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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8월 9일 밤 서울 한 고등학교에서 고3 수험생들이 방학 중임에도 야간자율학습을 하고 있다.
 2010년 8월 9일 밤 서울 한 고등학교에서 고3 수험생들이 방학 중임에도 야간자율학습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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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몇 해 전 여름 고등학교 1학년 아이들 몇 명과 말씨름했던 게 떠올랐다. 자칫 화를 못 참고 그 얘들에게 손찌검할 뻔했던, 나름 아찔했던 순간이었다. 지금이야 학생인권조례가 시행돼 이미 옛날이야기가 됐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특별반이라 하여 공부 잘 하는 아이들은 따로 모아 별도로 수업을 받게 하고 야간자율학습도 그들끼리 하게 했다.

듣자니까, 정도가 심했던 이웃 학교의 경우, 교실 환경 자체가 달라 성적이 낮은 아이들을 대놓고 차별했다고 하는데, 이를테면 특별반 교실과 일반반-특별반이 아닌 아이들의 통칭- 교실은 에어컨과 선풍기 수조차 달랐다는 얘기가 공공연했다.

학교 입장에서야 명문대에 진학해 학교의 이름을 '빛낼' 아이들에게 쾌적한 환경을 제공해 학습 효율을 높이고, 공부 못하는 아이들에게는 열심히 하면 좋은 환경에서 공부할 수 있다는 '자극'을 줄 수 있다는 생각에 무리수를 둔 것이다.

그 정도로 심하지는 않았지만, 필자가 근무하는 학교의 특별반 아이들에게도 상당한 '프라이드'가 있었다. 몇 반 학생이라는 말보다 특별반의 누구로 불리는 걸 더 좋아했고, 같은 반 친구들보다 특별반 아이들끼리 훨씬 더 가깝게 지냈다. 더욱이 그들 중에는 일반반 아이들과 똑같은 대우를 받는 걸 되레 억울하게 여기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으니, 말이 좋아 '프라이드'지 기실 그 아이들 대부분이 특권의식에 젖어 있었다.

공부깨나 한다는 아이들 색안경 끼고 보게된 이유

공부를 곧잘 하는 그들에게 버럭 화를 낸 이유인즉슨 이렇다. 여름철엔 아무리 무더워도 야간자율학습 시간에는 에어컨을 트는 것보다 창문을 활짝 여는 것이 더 시원하다. 특히 학교가 온통 숲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일단 해가 지면 웬만한 더위쯤은 한풀 꺾였다. 그런데, 문제는 모기였다. 창문마다 모기장이 설치돼 있긴 했지만, 떼로 달려드는 모기를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불과 건물 하나 차이였지만, 특별반 아이들은 모기로 인한 고생을 거의 하지 않았다. 똑같이 창문이 열린 상태에서 모기가 없었던 이유는 다름 아닌 교실 내 콘센트마다 빈틈없이 꽂혀있는 전자모기향 때문이었다. 콘센트에 멀티탭을 이어 달아 교실에 전자모기향이 족히 열 서너 개는 돼보였다. 그것들에서 뿜어져 나오는 알싸한 향이 되레 역할 지경이었다.

일반반에는 단 하나도 없는 전자모기향을, 그것도 그렇게나 많이 어디서 구했는지를 물으니, 모기 때문에 공부에 방해가 된다고 요구해 학교가 마련해준 것이라고 했다. 비록 밥솥이나 다리미처럼 많은 전력이 소모되는 것도, 그렇다고 크게 위험한 것도 아니어서 사용 자체를 문제 삼진 않았지만, 일반반 아이들에 견줘 사소하나마 특혜 아니냐며 나무란 것이 결국 사달이 났다.

"일반반 아이들도 똑같이 모기 때문에 힘들텐데, 그들도 너희들처럼 똑같이 배려 받았으면 좋겠다. 우선 사용 가능한 전자모기향을 모아 골고루 배분해 교실마다 비치하자. 그렇게 하는 게 어때?"
"그렇게 되면 저희 교실에 한 두 개 두기도 어려울 텐데, 그동안 모기 걱정 하지 않던 특별반 얘들이 가만히 있겠어요? 가만히 생각해보면, 억울할 것 아니에요?"

"억울하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일반반 아이들에게도 너희들 경우처럼 넉넉하게 설치해주든가, 아니라면 공평하게 나눠 쓰는 게 옳지 않겠니? 너희들만 혜택을 누리겠다는 말이니?"
"선생님, 그건 아니죠. 경쟁을 통해 저희가 그들보다 좋은 성적을 거뒀고, 그 노력과 결과에 대한 보상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일반반 얘들도 혜택을 누리겠다면 공부를 열심히 하면 될 것 아니에요? 공부도 못 하는 얘들이 불만만 많다니까요."

