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로 공포의 아침이다. 해가 중천에 떴건만 무서워서 아직 집을 못 나서고 있다. 왠지 경비아저씨가 무엇인가 많은 것(?)을 알고 계실 것 같다. 갈비뼈 부분이 아파서 살펴보니 피멍이 들어있다. 종아리도 시큰하여 살펴보니 여기도 넓고 얇은 찰과상이 보인다. 2차 술자리까지는 기억 나는데, 그 이후 3차와 4차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품 안에는 딱 체온 수준으로 데워진 콜라캔이 안겨져 있다. 본능적으로 지갑과 휴대전화를 찾아 헤매니, 이것들이 언제부터 발이 생겼는지 냉동실에 들어가 있다. 휴대전화 폴더를 열어보니 부재중 수신전화가 수십 통에, 내가 직접 건 것으로 추정되는 발신 통화가 수십 통이다.
토끼눈을 뜨고 놀란 맘을 품안에 들어있던 따뜻한(?) 캔 콜라로 달래다가 남은 콜라를 냉장고에 넣으려니, 거기엔 몇 리터인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정체모를 액체가 흘려져 있다. 이윽고 화장실 냄새가 난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 물 한잔을 더 떠다가 소파에 앉으려니 이번에는 "뿌직"하며, 안경이 깨지고 만다.
지난밤 무슨 일이?...'하늘도 무심하시지'지난밤에 과연 무슨 일이? 도저히 추리가 되지 않는다. 혹시나 해서 주머니를 뒤져보니 구겨진 감열지가 나온다. 그것은 바로 5만 원이란 돈이 나온 택시비 영수증이다. 후덜덜, 이럴 때 일수록 '침착=생명'이란 것은 알지만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다. 꿈이었으면 좋으련만 하늘도 무심하시지,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한 이 상황들은 가상이 아닌 엄연한 현실이었다.
하지만 여기까지는 일도 아니다. 무슨 실수를 저질렀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괴로움만 뺀다면 이 정도는 사실 약과다. 그런데, 다시 한 번 주머니를 확인하는 것이 두려워지는 것은 왜일까? 떨리는 마음으로 지갑을 열어 확인해보니 꼬깃꼬깃 구겨진 신용카드 영수증이 나오기 시작한다.
'OO클럽 OO카드 86만원' 아, 호환마마 전쟁보다 무서운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의 시작이다. 여자 친구와 헤어진 지 한 달쯤 지나 괴로움에 술 마시고 필름 끊기고서 다음날 아침에 시끄러워서 실눈을 떠보니 헤어진 여친이 머리 감고 밥하고 있는 장면보다 더 무서운 그 사실은 바로, 어젯밤 술값을 내가 쐈다는 것이다.
'전날 동석했던 이들에게 전화해볼까?'
하지만 신뢰하지 못할 만한 정보원에게 상황을 물어보자니 차라리 안 듣는 게 오히려 속이 더 편할 것 같다. 기억을 복원할 때, 전날 함께 있었던 사람들에게 물어봤자 없는 일을 지어내는 경우가 더 많았지 않았나.
그러니까 벌써 15년 전의 일이다. 나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술을 먹는 사람이라면 그로 인한 여러 가지 에피소드가 있을 것이다. 나도 술에 관한 이야기를 하자면 내 인생만큼이나 파란만장하다. '부어라 마셔라'를 외치다 이튿날 기억상실에 몸부림치던 처절한 나의 '끊어진 필름'의 악몽은 일상다반사였다.
살면서 겪어온 수많은 사람들 중에 술 좋아하는 사람 치고 필름 끊겨보지 않은 경우 못 봤다. 술 좋아하는 당신, 가슴에 손을 얹고 한 번 생각해보라. 필름 끊긴 다음날 '어젯밤 술자리, 내가 쐈다'는 사실이 가장 두렵지는 않았었나? 어디 그뿐인가. '울고불고 진상주사' '헤어진 애인에게 폭풍문자질' '선배나 상사에게 막말작렬' 했던 진상 행동도 심심찮게 들려온다(나 같은 경우는 이 모든 것을 한 번에 다 행한 적도 있다).
우리가 흔히 '필름이 끊어졌다'고 말하는 현상은 '블랙아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런 현상은 왜 일어나는 것일까? 지나치게 많이 섭취된 알코올성분에 의해 중추신경이 마비되고 자율신경계의 통제아래 몸을 내맡기기 때문에 두뇌의 기억 활동이 일시적으로 정지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주정이 심한 사람일수록 자주 일어난다. 필름이 끊길 때 뇌의 다른 부분은 활동을 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은 필름이 끊겼는지를 잘 알지 못한다. 그리고 뇌의 정보를 꺼내고 활용하는 것에는 문제가 없기 때문에 무의식중에 집에도 찾아갈 수도 있는 것이다.
필름 끊기는 데도 단계가 있다... 3단계부터 '매우 위험'술 먹고 필름 끊기는 것도 단계가 있다.
[1단계] 지난밤 내가 한 말이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드문드문 기억이 없기 때문에 큰 실수는 없다. 하지만 이 상황도 반복되면 여자친구가 2명이 될 수도 있다. [2단계] 내가 무슨 행동을 했는지 잘 모른다.→ 주위 의견을 종합(일종의 '조각모음')해보면 상황이 연결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조각모음을 해도 기억이 안 나는 현상이 늘어나기 시작한다. 했던 말 또 하고, 방금 밥 먹고 일어나 나 밥 안 줬다며 "나쁜 것들이 나 굶기네!"하고 울고불고···.[3단계] 눈을 뜨니 집이다.→ 역시 귀소본능은 강하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라면 휴대전화나 지갑이 없어졌을 수도 있다.[4단계] 눈을 떠보니 내가 늘 보던 천장이 아니다.→ 그냥 딴 생각 없다. 매우 위험한 신호다. 그나마, 천장이라도 있다면 천만다행이다. 깨어난 후 옆집이 아니길 바랄뿐이다.
과음으로 인한 건강문제뿐만 아니라 사회적 위험도 매우 크다는데 토를 달 사람은 아마 없으리라. 다만 애써 모른 척 할 뿐이다. 결국 필름은 자주 끊어지는 3단계부터는 매우 위험한 신호이다.
히포크라테스는 이미 2700여년 전, "술은 음료로써 가장 가치가 있고, 약으로써 가장 맛있으며 음식 중에서 가장 즐겁게 해 주는 것"이라고 했다. 그만큼 술은 잘만 마시면 우리의 삶도 여유롭게 해주고 건강에도 도움을 준다. 하지만 절제가 안 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몸과 마음을 망가뜨리는 독약으로 바뀌기 시작하는 것이다.
세상에는 술 말고도 즐길 거리가 무궁무진하다. 굳이 술에 '올인'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우리 삶의 기쁜 순간이나 힘든 순간이나 묵묵히 함께 해주는 술…. 술을 언제까지나 '오래두고 가까이 사귀는 벗'으로 곁에 두고 싶다면, 술에 지배당하지 말고 술을 잘 다스리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