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하노이>는 오래전부터 마음에 품고 있던 베트남 여행을 꿈꾸며 선택한 책입니다.
가볍고 재미있는 여행 안내서인줄 알고 고른 책이었는데, 처음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습니다. 하지만 이 책은 베트남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 좋은 경험을 안겨줬습니다.
<스토리텔링 하노이>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대부분 낯섭니다. 베트남 여행을 좀 길게 다녀왔다거나 혹은 베트남에 대해 좀 안다는 사람들에게도 역시 낯선 이야기일 가능성이 큽니다.
하노이는 동아시아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도시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요? 베트남의 도읍으로서만 천 년 역사를 간직한 하노이는 서울, 도쿄 그리고 베이징에 비할 수 없는 오래된 역사의 도시라고 합니다.
하노이는 베트남 민족의 가장 중요한 삶의 무대였을 뿐만 아니라 무궁무진한 서사의 배경이 되었던 도시입니다. 그 때문에 지금도 풍부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남아있는 도시기도 합니다. 하노이 사람들이라면 대부분 항미전쟁의 자랑스러운 무용담을 간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가슴 아픈 사연들을 품고 있다는 것이지요.
이 책은 하노이의 뿌리인 건국신화로부터 시작해 식민도시 하노이, 하노이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하노이가 배경이 된 문학작품, 하노이가 배경이 된 작품을 쓴 작가들에 대한 이야기를 모아 엮은 책입니다.
하노이 스토리텔링을 제일 먼저 시작하는 작가는 소설가 김남일입니다. 김남일은 <천재 토끼 차상문>이라는 기발한 소재로 통찰력 깊은 소설을 쓴 작가입니다. 그는 '하노이는 이야기다'라는 글을 통해 하노이를 중심으로 베트남 역사를 돌아봅니다.
인도차이나 반도. 이는 베트남을 비롯한 몇몇 나라들이 속해 있는 이 땅을 부르는 이름입니다. 인도와 차이나라는 두 거대 문명 사이에 끼어있는 존재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인도차이나 반도는 한반도 보다 지정학적으로 더 중요한 요충지였던 탓이었는지 모르지만, 베트남은 1500년 전에도 이미 중국의 식민 지배를 받았던 모양입니다.
식민지와 전쟁의 나라였던 베트남이 식민 지배는 중국의 여러 왕조들을 거쳐 오는 500여 년 동안 계속됐고, 1858년부터 시작된 프랑스의 침탈을 거쳐 1975년 항미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어졌습니다. 또한, 20세기 베트남은 전쟁의 땅이기도 했습니다.
"베트남의 항불투쟁으로 시작하여 라오스, 캄보디아까지 전역이 확대된 제 1차 인도차이나 전쟁(1946~1954), 미국과 베트남의 전쟁으로 시작하여 라오스, 캄보디아까지 확전된 제 2차 인도차이나 전쟁(1960~1975), 중국, 베트남, 캄보디아가 서로 물리고 물린 제 3차 인도차이나전쟁이(1978~1979) 그것들이다." (본문 중에서)하노이에 관해 이야기할 때 전쟁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는 것도 바로 이런 역사 때문입니다. 그중 가장 치열했던 전쟁은 역시 '항미전쟁'입니다. 1964년 통킹만 사건 조작으로 본격화된 미국과의 전쟁은 1975년까지 계속됩니다.
이 책에서는 항미전쟁과 관련해 꼭 기억해야 할 두 사람의 미국인으로 공화당 대선 후보였던 존 매케인 상원과 배우인 제인 폰다를 꼽고 있습니다. 존 매케인은 폭격기 조종사로 베트남 전쟁에 참가했고, 혁혁한 전공을 올리던 중 미사일을 맞고 격추돼 포로가 됩니다.
포로가 된 매케인은 1968년 자신의 아버지가 미군 태평양함대 사령관이 됐을 때, 베트남 당국이 석방을 제안하지만 다른 포로들을 석방할 때까지 남아있겠다고 자청해 1973년 파리강화조약 이후에야 석방됩니다.
미국인들은 지금도 그의 애국심과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칭송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미군의 폭격으로 죽고 다친 베트남 민중에게는 존 매케인은 전혀 다른 평가를 받는 존재겠지요.
"1972년 성탄절 다음날 삼십 대의 B52 편대가 폭탄을 퍼부어 하노이의 컴 티엔 거리 한 곳에서만 삼백 명이 죽고, 이백 명이 고아가 되었으며 천여 채의 가옥이 파괴되었다거나 하는 식의 기록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겠지만."(본문 중에서)물론 존 매케인과는 정반대의 미국인도 있습니다. 1972년 세계적인 반전운동의 열기 속에 베트남 현지까지 방문해 반전 캠페인을 벌였던 제인 폰다는 '하노이 제인'으로 불렸다고 합니다.
호치민, "전쟁 하듯 목숨 걸고 공부하라"
한편, 베트남 역사, 하노이 역사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한 명 있습니다. 바로 호치민입니다. 탁월한 혁명지도자였던 호치민은 평생을 소박하게 살았던 지도자로 베트남 민중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던 인물입니다.
하노이가 해방된 후에도 총독부로 사용되던 관저 건물을 마다하고 소박한 목조 건물에서 일생을 살았던 호치민. 그는 늘 고무슬리퍼를 신고 지냈는데, 마오쩌뚱과 정상회담을 할 때도 같은 신발을 신었다고 합니다.
이 책에는 이른바 '호치민 장학생'에 관한 일화가 소개돼 있습니다. 미국과 전쟁을 치르는 급박한 상황에서 유능한 인재들을 골라 외국으로 유학을 보냈는데, 항미전쟁을 하고 있는 조국을 떠날 수 없다는 학생들에게 했던 호치민의 이야기는 민족주의자들의 가슴을 뜨겁게 합니다.
