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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형왕릉 묘역 전경. 오른쪽의 집이 '호릉각'이다.
 구형왕릉 묘역 전경. 오른쪽의 집이 '호릉각'이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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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형왕릉을 찾아간 답사자는 그 입구에서 김유신이 활쏘기 연습을 했다는 '사대비'부터 보게 된다. 주차장 바로 오른쪽에 세워져 있는 그 비석에는 '新羅太大角干純忠壯烈 興武王金庾信射臺碑'라는 글자가 두 줄로 구분되어 새겨져 있다. '신라 태대각간 순충 장열 흥무왕 김유신 사대비'는 김유신이 이곳에서 활쏘기 연습을 했다는 뜻이다.

김유신은 언제 이곳에서 활쏘기 연습을 했을까? 이 궁금증은 구형왕릉에 가보면 저절로 풀린다. 왕릉 경내로 들어가면 문무인석(文武人石), 석수(石獸), 상석(床石) 등등보다도 더 앞에 서 있는 작은 빗돌 하나를 보게 된다. 왕릉 앞에 세워진 비석 치고는 크기가 아주 작아서 현장을 둘러본 사람 중에서도 '못 보았다'고 말하기 일쑤인데, '興武王侍陵祀宇地遺址'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흥무왕(興武王) 김유신이 능(陵)을 지킬(侍) 때 제사(祀)를 지낸 집(宇)이 있었던(遺) 자리(址)라는 뜻이다.

김유신은 화랑 때 구형왕릉에 와서 7년간 묘를 지켰다고 한다. 그렇다고 그 7년을 왕릉 앞에 엎드린 채로만 있지는 않았을 터, '신라 태대각간 순충 장열 흥무왕 김유신 사대비'는 그가 말도 달리고 산도 오르내리고 할 때에 지금 이 자리에서 활쏘기 연습을 했다는 표식이다.

 김유신이 활쏘기 연습을 한 장소라는 것을 기려 세워진 비석
 김유신이 활쏘기 연습을 한 장소라는 것을 기려 세워진 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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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 7년간 증조부 구형왕릉 지켰다

숲길을 걸으며 잠깐 20살 안팎 나이의 김유신이 활을 쏘는 장면을 상상하고 있는데 금세 구형왕릉이 바로 앞에 보이는 곳까지 왔다. 이곳도 주차장이다. 평일인데도 자가용 두 대가 낮잠을 자고 있다. 이런 숲속에 자동차라니… 싶지만, 그래도 기분은 '반갑다' 쪽이다. 구형왕릉을 찾아오는 이들이 제법 있는 모양이구나. 그렇지만 숲길 입구의 대형 주차장에서부터는 걸어왔으면 더 좋았을 텐데… 혼잣말로 중얼거려 본다.

자동차의 지붕 위로 홍살문이 보인다. 어, 저기! 얼핏 정면을 응시한 것뿐인데도 구형왕릉은 홍살문 사이로 강렬하게 존재를 드러내준다. 왕릉 자체가 너무나도 특이한 모양을 하고 있는데다, 사진으로 많이 보아 저절로 눈에 익은 탓이기도 하다.

그러나 바로 홍살문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주차장에서 오른쪽으로 다리를 건넌다. '閣陵護' 현판이 걸린 작은 기와집으로 가려는 것이다. 호릉각? 왕릉(陵)을 지키는(護) 집(閣)이라는 뜻이다. 왕릉을 돌보는 관리나 묘지기가 머물렀던 집이다.

閣陵護? 護陵閣? 각릉호? 호릉각?

호릉각 기둥에 단정한 서체의 붓글씨가 붙어 있다. '靜肅'. 요즘 세상에는 이 두 글자를 읽지 못하는 사람이 더 많지 않을까. 역시 한글이 좋다. '우리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서 서로 통하지 않으므로……' 훈민정음 어지가 생각난다.

