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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바퀴의 스위블 휠, 부드러운 핸들링, 안정된 승차감, 와이드 타이어에 의한 충격 흡수력, 3단계 등받이 시트.

자동차 묘사가 아니다. 수입 유모차에 대한 엄마들의 세밀한 제품 정보다. 국산 유모차에 비해 2배 이상의 돈을 지불해야만 살 수 있는 수입 유모차가 엄마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다. 제품 설명에서 짐작컨대 약간의 불편도 참지 못하겠다는 의지가 유모차 선택의 중요한 기준인 듯하다.

스토케 익스플로리(Xplory) 핑크 리미티드 에디션
 스토케 익스플로리(Xplory) 핑크 리미티드 에디션
ⓒ 스토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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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수입 유모차에 대한 관심은 단지 제품의 성능 차이에 의해서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남성들이 외제차에 열광하듯, 수입 유모차의 브랜드는 엄마들의 과시욕구를 충족시켜주는 수단이다. 혹은 남들과 비교해 초라해 보이지 않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하기도 한다.
보통 과시적 욕구를 자극하는 기업의 마케팅 수법은 '고가 전략'이다. 미국의 경제학자이자 사회학자인 소스타인 베블런(1857-1929)은 기업의 이러한 고가전략 마케팅을 재빨리 눈치챈 사람이다. 흔히 전통적인 경제학의 논리에 따르면 가격이 오르면 그에 따라 수요가 감소하고 수요 감소에 따라 가격이 하락하면서 시장이 균형을 스스로 찾아가야 한다.

그러나 소스타인 베블런은 그의 저서 <유한계급론>을 통해 당시 미국의 과소비를 비판하며 '상층계급의 두드러진 소비는 사회적 지위를 과시하기 위해 자각없이 행해진다'고 말했다. 그의 이 말은 과시적 소비재는 가격이 오를수록 수요가 증가하는, 쉽게 말해 비싸게 팔아야 더 잘 팔리는 제품이 있음을 설명한다.

기업들은 시장이 균형을 알아서 찾아가니 시장을 내버려 두라고 정부를 압박하면서도 균형점에서 이탈하는 이런 현상을 이용해 소비자들로 하여금 비합리적인 소비를 하도록 부추긴다. 가정경제가 빚의 수렁에 허덕이는 이때, 수입 유모차 시장은 기업들의 고가전략 앞에서 여전히 호황을 누리고 해외에서 판매되는 가격에 비해 2배 가까운 가격으로 폭리를 취하기도 한다.

언론의 은근한 소비자극

일부 언론의 기사에서도 수입 유모차에 대한 애정어린 설득을 자주 접할 수 있다. 기사들은 대개 '저출산 시대, 프리미엄 키즈제품 인기' 라든가 ' 럭셔리 키즈 대세' 등의 제목으로 모성을 자극해 내 아이만 초라해지지 않을까 불안하게 만드는 교묘한 광고성 기사들을 노출한다.

기사의 전개 방식은 마치 고가 제품 소비가 대세인 듯이 표현함으로써 제품을 쓰지 않는 엄마의 불안을 자극할 뿐 아니라 교묘히 브랜드를 노출하거나 제품의 장점을 객관적 설명인 것으로 가장해 홍보한다. 대략의 가격선을 알려주는 친절은 덤이다.

노르웨이 유아용품 전문업체 스토케가 생산하는 유모차계의 벤츠 '익스플로리'는 이미 신세대 엄마들의 필수용품. 기존 유모차와 달리 유아 시트를 부모의 눈높이에 맞췄고, 최대 170도까지 등받이 각도를 조절할 수 있어 아이가 유모차에서 완전히 누운 자세로 잠들 수 있다. 익스플로리는 백화점에서 170만 원대에 팔리는데 이조차도 수요가 너무 많아 종종 품귀현상을 빚는다. 익스플로리의 이런 인기에 힘입어 영국 버버리가 개발한 유모차 '잉글레시나 클래식'(190만 원), 콩고드가 출시한 '네오카본'(520만 원)도 반응이 좋다.

- '럭셔리 키즈는 먹는 물도 달라!' 기획기사 중, 2010.6.21, <주간 동아>

광고와 언론, 대형 할인점과 백화점, 인터넷 쇼핑몰과 블로그 마케터들, 우리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숨어 있는 설득자'들은 기어코 엄마들의 주머니를 터는 데 성공한다.

그 주머니에 넉넉한 돈이 들어 있다면 엄마들의 과시적 모성을 탓할 필요는 없다. 유모차에 아이를 태워 공원 한바퀴를 도는 동안만이라도 만족스럽고 행복할 수 있다면 굳이 개인의 소비 취향까지 나무랄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다만 엄마들의 주머니는 이미 신용카드 할부 영수증으로 가득차 있다는 점이 씁쓸한 것이다. 200여만 원의 디럭스형 수입 유모차를 12개월 할부로 구입하고 돌 잔치를 맞아 50여만 원의 절충형(접이식) 유모차를 마찬가지로 12개월 할부로 구입한다. 그나마도 성격 급한 엄마는 무겁고 커다란 디럭스형 유모차가 불편해 할부가 끝나기도 전에 절충형에 또 다른 할부를 끊는다. 