"지금 너희들이 맡아야 할 전쟁은 단 하나,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다. 물론 너희들도 알고 나도 안다. 너희들이 떠나 있는 동안에 조국에서는 너희들 또래 많은 청년들이 죽어갈 것이고, 어쩌면 너의들의 부모와 형제자매가 죽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시간이 좀 걸릴지언정 우리가 반드시 승리할 거라는 사실이다. 너희들은 내게 약속해야 한다. 학업을 마치기 전엔 어떤 일이 있어도 돌아와선 안 된다. 우리가 승리한 너희들은 전쟁으로 파괴된 조국을 아름답게 재건하는 데 힘을 쏟아라. 그것이 너희들이 조국에 대해 지게 되는 빚이다." (본문 중에서)베트남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처음 듣는 이야기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만, 베트남 민중들에게 '호 아저씨'로 통하던 호치민 주석은 가히 전설 같은 지도자입니다. 그의 유언에서도 민중의 지도자다운 모습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무덤에는 비석도 동상도 세우지 말라. 다만 단순하고 넓고 튼튼하며 통풍이 잘 되는 집을 세워 방문객들이 쉬어 가게 하는 것이 좋겠다. 방문객마다 추모의 뜻으로 한두 그루씩 나무를 심게 하라. 세월이 지나면 나무들은 숲을 이룰 것이다." (본문 중에서)그런데, 호치민의 유언은 지켜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항미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호치민 신화'가 절실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합니다. 호치민의 유언을 읽으며 '집 가까운 곳에 아주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라'라던 노무현 대통령의 유언이 떠오른 것은 왜 일까요. 국민을 섬기는 지도자의 비슷한 모습이 느껴졌기 때문이겠지요.
가을 전어는 하노이에서도 최고의 생선<스토리텔링 하노이>에는 베트남 건국신화를 비롯해 바오 닌, 부방 같은 베트남을 대표하는 작가들의 작품으로 엮어져 있습니다. 평범한 하노이 사람들의 일상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이웃집들> <비 오는 날 시클로를 타다> <오토바이> 같은 작품들이 소개돼 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인상 적인 작품은 <북풍 가랑비를 그리워하다 – 십이애상 시월>이라는 부방의 작품입니다. 작가 부방은 20대 중반에 작가로서 명성을 얻었지만, 1954년 중년의 나이에 '배신자'라는 멸시를 감수하면서 남부 사이공으로 가서 정보활동을 하면서 평생을 살게 됩니다.
작가는 살아있는 동안 자신의 항불·항미 활동에 대해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지만, 그가 죽은 후에 정치적 내력이 알려지면서 새롭게 평가 받았다고 합니다. 이 책에는 그의 작품 중 사이공에서 지내면서 하노이와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담아 쓴 글 <십이애상 시월>이 포함돼 있습니다.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는 고향이었기 때문에 더 절절한 마음을 담아 작고 사소한 것들까지 기억해내고 기록으로 남긴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재미있고 눈에 띄는 것은 그가 기억하고 있는 여러 하노이 음식 중에 '전어'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정말 맛있는 것은 전어인데 시월이야말로 바로 이 생선의 계절이기 때문이다. 고소한 정도가 고등어를 넘어서고 향긋한 살은 초어, 살치 같은 것들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다.… 납작하고 잔가시가 많고 몸통이 둥글고 대체로 커봤자 손가락 세 정도면 끝이다. 그 놈의 특징은 기름기가 아주 많고, 오뉴월이 되면 무진장 통통해져서, 일 킬로그램을 사다 칼로 양쪽 옆구리를 갈라 튀겨내면 암탉의 기름 같은 노란 기름이 한 종지나 나온다." (본문 중에서)'가을 전어에 깨가 서말'이라는 우리나라 속담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전어는 최근 10여 년 사이에 아주 인기 있는 횟감으로 각광을 받고 있는데, 하노이에서는 오래 전부터 최고의 생선으로 인정받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여행 안내서나 공식 카달로그에서 만날 수 없는 하노이의 친근한 속살을 만나는 듯합니다.
사람냄새 나는 베트남 사람들의 삶오랫동안 여운이 남는 또 한 작품은 베트남 대표 작가 바오닌의 단편 <0시의 하노이>입니다. 설을 준비하는 가난한 베트남 사람들의 생활과 전쟁을 겪는 젊은이들의 아련한 사랑 이야기를 읽는 동안 사랑하는 애인을 두고 군대에 갔던 시절을 다시 떠올렸습니다.
<스토리텔링 하노이>는 하노이의 진면목을 소개하기 위해 특별히 기획된 책입니다. 베트남을 잘 아는 한국 작가들이 김남일, 방현석, 김정환 같은 작가들의 글과 전문 번역가들이 번역한 베트남 작가들의 작품이 잘 엮인 책입니다.
여행 안내서에서 만날 수 없는 문화와 역사, 풋풋하고 사람냄새 나는 베트남 민중들의 삶을 들여다 볼 수 있는 특별한 책입니다. 이 책의 또 다른 특징은 충실한 부록입니다. 상세한 후주, 베트남 연표, 하노이 이름변천사, 참고자료, 하노이 지식백과 같은 자료들이 본문을 풍성하게 뒷받침해줍니다.
그런데 정말 아쉬운 것도 있었습니다. 이 책은 주석이 없으면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 정말 많은데, 모두 후주로 처리돼 있었습니다. 본문을 읽으며 책 뒤쪽에 모아 놓은 후주를 살펴보는 것이 매우 불편했습니다. 혹 다시 인쇄하게 된다면, 꼭 각주로 처리하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제 블로그에도 포스팅 될 예정입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