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 스물여섯 되던 해 12월, 내 친구들은 이미 전역하고 결혼해 자식을 낳아 키우는데 나는 1969년 12월 3일부로 뒤늦게 입대 영장 통보를 받았다. 나의 군 징집이 그렇게 늦어진 배경은 모두다 그때나 지금이나 호시탐탐 남침 야욕을 꿈꾸는 "김일성의 지령에 따라 청와대 습격" 명령을 받고 남파된 김신조 (31명) 일당의 1968년 1·21사태와 관련이 있다.
그런데다 내가 7살 때 6·25전쟁으로 외가댁 마을로 피난을 나올 때 나의 고향 본적지 면사무소가 불타버려 우리 가족은 호적이 없었다. 그래 어쩔 수 없이 피난처에 새로 호적을 만드는데 그때 우리 동네 이장이셨던 큰 외삼촌께서 아무게 네가 군대 갈 때까지 우리나라 평화가 안 되면 또다시 전쟁이 날 것이라 말씀하시며 마치 인심이라도 쓰시듯 내 나이를 실제 나이보다 2살이나 줄여 새로운 호적을 만들고 '도민증'을 만들어주셨다.
그렇게 되니 자연히 내가 성장해 군에 갈 나이가 되었을 때 신체검사도 현역병 입영도 동네 친구들보다 모두 2년씩 늦었다. 그런데다 그 시절은 군 병력 자원이 남아돌아 신체검사 하고 곧 바로 영장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일단 보충역에 편입되어 2년 뒤 입영영장이 1년 앞두고 미리 나오더니 이마저 입대 한 달여 앞두고 무슨 이유인지 취소되고 말았다.
그래서 면사무소 병사계에 자초지종을 알아보니 내 뜻과 상관없이 현역병 입영 자원이 넘쳐 어쩌면 군에 가지 않게 될 것 같다고 한다. 그러던 중 예상치 않게 1968년 1월 21일 김신조 일당의 청와대를 기습 사건으로 우리나라는 전국에 '군경 비상령'이 내려지고 그 일로 인하여 나는 뒤늦게 현역병 징집이 되어 1969년 12월 3일 우리 나이 스물여섯 살 12월에 입영을 했다.
인천에서 입영 열차를 타고 살을 에듯 싸늘한 찬 바람이 불어오는 겨울밤을 밤새도록 달려 논산훈련소 보충대에 입소했다. 그 캄캄한 밤중에 나보다 불과 하루 이틀 먼저 입소한 장병들이 머리를 빡빡 깎고 있었다. 희미한 남풋불 아래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는 가운데 내무반장이란 작자가 사시나무 떨 듯하는 우리들에게 보충대 마루 밑에 쥐가 많다며 너희들이 마루 밑에 기어들어가 쥐를 한 마리씩 잡으라고 "실시"를 외친다.
그러다 보니 하도 의기당당한 내무반장 기세에 주눅이 들어 입소장병들 너도나도 하나같이 겁을 먹고 정신이 혼비백산된 가운데 침상 밑에 기어들어가 낑낑거리며 쥐를 찾는다. 하지만 '아닌 밤중에 홍두깨 두드리는 격'이지 하루에도 수백 명씩 드나드는 보충대 침상 밑에 무슨 놈의 쥐가 있단 말인가?
그런 줄도 모르고 겁에 질린 입소장병들 하나같이 침상 밑에 기어들어가 우왕좌왕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보충대 내무반 바닥에 입소장병들 주머니에 있던 귀중품이 지천으로 나뒹군다. 그러면 이 기회를 놓칠세라 논산 훈련소 보충대 기간병과 내무반장들이 '불로소득' 재미를 톡톡 보던 시절이었다.
아마 그 시절 보충대 기간병과 내무반장들은 어림잡아도 하루 수십만 원 수입도 더 챙겼을것이다. 그런데도 그 시절은 육군훈련소 보충대에서 공공연하게 그런 비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성행하고 있는데도 누구 한 사람 이들의 고질적인 만행을 제지하지 않고 윗사람들이 이런 비리를 눈감았던 시절이다. 그야말로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이야기다.
그런데 더 웃기는 일은 그렇게 주머니 귀중품을 너나 할 것 없이 몰수당하고도 누구 한 사람 감히 돌려달라고 말 한마디 못했다. 그렇게 처당과 지옥을 오가는 무시무시한 밤이 지나고 새 날이 밝으니 기간병들이 입소장병을 모아놓고 펜 글씨 잘 쓰는 사람 나오라는 주문을 한다. 나는 입대 전 펜글씨를 잘 쓰는 편이었지만 용기가 나지 않아 잠자코 있었다.
그런데 나와 함께 입대한 입영 동기들이 무슨 자랑처럼 날 펜글씨 잘 쓴다고 추천해 나는 보충대 생활 3일간 늘 행정반에서 행정 업무 보조를 하게 되니 나름대로 몸은 편하고 배곯지 않았다. 헌데 한 가지 아쉬움은 나와 함께 입대한 동기들은 모두 나보다 하루 먼저 논산훈련소로 팔려간 것이었다. 초조해진 나는 중대 기간병들에게 왜 난 배치를 안 시켜 주느며 빨리 보내달라고 주문을 했다.
