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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로왕비릉과 구지봉은 거의 평행선 수준이다. 구지봉은 삼국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산성이 있는 해발 360m 분산(盆山)의 능선이 김해 시내 중심부로 내려와 마지막으로 뚝 떨어지는 자리에 있다. 이름에 봉(峰)자가 들어 있기는 해도, 답사자가 오를 때 실제로 느낄 수 있는 체감으로는 그저 들판을 걷는 것과 같을 뿐이다. 이미 파사탑 앞의 계단을 거쳐 수로왕비릉 앞에 머물렀다가 거의 내리막과 같은 길을 걸어 구지봉 정상에 닿기 때문이다.

김해 역사유적의 뿌리, 구지봉

구지봉은 수로왕이 하늘에서 내려온 탄강지(誕降地)이다. 따라서 수로왕릉, 수로왕비릉, 초선대, 은하사, 장유암, 봉황대 등등 김해의 모든 유적지의 뿌리가 된다. 구지봉과 수로왕에 얽힌 설화와 무관한 답사지는 없다.

구지봉 정상부를 둘러본다. 원형의 맨 땅을 가운데에 두고 역시 둥글게 소나무들이 둘러싸고 있다. 가운데의 둥근 땅이 모래로만 채워져 있으면 그저 작은 씨름장이 아닌가 여겨질 그런 풍경이다. 봉우리가 낮은데다 면적도 좁아서, 하늘에서 여섯 개의 알이 내려와 각각 왕이 되는 건국설화가 깃든 성지(聖地)로는 기대에 못 미친다.

 구지봉 아래에 세워져 있는 '영대왕가비'의 글씨로 보는 구지가
구지봉 아래에 세워져 있는 '영대왕가비'의 글씨로 보는 구지가 ⓒ 정만진

하지만 구지봉과 같은 역사유적지에서 그런 실망감만 맛보고 돌아서서는 안 된다. 경치를 즐기러 온 것이 아니라 역사와 설화의 현장을 마음으로 느껴보려고 왔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는 무엇보다도 금관가야의 건국신화를 꼼꼼하게 재차 상기하는 시간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앞에서 수로왕과 관련되는 '이야기'들을 두루 살펴본 것도 그런 이유에서이다.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내놓지 않으면
구워서 먹으리

후세 사람들은 이 노래를 한시로 번역하여 남겼다. 아직 한글이 만들어지기 이전이었으므로 한역(漢譯)을 할 수밖에 없었다.

龜何龜何 (구하구하)
首其現也 (수기현야)
若不現也 (약불현야)
燔作而喫也 (번작이끽야)

김해 사람들은 이 노래를 부르면서 왕의 천강(天降)을 환영했다. 왕의 이름은 구지가(龜旨歌)의 내용을 그대로 채택하여 수로(首露)로 정했다. '머리首'에 '드러날露'이니 '머리를 내놓다'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거북아 거북아'는 '수로야 수로야'의 뜻이다.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는 '수로야 수로야 우리의 왕이 되어 다오'라는 말이다. 그래서 구지가는 신(神)과 같은 임금[君], 대왕(大王)을 환영(迎)하는 노래[歌]라는 뜻에서 영신군가(迎神君歌), 영대왕가(迎大王歌)라는 다른 이름도 가지게 된다. 신성한 동물 거북은 이 노래에서 백성들의 앞날을 위해 하늘이 내려준 존귀한 왕이 되었다.

 구지봉 정상
구지봉 정상 ⓒ 정만진

주술적 언어 구지가, 노동요이자 집단 서사 무요

사람들은 '만약 머리를 내놓지 않으면(우두'머리'인 왕이 되지 않겠다면) 구워서 먹겠다'고 거북을 위협한다. 물론 이것은 말 그대로 협박은 아니다. 어린 아이가 제 엄마에게 '과자 안 사주면 연필 부러뜨릴 거야' 하는 식이다. 그만큼 자신의 소원이 간절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위협적 언사(言辭)를 썼다고 보면 되겠다. 논리적이거나 합리적이지 못한 이런 원시시대적 언사를 주술(呪術)적 언어라고 한다.  

구지가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집단 무요(舞謠)이자 노동요(勞動謠)이며, 또 서사시(敍事詩)이다. 그렇게 규정하는 근거는 <삼국유사>에 나오는 기록 때문이다. 구지봉에 모여든 김해 사람들에게 수로왕이 하늘의 목소리로 말한다.