호릉각 마루에 '정숙'하게 앉아 구형왕릉 쪽으로 바라본다. 담장 사이에 달린 작은 샛문은 활짝 열려 있지만 오후의 햇살로 가득 차 눈이 부신다. 왕릉 앞의 비석이며 문인석 등에 튕겨나온 햇살이 가로세로로 눈앞을 어지럽힌다. 불과 10m 정도밖에 안 되는 거리이지만 왕릉은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호릉각 협문으로 햇살과 함께 들어온 구형왕릉의 모습
 호릉각 협문으로 햇살과 함께 들어온 구형왕릉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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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문을 지나 '興武王侍陵祀宇地遺址' 빗돌을 바라보며 걸어간다. 구형왕릉이다! 그래, 구형왕릉이야!

흔히들 '신비의 왕국'이라 말하는 가야의 마지막 임금이라는 것, 김유신의 증조할아버지라는 것에 힘입어 건국 시조인 수로왕 다음으로 유명세를 얻은 구형왕릉과 만났다는 흥분이 짜릿하게 온몸을 타고 흐른다. 무엇보다도,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무덤 중에서는 정말 특이한 모양을 하고 있다는 점 때문에 답사자들은 구형왕릉 앞에서 '낯선 즐거움'을 맛본다.   

1971년 2월 9일에 국가사적으로 지정을 받은 구형왕릉, 이곳 현장을 찾아오기 이전에 관련 자료들을 찾아서 읽어보았고, 사진도 눈에 담았다. 이제 실물을 감상할 차례가 되었다. 잠깐 숨을 고르면서, 산청군청 홈페이지에 소개되어 있는 구형왕릉 안내문을 다시 한번 읽어본다.

국내 유일의 돌로 쌓은 왕릉

'국내 유일의 돌로 쌓은 왕릉, 구형왕릉, 이 능은 가야 10대 임금인 구형왕의 무덤으로 전해지고 있는 돌무덤이다. 구형왕은 구해 또는 양왕이라 하는데 김유신의 증조부이다. 521년 가야의 왕이 되어 532년 신라 법흥왕에게 영토를 넘겨줄 때까지 11년간 왕으로 있었다.

이 무덤을 둘러싸고 석탑이라는 설과 왕릉이라는 두 가지 설이 있었다. 이것을 탑으로 보는 이유는 이와 비슷한 것이 안동과 의성 지방에 분포하고 있는 데 근거를 두고 있다. 왕릉으로 보는 근거는 <동국여지승람> 산음현 산천조에 '현의 40리 산중에 돌로 쌓은 구릉이 있는데 4면에 모두 층급이 있고 세속에는 왕릉이라 전한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이 무덤에 왕명을 붙인 기록은 조선 시대 문인인 홍의영(1750∼1815)의 <왕산심릉기>에 처음 보인다. <왕산심릉기>는 무덤의 서쪽에 왕산사라는 절이 있는데, 이 절에 전해오는 '왕산사기(王山寺記)'에 구형왕릉이라 기록되어 있다고 밝히고 있다.

이 무덤은 일반무덤과는 달리 경사진 언덕의 중간에 총높이 7.15m의 기단식 석단을 이루고 있다. 앞에서 보면 7단이고 뒷면은 비탈진 경사를 그대로 이용하여 만들었기 때문에 평지의 피라미드식 층단을 만든 것과는 차이가 있다. 무덤의 정상은 타원형을 이루고 있다. 돌무덤의 중앙에는 '가락국양왕릉'이라고 쓰인 비석이 있고 그 앞에 석물들이 있는데 이것은 최근에 세운 시설물이다.

조선 정조 17년에는 왕산사에서 전해오던 나무상자에서 발견된 구형왕과 왕비의 초상화, 옷, 활 등을 보존하기 위해 '덕양전'이라는 전각을 짓고 오늘날까지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국내 유일의 돌무덤이라는 것만으로도 한 번 가볼 만한 곳으로 적극 추천한다.

 구형왕릉
 구형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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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은 엇비슷하지만, 구형왕릉 입구에 세워져 있는 안내판의 내용도 다시 한 번 상기해본다. 조선시대 문장가 유한준(兪漢雋 : 1732∼1811)이 남긴 명언을 알지 못한다면 모르되, 알고서야 어찌 역사유적이나 문화재에 대한 '공부'를 게을리할 것인가.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이전의 것과 같지 않으리라.'