그러니 중대 기간병네들이 네가 잘 몰라서 그런다며 너보다 하루 먼저 배출된 너희 동기들은 모두 부사관학교 병력이라며 널 하사관 학교에 보내지 않기 위하여 미룬 것이라며 하루 이틀 늦게 배치돼도 훈련소에 가면 동기들 다 만나게 된다고 안심을 시켰다. 그 후 논산훈련소에 배속받아 연일 이어지는 학과 출장을 하다 보니 정말 하루 이틀 먼저 훈련소에 배속된 입대 동기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매주 일요일 훈련소 군인 극장에서 만나 고단함을 달래며 고향이야기를 나누며 PX에서 먹거리도 사 나눠먹으며 즐거운 일요일 한때를 보냈는데, 그때가 겨울철이라 훈련병에게 방한모가 지급되었다. 그런데 일행 중 한 후배가 하루는 군인극장 화장실에서 엉덩이를 까고 볼일을 보는데 느닷없이 어떤 놈이 내 후배의 모자를 낚아채 도망을 갔다고 한다.
이런 일을 당하고 후배는 엉거주춤한 표정으로 나에게 달려와 방한모 잃어버린 이야기를 한다. 후배의 난처한 처지 이야기를 듣고 난감하기 짝이 없다. 그렇다고 섣불리 '방한모 잃어 버렸다'고 소리치면 내 후배는 훈련기간 내내 고문관 소리를 들어야 할 판이다. 하지만 난 평소 마음이 약해 타인을 상대로 해악한 행동을 저질러본 경험이 없어 후배의 곤란한 처지앞에 난감 짝이 없다.
그 시절 군대 다녀온 남자들은 다 아는 일이지만 훈련병이 보급품 잃어 버리면 그 사람은 훈련 기간 내내 고문관 소리 듣게 되고 나중에 무슨 수단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잃어버린 보급품을 보충해놔야 훈련을 마칠 수 있다. 그렇게 되니 더는 내 양심 같은 것 때문에 한 마을에서 같이 입대한 후배의 난처한 처지를 두고 나 몰라라 할 처지가 못되었다.
그렇게 되니 내 양심은 잠시 접어 두기로 하고 방한모 잃은 후배에게 무슨 수단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방한모를 구해줘야겠다는 일념에 또 다른 후배 한 명과 함께 열심히 군인 화장실 여기저기를 엿보며 큰일 보는 놈을 찾는데 다행히 기회를 포착하고 한참 뜸을 들이다 끙끙대며 큰일을 치르는 훈련병 모자를 위에서 잡아챈다. 그런데 황당한 일은 이 훈련병은 방한모 턱 끈을 잔뜩 졸라매고 큰일을 보고 있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위에서 모자를 챘으니 훈련병은 큰일 치르다 졸지에 훈련소 화장실 바닥에 나자빠진 것이다. 재래식 화장실 똥통으로 빠져 들어갈 뻔한 것을 겨우 면하고 쩔쩔매는 꼴을 보고 우리는 도망쳐 얼마나 배꼽을 잡고 웃었는지 모른다. 그렇게 한번 경험을 하고 나니, 우리나라 속담에 '바늘도둑이 소도둑' 된다더니 이번엔 간덩이가 부었는지 한결 대범해졌다.
좌석에 않아 영화 관람을 하는 일부 병사들 뒤쪽에 콩나물시루처럼 빽빽이 서서 정신을 팔고 영화관람을 하는 훈련병 중 방한모 턱끈을 묶지 않는 훈련병을 골랐다. 드디어 기회를 만나 영화에 정신팔려 구경하는 훈련병 뒤에 일행 중 후배 한 사람을 업드려 있게 하고 나는 그 훈련병 뒤에서 방한모를 낚아채니, 넋 놓고 영화구경 하던 훈련병 얼떨결에 뒤로 나 자빠지며 "내 모자!" 하고 소리를 지른다.
그런 사이 난 벌써 다른 곳으로 도망가 방한모를 야전 잠바 상의 속에 집어넣고 범행 현장에 나타나니 영화 관람을 하던 훈련병들 너도나도 방한모 끈을 조이며 단도리를 하는 바람에 모자를 도둑맞은 그 훈련병은 울상이 되어 허둥대고 있다. 그 모습을 보며 사람의 도리가 아니란 생각을 하며 반성을 했지만 내 후배가 방한모를 잃고 고문관 소리 안 듣게 된 것만 천만다행이라 생각하며 죄책감을 덮어 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40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 그 시절 논산훈련소 훈련병 시절 생각하면 낼 모래면 고희를 바라보는 나인데도 아직도 나 혼자씩 웃음을 참지 못한다. 그런데 안타까운 일은 그렇게 방한모를 훔쳐 논산훈련소 훈련병 생활을 끝낸 후배는 강원도에서 병영 생활을 마치고 무사히 전역하고 고향에 돌아와 결혼해 가정을 이루고 살다 무슨 병으로 젊은 나이에 먼저 하늘길을 떠나고 말았다.
그때 그 시절 논산훈련소 화장실에서 큰일 치르다 방한모 도둑맞은 그 훈련병께 42년이 지난 인제야 진심으로 머리 숙여 진심으로 사과를 드리고 가능하다면 '사과주(謝過酒)'라도 한턱 내고 싶다.
* 이글을 보시는 분들중 1969년 12월 하순경 논산훈련소 '군인극장'에서 영화 관람하다 화장실에서 '방한모' 도둑맞은 분 계시면 연락 주세요. '사과주 [謝過酒]' 한턱내겠습니다.
* 그 시절 논산훈련소 화장실은 큰일(대변) 볼 때 머리만 가릴 정도로 높이가 얕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