이와 비슷한 일을 하도 많이 겪다보니 요즘은 시나브로 무덤덤해졌지만, 이후 공부깨나 한답시고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간 아이들은 다 그럴 거라며 색안경을 끼고 보게 됐다. 이는 교사로서 지녀서는 안 되는 그릇된 편견이라는 걸 모르진 않지만, 어떻든 같은 반 아이들조차 성적에 따라 소 닭 보듯 하는 교실 풍경은 자괴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남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는 '불구 지성인'

고려대학교 홍보책자 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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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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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고려대 학생대표들이 교내에서 생존권 투쟁을 벌이는 청소노동자들과 시간강사들을 외면했다는 기사를 접했다. 지난 11일 고려대 학생대표들이 올 한해 학교와 재단을 상대로 요구할 '교육투쟁안'에 '시간강사와 청소노동자의 투쟁을 지지한다'는 항목을 표결 끝에 삭제했다는 것이다.

순간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그들이 강조한 재단비리 규탄과 등록금 추가 인하 등의 주장보다 사회적 약자를 보듬어 안고 그들과 연대할 줄 아는 것이 어쩌면 이 땅의 지성인으로서 대학생다운 모습이라고 여겨왔는데, 그러한 기대가 무참히 깨졌다.

그 중 생명과학대학 학생회장과 일부 대의원들의 주장은 차마 입에 담기조차 민망했다. 그들이 과연 대학생, 그것도 우리나라 최고의 명문대를 자처하는 대학의 학생이 맞나 의심할 정도다. 그들은 "계약기간이 늘어나면 (강사가) 나태해져서 강의의 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거나 "강의료가 올라가면 학생들의 부담이 높아진다"고 공공연히 주장했다고 한다(관련기사).

대체 그들은 '어느 별에서 온 사람들'일까. 우리나라 대학교육의 절반 이상을 책임지는 시간강사들의 고충을 그들은 과연 모르는 걸까. '보따리장수'라는 비아냥거림을 들어가며 시간당 고작 3, 4만 원에 이 대학 저 대학을 기웃거리고, 그나마 다음 학기 강의를 배정 받지 못할까봐 전전긍긍하는 그들의 처지에 측은함조차 느끼지 못하는 모양이다.

차라리 벼룩의 간을 내먹지, 아무리 등록금이 비싸다기로서니 시간강사의 강의료가 등록금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된다고 그것을 문제 삼는 것인지 그저 참담할 따름이다.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언론에 소개되는, 잿빛 미래에 쪼들린 형편 때문에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을 두고 목숨을 끊는 시간강사들의 사연조차 그들에게는 그저 가십거리일 뿐이었던 거다.

우리나라 노동자들의 절반이 비정규직이고, 언제 잘릴지 모르는 불안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고통을 그들은 철저히 외면했다. 엄청난 경쟁을 뚫고 명문대 합격이라는 영예를 누렸을지는 몰라도, 그들의 지금 모습은 다른 사람들이 겪는 고통에 공감하는 능력이 전혀 없는 '불구 지성인'이랄 수밖에 없다. 과연 그들이 우리 사회를 위해 어떤 기여를 할 수 있을까.

교내 구성원들 처지 눈 감은 고대생들, 참으로 부끄럽다

고려대생, 그것도 학생대표라면 지금껏 학창시절을 지내며 무한 경쟁이라는 피라미드의 최상층에서 머물던 엘리트들이다. 여전히 학벌이 위세 등등한 우리나라에서 그들은 졸업 후에도 비정규직의 애환을 전혀 알 리 없는 번듯한 직장에서 정규직으로 근무하게 될 테고, 시간강사나 청소노동자를 부리는 위치에서 큰소리치며 살아가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런 점에서, 무한 경쟁에서 승승장구해왔고 승자독식을 어릴 적부터 내면화해 온 그들에게서 사회적 약자에게 내미는 따뜻한 손을 기대하는 건 애초 무리인지도 모른다. 공평하게 나누자는 말에 억울함을 토로한 특별반 학생과 사회적 약자를 외면한 고려대 학생대표들의 모습이 겹치는 건 그래서다.

사족 하나. 그들은 필자의 대학 후배다. 난 교우회-고려대의 경우, 동문회를 이렇게 부른다-에 발을 끊은 지 이미 오래인데다 단지 졸업생이라는 이유로 대학과 굳이 인연을 이어가고 싶은 생각 추호도 없지만, 이런 참담한 기사를 접할 때면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다.

'불의는 참아도 불이익은 못 참는다'는 조롱, 자신들의 이해관계에만 매몰돼 힘없는 교내 구성원들의 처지에 눈감아버린 지금의 고려대생들에게 딱 어울리는 말 아닐까 싶다. 사사로이는 대학 선배로서, 참으로 부끄럽고 서글프다.


태그:#고려대생 교육투쟁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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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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