니다. 마치 '네가 한국인임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김치를 먹어야 한다' 같은 소명일까요?

며칠 전, 제가 한 기사에 댓글을 달았습니다. 그 아래에 이런 댓댓글이 달리더군요.

"내가 음식점에서 김치를 먹었는데 사래가 들렸다. 그래서 콜록콜록 거리는데 옆에 앉던 할아버지가 젊은 사람이 김치도 못 먹는다고 혼내는 거야. 내가 정말 억울해서…."

"팀원들끼리 회식에 갔는데요. 김치전골을 먹으러 갔어요. 그런데 제가 매운 것을 잘 못 먹어요. 그래서 잘 못 먹는다고 했더니, 팀원들은 '너 그것도 못 먹느냐'고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고, 팀장님은 '남자가 매운 것도 못 먹는다'고 핀잔을 주시더라고요. 그 후로 회식이 있으면 사람들이 저한테 물어봐요. '이건 먹을 수 있어?' '맵긴 해도 먹을 수 있지?' '매워도 좀 참아봐' 이런 식으로 물어보는데 솔직히 불편해요."

"친구와 밥을 먹는데 제육볶음을 시켰거든요. 그런데 너무 매워서 반도 못 먹었어요. 그랬더니 친구가 '한국 사람이면서 그런 것도 못 먹느냐'고 그랬어요. 저희 부모님도 그러셨고요. 그게 정말 이상한건가요?"

그런데 거기엔 이런 의견들도 덧붙여 지더군요.

"한국인이 우수한 것은 매운 음식을 즐기기 때문입니다. 마늘, 고추, 대파, 양파, 생강같이 매운 음식을 아주 오래전부터 먹었습니다. 그래서 매운 음식이 아니면 음식을 먹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점점 매운 음식을 찾게 되는 한국인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게 됩니다."

"매운 음식을 안 좋아하면 외국인의 피가 섞여 흐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저는 매운 음식을 좋아하는데요. 입술부터 아련하게 전해져오는 통증과 매운 음식을 먹으면 나도 용기가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그리고 다른 사람보다 더 매운 것을 잘 먹어서 다른 사람들 놀려주는 것도 재미있고요. 진짜 매운 걸 못 먹는 애들과 같이 먹을 때 걔네들 반응 보면 웃겨 죽겠습니다. 그리고 매운 음식을 먹으면 스트레스가 풀려요."

매운 음식 먹을 때,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

매운음식이 능력으로 비유된다.
▲ 짬뽕 빨리먹기 대회 매운음식이 능력으로 비유된다.
ⓒ 인터넷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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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사례를 넘어 우리 주변에는 '매운 음식 마케팅'이 존재합니다. '한국인의 매운맛'이라는 캐치프레이즈처럼 한국 - 김치 - 매운 맛으로 이어지는 연결 관계는 우리 민족성을 자극하기 충분합니다. 마치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가 주장했던 '한의 정서'처럼, '한국인의 매운맛'은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패러다임이 됩니다.

그리고 어떤 경우는 음식의 완성도, 맛보다는 '매운맛'이 더 중요하게 됩니다. 매운 짬뽕, 매운 라면, 매운 카레, 매운 돈가스 매운 갈비찜, 매운 떡볶이. 심지어는 경고 문구가 광고로 사용됩니다. '핵짬뽕' '지존 매운맛' '신의 단계는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 '죽음의 매운 맛' 등등.

그리고 소비자들은 매운 음식을 먹으러 가는 것이 아니라 도전하러 갑니다. 매운 음식과 함께 나오는 연관 검색어가 '도전'입니다. 음식 리뷰는 히말라야 산맥을 등산하는 등산가처럼 자신이 매운 음식을 국물까지 마시는 모습을 사진으로 담습니다. 그리고 서로 누가 더 매운 음식을 먹었는지 아니, 정복했는지 자랑하기 시작합니다. 

개인의 기호가 소수자를 양산하고 있다

자극적인 표현으로 도전하게 만든다.
▲ 카레 단계 자극적인 표현으로 도전하게 만든다.
ⓒ 버미군의 맛있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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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매운맛은 '안 먹는다'라는 표현보다 '못 먹는다'라는 표현이 더 적합합니다. 다른 맛과는 다르게 매운맛은 통감이니까요.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 사회가 이렇게까지 매운맛에 목 매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단맛, 짠맛, 쓴맛, 신맛을 아무리 비교 해봐도 매운맛에 비할 수 없습니다.

저는 이글을 통해서 '위대한' 매운맛에 감히 도전할 생각이 없습니다. 또한 한국인의 자부심인 김치를 욕할 생각도 없습니다. 매운맛이 다이어트 효과가 있고, 스트레스를 해소시키는 효능이 있다는 것에 관심도 없을 뿐더러, 매운 것을 많이 먹으면 위에 안 좋다는 과학적 담론이 있어도 저는 매운 음식을 먹을 겁니다. 다만 매운맛은 어디까지나 맛인데 우리 사회가 그것을 능력으로 보고 있는 건 아닌지 한번쯤 생각해보자는 것입니다.

술처럼 매운맛을 강권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회 전반적으로 매운맛을 생산해내는 풍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것을 수용해야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상대가 매운 음식을 못 먹고 당황해하는 모습을 보고 가볍게 농을 던지지만, 알게 모르게 그것도 돌을 던지는 것이 아닐까요?

어쩌면 단순한 개인의 기호가 부지불식간에 소수자를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봅니다. 그동안 매운 걸 먹지 못 한다고 놀렸던 제 친구들에게 미안함을 전합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개인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매운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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