산청 전 구형왕릉(山淸傳仇衡王陵)
사적 제 214호

가락국(駕洛國, 金冠伽倻) 10대 구형왕릉으로 전해지는 특이한 석조물(石造物)이다. 동쪽으로 내려오는 경사면에 피라밋 모양으로 자연석을 쌓아 올렸다.

위로 올라갈수록 면적을 줄여가며 모나게 일곱 단을 쌓아 올렸는데, 전체 높이는 7.1m이다. 각 단 앞부분의 양쪽에는 모서리가 분명하지만, 뒤쪽은 경사면에 붙여 돌을 쌓아 모서리가 없다. 네 번째 계단에는 가로 40cm, 세로 40cm, 깊이 68cm의 감실(龕室)과 같은 것이 설치되어 있다. 감실은 신주(神主)를 모시거나 등잔을 두기 위해 만들어지지만, 여기에서의 용도는 알 수 없다.

앞에는 가락국양왕릉(駕洛國讓王陵)이라 새긴 비석이 있고, 돌담으로 주위를 둘렀다. 문무인석(文武人石), 석수(石獸), 상석(床石), 장명등(長明燈) 등도 배치되어 있으나 근래에 만들어진 것이다.

전구형왕릉이라는 명칭은, 확증은 없고 그렇게 불려진다는 뜻으로 붙여졌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아래쪽에 있는 암자 부근에 왕산사(王山寺)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지역의 전승에는 약 200년 전에 왕산사에서 활, 칼 등과 함께 왕릉에 대한 기록도 나왔다고 전해지고 있다.

산을 다 내려간 입구에는 구형왕과 왕비의 영정을 모시는 덕양전(德讓殿)이 있다. 덕양전 경내에는 홍살문, 영정각, 안향각, 정숙당, 추모재 등의 건축물과 연못이 있으며, 해마다 음력 3월 16일과 9월 16일에 제향(祭享)이 올려지고 있다.

 구형왕릉 전경
 구형왕릉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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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형왕릉' 아닌 '전구형왕릉'이라고 말하는 까닭

그냥 '구형왕릉'이라고 하지 않고 '전구형왕릉'이라고 하는 까닭이 궁금하다. 전(傳)이 이름 앞에 붙은 것은 '그렇게 전해진다'는 뜻이다. 왕산의 돌무덤이 꼭 구형왕릉임에 틀림이 없는지는 확인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전'은, 무덤 안에서 사실을 입증해줄 유물이 발굴되었거나 신뢰성이 충분한 옛날 기록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고, 오랜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이 사람들 사이에는 왕산의 돌무덤이 금관가야국의 구형왕릉이라는 말이 줄곧 이어져 왔고, 또 그렇게 믿어 왔다는 것을 한 글자로 압축하여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 무덤에 구형왕릉이라는 이름이 붙은 내력을 소개하고 있는 산청군청 홈페이지의 안내문을 읽어본다.

정조 22년(1798) 산청군 좌수 민경원(閔境元)이 구형왕릉에 와서 기우제를 지내고 돌아가는 길에 왕산 기슭의 왕대암(王臺庵)에 들러 잠시 쉬었는데 시렁 위에 얹힌 궤에 먼지가 수북 쌓인 것을 보고는 중에게 그 까닭을 물었다. 중이 대답하기를 누구든지 궤에 손을 대면 큰 벌을 받는다고 전해져 와 그대로 두고 있다고 하였다. 그 말을 듣고 민경원이 더욱 호기심이 나서 궤를 열어보려고 하니 중이 극구 만류하였다. 그래도 민경원은 끝내 그 궤를 열었다. 그랬더니 궤 안에는 조금 전에 기우제를 지낸 곳이 구형왕릉이라는 기록과 영정, 갑옷, 칼 들이 들어 있었다. 민경원은 그 사실을 김해김씨 문중에 알렸고, 그 이후 문중에서는 그것들을 보관하고 있다.

