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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10일 양일간 나는 전북 군산시 옥도면의 무녀도(巫女島)와 선유도(仙遊島)에 다녀왔다. 무녀도염전에서 일하는 친구인 지승호를 만나 몸에 좋은 천일염도 사고, 섬을 둘러보기 위해 1박 2일 여행을 떠난 것이다.

작은 염전이다
▲ 무녀도 염전 작은 염전이다
ⓒ 김수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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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일 아침 7시 20분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서 출발한 차는 10시를 조금 넘겨 군산에 도착했다. 다시 택시를 타고 10분 정도 가니 군산외항이 나왔다. 이곳에서는 군산 앞바다에 있는 여러 섬과 중국으로 가는 배가 출항한다고 한다.

10시 30분 배를 타고 무녀도로 향했다. 무녀도까지는 1시간 30분 정도 걸린다고 하여 선착장 주변과 가는 뱃길을 일부 촬영하고는 바로 1층 선실에 누워 잠을 청했다. 온돌방을 연상하게 만든 선실은 뜨거워서, 찜질방 같은 편안함을 주기는 했지만, 등 전체로 전해오는 파도를 맞으니 멀미가 몰려왔다.

군산시 옥도면의 무녀도염전
▲ 무녀도 염전 군산시 옥도면의 무녀도염전
ⓒ 김수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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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시간 넘게 잠을 자고 일어나니 정오가 지나 있었고, 배는 선유도에 닿았다. 난 무녀도까지는 조금 더 간다는 말을 들은 터라 잠시 더 누워있었다. 그런데 배가 움직일 무렵 승호에게서 전화가 왔다.

"너 배 안 탔니, 왜 안내려?"
"아니 탔는데, 아직 선유도잖아? 무녀도는 조금 더 가는 것 아니야?"
"무슨 소리야? 선유도에서 30초만 가면 무녀도야. 빨리 내려 선유도 선착장에."
"알겠어. 그런데 선유도에 내리면 무녀도까지는 어떻게 가?"
"내가 오토바이 타고 갈게."
"어? 응."

습지로 변했다. 인부도 없고 소금도 수입이 많이 되어
▲ 갈대밭이 된 폐 염전 습지로 변했다. 인부도 없고 소금도 수입이 많이 되어
ⓒ 김수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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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수 없는 대화가 오갔다. 선유도 바로 옆이 무녀도이고, 오토바이를 타고 온다... 선유도 선착장에 내려서 보니 무녀도가 바로 앞에 보이고, 중간에 다리가 있어 걸어 다닐 수 있게 되어있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 했다. 수영도 못하는 내가 무녀도까지 건너 갈 수도 없고.     

아무튼 승호의 오토바이에 동승하여 무녀도로 들어갔다. 서울에서 오는 길에 친구에게 무녀도에 간다고 하니 "여자가 없는 섬에 가냐"며 "재미없겠다"고 농을 한다. 난 그저 웃으며 "그냥 친구 만나고 염전 구경하고 소금 사러 간다"고 했다.

30KG 소금을 5포 샀다
▲ 무녀도의 소금 30KG 소금을 5포 샀다
ⓒ 김수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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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은 섬에는 고려 말부터 촌락이 형성됐다고 한다. 장구모양의 섬과 그 옆에 술잔처럼 생긴 섬 하나가 붙어 있어 무당이 상을 차려놓고 춤추는 모양이라고 하여 무녀도라 불리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다른 한편에는 무당은 춤을 추기보다는 굿을 하는 사람으로 일제가 1914년 행정구역통합과 개칭을 하면서 춤추는 무희를 닮은 섬(舞如)의 모양을 비하하기 위해, 무희의 무(舞)를 무당의 무(巫)로 고쳐 억지로 사용하게 했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아무튼 무녀도는 1구, 2구 마을을 합하여 100호 정도 되는 가구에 200명 내외의 인구가 살고 있는 작은 섬으로, 군산시에서 서남쪽으로 50.8㎞ 떨어진 해상에 위치하며 선유도, 신시도, 장자도 등과 함께 고군산군도를 이루고 있다.

