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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함이 모 단체의 '위원장'이거나, 협의체 '의장' '회장'으로 끝나는 명함을 약 10년가량 유지한 사람이라면, 얼마 뒤 명함에는 '의원'이 새겨지는 사례가 많다. 특히 민중운동을 선도하며 명망을 떨친 숱한 단체의 '위원장' 직을 두루 역임한 사람은 '의원'으로 신분 상승하는 게 훨씬 수월하다.

 

그 '의원' 직함이 고난을 겪은 희생한 세월에 대한 대가인 경우도 있다. 사회를 위해 희생한 인고의 세월을 감안하면 '의원' 자리 하나 거머쥔다고 크게 탓할 일은 아니다. 하지만 호남에서 '의원' '단체장'을 꿈꾼다면 갖춰야 할 요건이 하나 더 있다. 바로 민주당 입당이다. 

 

30년 광주 '야인'이 야권 단일후보로

 

이런 호남 정치풍토에서 30년 동안 '위원장' '의장' 자리만 되풀이하며 줄곧 야인으로 투쟁 일선에 선 이가 있다. 통합진보당 오병윤 후보가 바로 그다.

 

그는 오랜 세월 무슨 단체의 '대책위원장' 아니면 '협의회의장'이었다. 그러다가 2000년 민주노동당 창당 후에는 소속 당 대권주자의 최전방 운동원으로 활약했고, 그 후에는 총선이나 지방선거 때마다 그 자신이 직접 후보자로 나서 홍보용 어깨띠를 두르고 다녔다.

 

그때마다 안타까운 득표율을 기록한 채 낙선자 대열에 끼어 후일을 기약해야 했다. '위원장' '의장'이던 시절에 비해 민주노동당 광주시당 위원장을 맡은 그의 위상은 뚜렷이 신장된 바가 없어 보였다.  

 

오병윤 통합진보당 후보가 출마한 광주 서구을은 여러모로 지역민의 관심이 집중된 곳이다. 그는 광주지역 유일한 야권연대 단일후보다. 여기서 잠깐, 그의 이력을 살펴보자.

 

1985년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을 시작으로 그의 고단한 '장' 인생은 시작되었다.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 호남지역 총학생연합의장, 전국학생총연합 부의장, 광주노동연구소 연구원, 광주노동교육협회 회장, 광주노동운동단체연합 의장,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조직위원장, 국가보안법폐지범국민연대 집행위원장, 매향리 미공군사격장폐쇄 범국민대책위원회 집행위원장, 불평등소파(SOFA)개정을 위한 범국민운동본부 집행위원장, 미군에 의한 양민학살 진상조사위원회 남측본부 집행위원장 등.

 

한시적으로 조직되었다가 사라진 크고 작은 단체 활동을 제하고 간추린 것만 이 정도다. 이후 민주노동당 정당인으로 활동하던 시절의 삶도 그전 세월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런 세월이 자그마치 삼십 년이다. 그 긴 시간 동안 그가 '의원'이나 '단체장'으로 선출되지 못한 것은 자질부족 때문이 아니란 게 중론이다. 그는 광주에서 민주당 소속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선거철이 되면 어김없이 후보자 홍보용 어깨띠를 두르고 사람들 앞에 섰다. 그리고 당연히(?) 낙선했다. 이번까지, 총선만 네 번째 도전이고 단체장 선거에 출마한 경력까지 있다. 특히 2004년에는 광주 시민사회단체가 공동으로 지지를 표명한 유일한 후보자였지만 득표율은 7.3%에 머물렀다.

 

그런 그가 이번 4.11총선에서 광주의 유일 야권 단일후보로 선정됐다. 처음으로 당선 가능성에 가장 근접한 출마인 셈이다. 그렇다고 당선을 낙관하기도 어렵다. 무엇보다 민주당 최종 경선주자였던 두 예비후보자의 반대가 크다.

 

두 후보는 "의회권력 교체를 위한 야권연대 정신에는 뜻을 같이하지만 지역민의 뜻을 무시한 중앙당의 '나눠 먹기식' 공천 결정에 절대 따를 수 없다"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그 중 서대석 후보는 끝내 무소속 출마를 선언했다.

 

오병윤의 원래 꿈은 '의원'이나 '단체장'이 아닌, '선생님'이었다. 공장 노동자로 주경야독하는 어려운 청소년기를 보낸 그는 자신처럼 어려운 처지의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독학 끝에 27살 늦은 나이로 전남대학교 사범대학에 입학했던 것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어두운 시대는 그가 고분고분 학업에만 전념하게 두지 않았다. 그는 세상과 싸웠고, 쫓겨 다니고, 투옥되는 과정을 되풀이 하며 청춘의 대부분을 보냈다.

 

감옥에서 김남주에게 받은 시 한 편... 그는 투사가 됐다

 

광주교도소 수감기간은 그에게 전향(?)의 시간이었다. 그는 지식인 학생운동가에서 더 강력한 투사가 됐다. 감방동기 고 김남주 시인은 학생 오병윤에게 우유곽에 못으로 새긴 시 <길>을 건넸다. 지금도 오병윤은 김남주 시인이 감옥에서 써준 그 시를 혼자 읊조리곤 한단다.