구형왕릉이라는 생각 없이 그냥 이 돌무덤에 와서 기우제를 지냈다는 대목이 눈길을 끈다. 이는, 조선 시대까지도 구형왕릉이 일반백성들은 물론 관리들까지 찾아와 종교 행사를 여는 성지였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게다가 네 번째 계단에는 가로 40cm, 세로 40cm, 깊이 68cm 크기의 감실처럼 보이는 장치도 있다. 본래 불교에서 탑은 예배를 드리는 장소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돌무덤을 당시 사람들은 석탑으로 여겼던 것이다.

 경북 의성의 돌을 쌓아 만든 석탑. 구형왕릉과 일견 흡사한 모습을 하고 있다.
 경북 의성의 돌을 쌓아 만든 석탑. 구형왕릉과 일견 흡사한 모습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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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돌무덤을 석탑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비슷한 사례로 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 석탑리의 '방단형 적석탑(方壇形積石塔)'을 들기도 한다. 방단형적석탑이라는 이름은 납작납작하게 다듬은 돌을 평평하게 깔아 네모(方)난 마루(壇) 모양(形)의 1층을 만들고, 그 위에 다시 같은 방식으로 (1층보다는 면적이 조금 좁은) 2층을 쌓고, 또 3층을 올리고… 그렇게 돌(石)을 쌓아(積) 탑(塔)을 만들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모양은 특이하지만 감실이 있다는 점에서는 다른 탑들과 마찬가지다. 구형왕릉과 의성의 방단형 적석탑이 돌들을 마루처럼 깔아 각 층을 만들었고, 감실을 갖추었으며, 민중들의 기도처였다는 점에서 같으니 둘 다 탑이라는 견해이다.

경북 의성군 방단형 적석탑과  닮았는데

<삼국유사>에는 금관가야의 멸망에 대해 '(신라가)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오니 (구형)왕은 친히 군사를 지휘했다(王使親軍卒). 그러나 적병의 수는 많고 이쪽은 적어서(彼衆我寡) 대전을 할 수가 없었다(不敢對戰也).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신라에 항복했다(降于新羅)'고 기록하고 있다. 그래도 처음에는 직접 참전하여 신라군과 싸웠던 모양인데, 군사의 수가 적어 상대가 되지 않는 바람에 항복을 했다는 설명이다. 그렇다면 5천 군사를 가지고 5만의 신라군과 싸운 계백은 무엇인가? 구형왕은 왜 끝까지 싸우지 않고 순순히 항복하였을까? 남아 있는 기록은 없지만 아마도 신라의 경순왕처럼 '(전쟁을 하여) 무고한 백성들이 참혹하게 죽도록 하는 것은, 나로서는 차마 할 수 없는 일이다' 같은 애민(愛民?) 정신을 발휘한 것일까?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금관가야의 구형왕은 물론 고구려의 보장왕, 백제의 의자왕, 신라의 경순왕, 고려의 공양왕, 조선의 순종 등 그 어느 마지막 임금도 싸우다가 죽지 못하고 한결같이 항복하여 당장의 목숨을 보전한 우리의 역사를 보는 마음은 어쩐지 불편하다. 후세 사람들이 그렇게 느낄 것을 예상하였을까, 구형왕은 자신의 무덤을 돌더미로 쌓도록 했다. 망국의 왕이 어찌 그럴 듯한 봉분을 할 수 있겠느냐면서 아무렇게나 돌을 던져 자신의 주검을 덮으라고 유언하였다고 한다.

나라를 잃고 왕산에 들어와 5년을 살다간 구형왕, 그의 유언은 아마도 '나에게 돌을 던져라' 하는 뜻이었던 듯하다. 살아 마지막 말이 그처럼 처연하였던 것으로 미루어, 구형왕은 생애 최후의 5년을 너무나도 고통스럽게 살았던 것 같다. 지금도 여전히 돌 아래에 깔려 누워있는 왕을 보며, 이제는 왕릉 앞의 비석에 새겨진 '駕洛國讓王陵' 여섯 글자를 '가락국 구해왕릉' 일곱 자로 바꿔드려야 옳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그가 비록 신라와 싸우다가 죽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백성들의 생명을 걱정하여 항복한 마음만은 진실이었을 터, '양왕'이라는 시호(諡號)는 너무나 지나친 신라 중심의 표현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 2012년 2월 중순에 현지를 답사했습니다.



#구형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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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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