도자기 타일이다
▲ 깡파리판 도자기 타일이다
ⓒ 김수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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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이름은 '서들이'였다고 하는데, 이는 바쁜 일손을 놀려 서둘지 않으면 생활하기 어렵다는 의미로 부지런히 서둘러야 살 수 있다는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의 무녀도 사람들은 바다 일이 많은 이곳을 두고 굶어 죽으려고 해도 부지런히 서둘면 누구나 잘살 수 있는 복 받은 땅이라고 한다.  

난 승호와 오토바이를 타고 승호가 일하고 있는 '무녀도염전'으로 갔다. 1951년에 조성된 16만평의 간척지에는 한때 무녀도가 소금으로 최고의 번성기를 보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던 전(前) 완양염전(현(現) 무녀도염전)이 있다.

지금은 갈대밭이 되어 습지 촬영을 오는 사진작가들이 많다
▲ 무녀도 염전 지금은 갈대밭이 되어 습지 촬영을 오는 사진작가들이 많다
ⓒ 김수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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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녀도염전은 몇 년 전 작고한 군산 출신의 최현칠 옹이 300여명의 인부들과 함께 1년간 방조제를 쌓아 그 틀을 만들었다.

이후 1961년 12월 염전매법이 폐지되고 1962년 1월부터 염전사업이 완전 민영화되자 본격적인 개인염전사업을 시작한 곳으로 당시 군산에는 8개소의 염전이 있었는데 섬 중에서는 이곳 완양염전(무녀도염전)의 규모가 큰 편이었다고 한다.

숙소다
▲ 무녀도염전 숙소다
ⓒ 김수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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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전이 가장 번성하던 시기에는 매년 60kg의 소금포대로 9000포 정도가 생산되었지만, 현재는 1/10정도로 생산량이 줄어들었다. 중국 등에서 오는 소금 수입의 증대와 인건비를 맞추지 못하는 생산구조 등으로 국내 소금 생산 전반은 물론 무녀도의 소금도 염전의 대부분이 갈대가 자라는 습지로 바뀌게 된다.

굴과 김치, 생선 국이 좋았다
▲ 염전에 먹은 점심 굴과 김치, 생선 국이 좋았다
ⓒ 김수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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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호랑 염전에서 일하시는 분들과 함께 점심을 먹은 다음, 염전과 마을을 둘러보기 위해 나왔다. 난 그냥 갯벌에서 바닷물을 햇볕에 말리는 과정을 통하여 소금을 만든다고만 알고 있었지 실제로 현장을 방문하여 본 것은 처음이라 궁금한 것이 많았다.

무녀도
▲ 무녀도염전에서 일하는 친구 지승호 무녀도
ⓒ 김수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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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당부분은 갯벌에 바닷물을 대고 건조하는 과정에 있지만, 비가 오면 민물이 빠지는 통로가 별도로 있고, 바닷물을 가지고 오는 양수시설과 물길이 있어 놀랐다.

염전바닥을 만지는 승호의 손
▲ 승호의 손 염전바닥을 만지는 승호의 손
ⓒ 김수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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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에서 마지막 소금이 되는 과정에서 사용되는 타일로 된 바닥을 본 적이 있다. 그런데 현장에 와 보니 타일을 시멘트로 바른 것이 아니라 네모로 구운 도자기나 적당한 크기로 부순 도자기 조각을 갯벌에 심었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깡파리판이라고 한다
▲ 염전 바닥의 도자기 타일 깡파리판이라고 한다
ⓒ 김수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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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호는 "요즘 소금 값이 많이 올라 올해는 지역 주민은 물론 외국인 인부들을 동원하여 생산량을 두 세배 이상 늘려볼 생각이고, 무녀도를 찾아오는 관광객들에게도 소금을 팔고 갈대밭이 된 폐 염전을 상품화 할 생각도 가지고 있다"며 "또한 홈페이지도 만들어 적극적으로 무녀도와 염전을 홍보할 생각이다"라고 말했다.

승호는 염전의 소금 생산 공정은 물론 교회, 이웃한 갈대밭이 된 폐 염전과 이곳을 개척한 최현칠 옹의 묘소, 마을 곳곳을 구경시켜주었다.

관광공사의 지도
▲ 무녀도 관광공사의 지도
ⓒ 한국관광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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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무녀도염전, #무녀도, #천일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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榴林 김수종입니다. 사람 이야기를 주로 쓰고 있으며, 간혹 독후감(서평), 여행기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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