 

"당시 감옥에서 남주형이 써준 시는 여전히 저에게 가장 강력한 지침서예요. 제 생의 이정표나 다름없지요. 김남주 시인은 저에게 증오, 분노가 아닌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운동을 하라고 인도하신 분입니다."

 

출소 후 오병윤은 노동자, 농민의 삶에 주로 천착했다. 1987년 여름의 노동자 대투쟁을 기점으로 2000년 민주노동당이 창당하기까지 노동자, 농민 문제에 투신했다.

 

시인 김지하가 나라를 말아 먹은 '오적'의 하나로 지목했던 이들이 국회의원이다. 오 후보는 왜 집요하게 그 '도적소굴' 국회에 입성하길 원할까.

 

"일종의 사명감이죠. 이대로는 사람들에게 도저히 희망이 없습니다. 새누리당과 이명박 정권의 폭정에 국민들은 지쳐 있습니다. 이제 1%만을 위한 정치가 아닌 99%를 위한 정치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저는 노동자, 농민, 중소상인 등 서민이 주인이 되고, 그들이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사회를 만들고 싶습니다."

 

네 번째 총선 도전인 만큼 오 후보의 각오는 어느 때보다 강했다. 야권 단일후보라는 타이틀까지 획득했으니 그에겐 더욱 의미 있는 선거다. 그렇지만 최종경선마저 치러보지 못하고 포기해야 하는 민주당의 두 후보자에 대한 심경은 복잡할 수밖에 없다.

 

"여러분들이 야권 단일후보로 저를 선정해 줘서 무척 감사하고 어깨가 무겁습니다. 서대석, 이상갑 민주당 두 후보께서 겪으실 상심은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고요. 하지만 정권교체를 바라는 국민의 바람을 그 분들이 부디 저버리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뿐입니다."

 

야권 단일후보에 따른 상황을 묻는 질문에는 되도록 짧게 대답했다. 두 후보자의 거취 문제가 자신의 당선 여부를 결정하는 중요한 변수이기도 하지만, 워낙 예민한 부분이라 말하기를 꺼리는 눈치였다.

 

'헝클어진 야권연대'... 광주 서구을 안갯속

 

"오랜 재야활동과 연이은 출마와 낙선 탓에 가족들의 고통과 희생이 컸을 것 같은데요. 가장으로서 느끼는 가장 강한 감정은 무엇입니까?"

 

기자는 다소 사적인 질문을 그에게 던져보았다. 사실, 오 후보 같은 전문 활동가들의 생계와 삶의 방식이 늘 궁금하기도 했다.

 

"세 아이들과 아내는 제가 굽히지 않고 활동하는 힘의 원동력입니다. 아내와 아이들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한 마음을 늘 가슴에 담고 살지요. 그들을 위해서라도 더 좋은 세상을 만들자고 제 자신을 다잡는 것 같아요."  

 

역시 숱한 역경을 견디는 힘은 가족이라고 했다. 운동에 투신하고 세 번의 총선 출마와 한 번의 단체장 선거 패배의 충격을 극복할 수 있었던 힘도 모두 가족에게서 나왔다고 했다.

 

지역에서 그는 한때 '국민 사회자'로 불렸다. 온갖 집회 사회를 전담해 맡다보니 얻게 된 별칭이었다. 그만큼 민주화운동 당시 오 후보는 각종 집회와 시위현장에서 탁월한 웅변실력과 지도능력을 발휘했다.

 

통합진보당 소속의 야권 단일후보 오병윤은 과연 광주에서 좋은 성과를 거둘까? 현재로서는 '불투명하다'가 정답일 듯싶다.

 

무소속 출마를 선언한 서대석 후보는 지난 2010년 광주 서구청장 재보궐 선거에서 민주당을 제외한 야4당과 시민사회단체의 야권 단일후보로 출마한 경험이 있다. 하지만 그는 현재, 광주 서구을의 야권연대에 반발하고 있다.

 

서 후보가 무소속 출마를 끝까지 강행하면 서구을의 판세는 더욱 안갯속으로 빠질 것으로 보인다. 오병윤-서대석 후보의 각축은 물론이고 새누리당 이정현 후보의 존재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광주에서 새누리당 후보의 힘은 미약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이번 이정현 후보는 다를 것이란 예측이 나온다. 전남 곡성이 고향인 이 후보는 광주에서 세 번째 출마하는 것이고, 현재 꾸준히 지역민을 만나고 있다.

 

이정현 후보는 오병윤 후보가 대학에 들어갔던 27살에 정치에 뛰어들어 계속 한 길을 걸었다. 그는 '광주 지역구 새누리당 의원'을 단단히 벼르고 있다. 광주 서구을에서는 새누리당 후보와 '헝클어진 야권연대' 두 후보의 '3자대결'로 굳어질까?

 

아직은 알 수 없고, 결과 역시 아무도 모른다.

덧붙이는 글 | 정미경 기자는 <오마이뉴스> 2012 시민기자 총선특별취재팀입니다. 


태그:#오 병윤, #4.11총선, #야군단일후보, #무소속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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