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올레의 눈부신 성공 이후, 전국에 걷기 좋은 이런저런 길이 생긴 것이야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걷기에 관심이 있는 이들이라면 잘 알고 있다. 기차나, 고속버스를 타고 훌쩍 떠나는 것도 좋지만, 바쁜 일상에서 늘 그렇게 먼 길을 떠나는 건 쉽지 않다. 특히 도심에 삶의 뿌리를 내리고 사는 이들이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그래서 서울에서 전철을 타고 찾아가 가볍게 돌아오기 좋은 길을 소개한다. 고양시의 '고양 누리길'이다. 현재 다섯 개의 코스 40km가 조성되어 있는데, 아직 완성단계는 아니다. '고양 누리길'이 고양시 둘레를 품어 안듯이 감싼 길이 되려면 길이 더 이어져야 하기 때문에 길을 조성하는 작업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 고양시 관계자의 설명이다.
최성 고양시장은 "고양 누리길이 제주올레 못지않게 아름다우면서 걷기 좋은 길"이라고 강조한다. 최 시장의 말은 맞다. 고양시장의 입장에서야 '고양 누리길'이 제주올레 뿐만 아니라 산티아고길보다 더 아름답고 좋은 길이라는 자신감을 갖는 건 당연하다. 그만큼 애정이 듬뿍 담긴 시선으로 보니 그럴 수밖에. 그 길을 여섯 번에 걸쳐 직접 걸은 뒤 소개한다. [편집자말] |
<고양 누리길>은 부담없이 걸을 수 있는 길인 것만은 확실하다. <고양 누리길>을 걸으러 가는 날은 배낭을 복잡하게 꾸리지 않아도 좋다. 그냥 배낭에 카메라와 물 한 병만 찔러 넣고 집을 나선다. 아직은 봄볕이 무르익지 않아 햇볕을 가릴 요량도 하지 않아도 좋다.
지난 15일, <고양 누리길>의 다섯 개 코스 가운데 '고양동 누리길'을 걸었다. 이 길은 김종천 고양시 조경팀장이 "다섯 개 <고양 누리길> 가운데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길"이라고 했다. 지난해 4월, 고양동 누리길을 잇기 위해 대자산에 올랐던 김 팀장은 분홍색 꽃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이 흐드러지게 피어난 진달래들을 만났더란다. 진달래는 그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마치 첫사랑을 만난 것 같았다던가. 그 첫 느낌이 오래도록 남아 누군가 "<고양 누리길> 가운데 어느 코스가 가장 좋냐"고 물으면 서슴지 않고 "고양동 누리길"이라고 대답한단다.
'고양동 누리길'은 필리핀참전비에서 시작해 최영 장군묘를 지나, 고양향교와 중남미문화원을 거쳐 선유랑 마을로 이어진다. 길이는 7.1km, 소요시간은 2시간 40분. 가벼운 마음으로 걸을 수 있는 거리다. 거리가 너무 짧아 걷는 것 같지 않다고 생각하는 분들이라면 쥬쥬동물원에서 시작하는 '송강 누리길'을 걸은 뒤, 이어서 걷는 것도 좋을 것이다.
이날 도보여행에는 김종천 조경팀장과 고양시 관계자들이 동행했다. 이태형 녹지과장은 중남미 문화원에서 만나 일행과 합류했다.
단풍나무 길, 조금 이르게 찾아왔네필리핀참전비에서 최영 장군 묘로 가는 길에는 단풍나무들이 길을 따라 심어져 있었다. 아직 계절이 일러 앙상한 가지만이 바람에 살짝 흔들릴 뿐이다. 이 길은 단풍나무 잎이 본색을 드러내는 계절에 걸으면 좋을 텐데, 조금 일렀다 싶다.
필리핀참전비에서 최영장군 묘까지의 거리는 2.5km남짓. 한데 중간에 묘와 사당이 하나 있다. 성령대군의 묘다. 태종의 넷째 아들인 성령대군은 열네 살의 어린 나이에 홍역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고양동 누리길' 코스 안에 성령대군 묘는 포함되지 않으나, 잠시 길에서 벗어나 들렀다 가도 좋으리.
이 근처에는 경안군과 임창군의 묘도 있다. 경안군은 소현세자의 셋째 아들이며, 임창군은 경안군의 아들이다. 이씨 왕조의 무덤이 고양시에 이리저리 흩어져 있는 것은 고양시가 풍수지리로 볼 때 명당이라서 그런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길을 걷노라면 사람 사는 모습을 구경할 수 있지만 더불어 이렇게 죽은 이들의 흔적 또한 볼 수 있다. 죽음은 누구도 피해가지 못하는 것, 살아생전 부귀영화를 한껏 누린 이들도 결국 한 줌 흙으로 돌아가는 건 마찬가지라는 생각에 잠시 옷깃을 여미게 된다.