"하늘이 나에게 이곳에 나라를 새로 세우고 임금이 되라고 명령하셨다. 그래서 내가 일부러 여기에 내려온 것이다. 너희들은 산봉우리 꼭대기의 흙을 파면서 노래를 불러라.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어라. 만일 내밀지 않으면 구워먹겠다' 하고 노래하면서 춤을 추어라. 그러면 곧 대왕을 맞이하여 기뻐 뛰놀게 될 것이다."

 구지봉 정상위 고인돌에 새겨져 있는 한석봉의 글씨
구지봉 정상위 고인돌에 새겨져 있는 한석봉의 글씨 ⓒ 정만진
'너희들'이니 집단이다. '땅을 파면서' 노래를 불렀으니 노동요이다. '노래하면서 춤을' 추었으니 무요이다. 국가 건설의 신화가 들어 있으니 서사시이다. 소원을 빌면서 뒤에 가서는 위협도 하니 이는 현대종교적 인식이 아니라 원시시대의 신앙세계를 보여준다. 그래서 주술적이다.


고인돌에 남은 한석봉 선생의 글씨


구지봉에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실려 있지 않아 지금도 그 정체를 알지 못하고 있는 볼거리가 하나 더 있다. 시내를 바라보면서 누워 있는 고인돌 유적이 바로 그것이다. 고인돌은 정상부 중에서도 김해 시내가 가장 잘 보이는 남쪽 끝에 있다.

이 고인돌은 기원전 4∼5세기경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청동기 시대를 이 일대에서 보냈던 어떤 추장의 무덤인 듯하다. 하지만 아직 발굴 조사가 이루어진 적이 없어서 고인돌 아래에 어떤 유물이 들어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위의 큰돌은 마치 평평한 마루처럼 생겼는데, 크기는 240 * 210 * 100cm 정도이다. 큰돌 아래에는 여러 개의 받침돌[支石]들이 제대로 햇빛도 쐬지 못하는 채로 숨어서 위를 떠받들고 있다. 흔히 볼 수 있는 크기와 모양의 고인돌이다. 지구 전체의 고인돌 유적 6만여 기 중 무려 5만여 기가 남북한에 분포되어 있으니, 이 고인돌은 그 많은 것들 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구지봉 정상의 고인돌
구지봉 정상의 고인돌 ⓒ 정만진
하지만 이 고인돌은 자신만의 특이점도 지니고 있어 보는 이를 약간은 즐겁게 해준다. 고인돌 바로 옆에 세워져 있는 안내판의 끝 문장 덕분이다. '상석(上石)에 새겨진 龜旨峰石(구지석봉)이라는 글씨는 조선 시대의 명필인 한석봉이 썼다고 전해진다.' 한석봉(한호, 1543년~1605년)도 금관가야의 역사가 궁금하여 이곳을 찾았던 모양이다.

고인돌 앞에 서면 김해 시내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구지봉 바로 아래 남쪽으로 김해박물관이 보이고, 이어 수로왕릉, 봉화대 유적지가 눈에 들어온다. 멀리 김해평야 위로는 동쪽의 명월산(明月山)에서부터 서쪽의 불모산(佛母山)에 이르는 산줄기가 짙고 푸른 빛을 뽐내며 하늘을 가르고 있다. 명월산이라면 수로왕이 허황옥을 처음 만나 영접한 곳이다. 또 불모산 정상을 등지고 있는 계곡의 끝까지 올라가면 허황옥의 오빠 장유화상이 창건한 장유암에 닿는다.

허황옥이 '부처의 어머니'가 된 까닭은

불모산의 이름이 자못 호기심을 끈다. 부처[佛]의 어머니[母] 산(山)이라니? 석가모니의 어머니 마야부인은 출산을 위해 고향으로 돌아가던 중 룸비니 동산에서 아기를 낳았는데, 이곳 불모산에 마야부인이 나타난 적이 있다는 말인가.

허황후의 장남은 수로왕에 이어 금관가야의 왕좌에 올라 거등왕이 된다. 차남과 삼남은 어머니의 성씨를 이어받아 허씨(許氏)의 시조가 된다. 나머지 일곱 아들은 불모산에 들어가 외삼촌인 장유화상의 가르침을 받기 시작했고, 수도생활에 정진한 끝에 모두들 경상남도 하동군의 칠불사(七佛寺)에서 부처가 되었다. 이것이 바로 부처를 낳은 어머니의 산이라는 뜻의 불모산 산명(山名)이 생겨난 유래이다.

 장유암에서 바라본 신모산 방향의 풍경
장유암에서 바라본 신모산 방향의 풍경 ⓒ 정만진

덧붙이는 글 | 2012년 2월 중순에 다녀왔습니다.



#수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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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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