장작을 쌓아놓은 기와집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사진기를 들었다. 이상하게 나이를 먹을수록 저런 집이 마음을 끌어당긴다. 콘크리트로 지어진 집에서 오래 살아서 그런가 보다. 고양시, 하면 다닥다닥 들어선 아파트 단지만 있다고 생각하는데 실제로 걸어보니 농촌지역이 제법 넓은 편이다. 이런 지역을 도농복합지역이라고 하던가. 그래서인지 <고양누리길>은 걸으면 걸을수록 정감이 느껴진다.
최영 장군 묘로 가는 길은 걷기 좋은 숲길이다. 바로 대자산(높이 210미터) 숲길로 이곳에서 고양 향교까지 이런 길이 2.5km남짓 이어진다. 녹음이 우거진 계절이라면 온갖 나무들이 뿜어내는 피톤치드를 마음껏 마실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지금도 나쁘지 않다.
숲길 옆으로 흐르던 작은 내가 얼어붙어 있다. 하지만 땅은 봄기운을 머금었는지 푹신거리다 못해 살짝 질척거린다. 걸음을 옮기니 슬쩍 미끄러진다. 그래도 걷는 걸음은 가볍고 경쾌하다. 약간의 오르막이 있지만, 그리 힘들이지 않고 오를 수 있다.
최영 장군 무덤 앞 조화, 누가 놓고 갔을까
가쁜 숨을 몰아쉬며 돌계단을 올라가 도착한 최영 장군 묘는 앞에서 볼 때 무덤이 하나지만, 뒤로 가면 무덤이 하나 더 있다. 뒤엣것은 최 장군의 아버지 최원직의 무덤이다. 아버지가 아들을 뒤에서 지그시 바라보고 있는 형태라고나 할까.
최영 장군 무덤 앞의 상석에 화려한 조화가 놓여 있었다. 화사한 봄볕이 원색의 꽃 위로 눈부시게 쏟아진다. 누가 놓고 갔을까?
성령대군, 경안군, 임창군의 무덤이 흩어져 있는 곳을 지나 최영 장군 무덤에 오니, 느낌이 새롭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가장 먼저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고려의 충신인 최영 장군을 꼽지 않았던가. 결국 최영 장군은 이성계에게 죽임을 당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야 했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지만 만일 그가 죽지 않았다면 역사는 달라졌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무덤 주변을 서성였다.
무덤을 끼고 숲길은 이어진다. 발밑에서 바싹 마른 낙엽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린다. 숲으로 길게 이어지는 길을 한참을 걷고 나자 고양향교가 뒷모습을 슬쩍 드러낸다. 기와지붕의 건물 몇 채가 눈길을 잡아끈다. 아쉽다, 향교의 문은 굳게 닫혀 있어 들어가지 못한다.
오밀조밀 중남미 문화원, 볼거리 많아요대신 고양향교 바로 옆에 자리 잡은 <중남미 문화원>에 들렀다. 별다른 기대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가 오밀조밀하게 잘 꾸며놓은 것을 보고 감탄했다. 1992년에 중남미에서 30여 년간 외교관 생활을 했던 이복형 대사가 중남미 지역의 문화와 예술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건립한 곳이 <중남미 문화원>이란다. 개인박물관이지만, 3500여 점의 전시물들을 보유해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이곳에서 잉카, 아즈텍, 마야 문명의 흔적을 볼 수 있다. 그렇지 않아도 남미로 여행을 떠나고 싶어 엉덩이가 들썩이고 있던 참인데, 이러다가 조만간 훌쩍 배낭을 짊어지고 남미로 '고고씽' 하는 거나 아닌지 모르겠다.
<중남미 문화원>은 제법 넓어 박물관과 미술관이 있으며, 경건한 느낌을 한껏 자아내는 종교전시관도 있다. 야외 조각공원에는 다양한 조각품들이 전시되어 있으며, 마야벽화를 도자기로 재현해 눈길을 끈다. 그냥 잠시 둘러보자, 고 들어갔다가 발목을 단단히 잡혔다.
<중남미 문화원> 안내를 해준 조정화 실장은 "<중남미 문화원>이 한국와 중남미 문화 교류의 산실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고 설명한다. 세계 어느 나라에도 이처럼 큰 중남미 문화원이 있는 곳이 없다는 것이다.
"누리길 걸으러 왔다가 그냥 중남미 문화원에서 주저앉게 생겼다"고 하자 이태형 고양시 녹지과장이 "그러게요" 하면서 맞장구를 친다. 그만큼 색다른 전시물들이 볼만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중남미 문화원>에서 너무 오래 지체를 했나 보다. 낮 12시가 훌쩍 넘었다. 김종천 팀장이 배꼽시계가 울었단다. 선유량 마을로 가기 전, 큰 길옆에 있는 순댓국집에서 따끈한 순댓국으로 점심식사를 했다. 내 배꼽시계는 울리지 않았는데 구수한 음식냄새를 맡으니 갑자기 심한 허기가 느껴진다. 도심에서 걸으니 밥 먹을 식당이 지천인 게 좋다. 깊은 산길이나 호젓한 시골길을 걸을 때는 식당이 거의 없어 툭하면 쫄쫄 굶기 일쑤였는데 말이다.
'고양동 누리길'에서 뚝 떨어져 있지만 이 부근에 '벽제관' 터가 남아 있단다. '벽제관'은 중국에서 우리나라로 오던 사신들의 공용 숙박시설이다. 조선 시대에 중국 사신들이 우리나라에 오면 이곳에서 하룻밤을 묵고 서울로 들어갔다고 한다. 중국으로 통하는 중요한 위치라서 중국으로 가는 우리나라 사신들도 이곳에서 묵었다고 한다. 한국전쟁 때 불에 타서 없어지고 터만 남았다.
벽제관에서 하룻밤을 묵은 사신들은 선유랑 마을로 가는 길을 지나 서울로 들어갔다고 한다. 선유랑 마을로 가는 길에 '중국 사신이 다녔던 길' 표지판이 세워진 것은 그 때문이다. 그 길, 자동차 한 대가 너끈히 지나다닐 정도로 넓지만 걷기 좋은 숲길이다. 한여름에는 녹음이 우거져 바람이 불 때마다 나뭇잎들이 소곤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단다.
이곳에 있는 성황당 고개에 누군가 작은 불상을 가져다 놓았다. 화려한 금빛 불상 옆에 소박하게 나무로 깎은 불상이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채 서 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돌무더기가 쌓여 있다. 김종천 팀장이 길 위에서 돌 하나를 집어 돌무더기 위에 올려놓는다. 무슨 소원을?
"로또 당첨되게 해주세요."돌멩이 하나 갖고 되겠어요? 커다란 바위를 번쩍 들어서 얹어야지. 흐흐.
'신선이 놀다간 자리'라는 뜻이 담긴 선유랑 마을을 지나 걷다가 다시 무덤을 만났다. 조선 세종 때 영의정을 지냈다는 이직 선생의 무덤이다. 이 분이 유명한 것은 오로시(烏鷺時) 때문이다. 기억하시는가?
까마귀 검다 하고 백로야 웃지 마라겉이 검은들 속조차 검을소냐겉 희고 속 검은 이는 너뿐인가 하노라.
길옆 무덤 앞에 화려한 비석이 세워졌기에 그 무덤인가 했더니, 아니다. 무덤 뒤로 한참을 걸어 오르니 세월의 흔적이 잔뜩 아로새겨진 문인석들이 세워진 무덤이 모습을 나타낸다. 봉분이 마름모꼴이다.
오늘은 도보여행을 하는 게 아니라 '역사 속의 인물 따라잡기'를 하고 있는 것 같다. 최영 장군은 저물어가는 고려를 저버리지 못해 이성계에게 죽임을 당했으나, 이직 선생은 이성계 편에 서서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는 영의정의 자리까지 올랐다. 하지만 죽은 뒤에는 똑같이 한 개 무덤으로 남았다.
선유랑 마을은 다양한 농촌 체험을 할 수 있는 마을이라는 게 이태형 녹지과장의 귀띔이다. 마을은 그리 크지 않지만, 농촌의 정취를 지금도 그대로 지니고 있어 사람들이 많이 찾는단다.
고양동 누리길은 안장고개에서 끝났다. 고양시는 도회적인 이미지를 한껏 풍기는 도시였는데 막상 안으로 들어가 직접 <고양 누리길>을 걸어 보니, 생각과 아주 많이 달랐다. 옛 모습을 간직한 농촌 마을이 있는가 하면, 걷기 좋은 숲길이 곳곳에 숨어 있으며, 역사의 흔적을 참으로 많이 남겨두고 있었던 것이다.
삼송역에서 전철을 타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 고양시로 확 이사를 가버릴까, 하는 생각을 한 건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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