어린 시절의 빚, 성인으로 이어진다

물론 이것은 그리 심각한 문제라고 할 것까진 없을지 모르겠다. 아직 아이는 아무것도 모른다. 자신이 겨우 2년 남짓 타게 될 이동수단에 빚이 딸려 있고 그것을 갚기 위해 자신의 부모가 12개월 이상을 카드값 결제에 신경써야 한다는 것을 알 리 없다. 과시적 모성이 할부로 채워졌다는 것을 들킬 일이 없다는 이야기다. 조금씩 자라면서 소비에 관심을 보일 때 쯤에는 이미 어릴 때부터 쭉 모든 결제과정이 신용카드 즉 빚으로 해결되는 것만 보았기 때문에 엄마를 이상한 눈길로 볼일도 없을 것이다.

여기까지는 단지 씁쓸할 뿐 심각한 문제라고 호들갑을 떨 필요는 없다. 그러나 문제가 시작되고 있다는 것은 그냥 넘어갈 대목이 아니다. 어린 시절의 소비형태는 성인이 되었을 때 생각보다 심각한 영향을 미친다는 조사 결과가 있기 때문이다.

세계적인 브랜드 미래학자인 마틴 린드스롬은 뉴욕의 시장조사 및 비즈니스 전략 연구업체를 통해 그러한 조사를 했다. 그는 자신의 저서 <누가 내 지갑을 조종하는가>에서 그 조사내용을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어린 시절에 형성된 취향이 성인 시절의 소비 패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확인하기 위해 120개국 이상의 지역에서 수행한 연구 프로젝트를 기반으로 <포춘> 500대 기업의 70%이상, 그리고 세계적으로 영향력이 큰 다양한 조직들을 분석해 보았다. 그리고 총 2035명의 어린이 및 성인들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성인의 53%, 10대 청소년의 56%가 어린 시절에 경험했던 브랜드 제품들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어린 시절의 경험은 단지 브랜드 소비에만 국한되지 않을 것이다. 소비 결제 방식, 금융이용 방식 또한 어린 시절 부모의 카드 결제와 빚에 의존하는 모습을 간접 경험했기 때문에  소비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신용카드 결제는 고정된 관념이 되어버릴 위험이 크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지금의 어린이, 청소년들은 '돈이 없다'는 부모들의 말에 '카드 있잖아'라고 답한다. 버는 범위 내에서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카드만 있으면 소비가 가능하다는 믿음을 가지면서 자라고 있는 것이다. 맞벌이 부부 중에는 문구점이나 가까운 유기농 매장을 통해 아이들이 외상구매가 가능하도록 해둔다. 미리 매장에 부탁을 해 두고 일주일 단위로 아이들이 그동안 이용했던 외상을 결제해주는 식이다. 부모가 없을 때 급한 소비를 해결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고육지책인 것 같지만 이 또한 아이들에게 소비를 계획하는 습관 대신 일상적인 외상 구매에 익숙하게 교육하고 있는 셈이다.

카드와 외상은 이제 아이들에게는 자연스런 화폐의 종류로 인식되고 있을 것이다. 결국 어린시절부터 빚을 내서 소비하고 빚을 갚기 위해 일을 하는 왜곡된 소비와 일 개념을 학습하고 있다. 다만 직접 일을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갚는 고통을 경험하지는 않는다. 여기저기 숨어있는 설득자들의 집요한 감성조작으로 조금씩 자아가 생겨나기 시작하면서 명품 자동차 장난감에서 레고 시리즈와 같은 브랜드에 끌려가도록 만드는 것에 별 저항없이 길들여진다.

이 때문에 자라면서 부모와 경제적 갈등을 겪기도 한다. 사춘기가 되면 일명 '등골 브레이커'라는 여러 종류의 유행에 따른 브랜드, 명품들로 부모들의 속을 태우게 된다. 점점 아이를 키우는 것은 숨어있는 설득자들에 무방비한 소비와 온갖 사교육비로 인해 감당하기 어려운 경제 과제가 되어간다.

채무 인생의 쳇바퀴

그러다 조금씩 철이 들면서 20대가 되면 대학등록금이라는 무거운 재정적 형벌에 직면한다. 이미 사회 이슈가 되어 있는 대학 등록금은 부모의 능력 범위 밖에 있음을 모르는 자녀는 없을 것이다. 저소득, 서민 가계에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중상위 계층조차 대학 등록금을 빚 없이 해결하는 것이 만만치 않다.

더욱이 갈수록 경쟁과 효율을 강조하는 사회 구조 하에서 성과와 경력을 세일즈 하지 않으면 제자리도 못 지키는 세상이다. 중산층이라는 신분의 울타리는 이미 인원 초과인 상태인지라 언제든 녹슨 못과 허술한 실력으로 울타리 안의 약간의 영역이라도 지키려는 사람들은 쫓겨난다. 심지어 해외 유학과 화려한 경력 등 최첨단 장비로 무장한 신입들이 밀려 들어와 퇴출 시간마저 자꾸 앞당긴다. 40대 중반만 되어도 출근길 한숨이 절로 나오게 만들 정도로 중산층 퇴출의 압박은 일상적이다. 자녀를 대학에 보내기도 전에 비정규직으로 밀려나거나 비자발적 창업 시장으로 쫓겨나는 중산층들이 적지 않다.

대학등록금은 이제 신분과 계층을 떠나 소수의 부유층을 제외한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위협적인 사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등록금에 대한 정부의 입장은 아직까지 시장논리에 근거한다. 사회적으로 여러 비판에 직면하고 선거철마다 반값 등록금 정책이 반짝 등장하고 사라질 정도로 사회 주요 이슈가 되었음에도 기껏 내놓은 대책이 학자금 대출 제도의 개선 정도다. 소득으로 안되면 빚으로 해결하면 된다는 금융논리가 유일한 해법인 셈이다.

문제는 대학생이란 신분은 빚에 의한 소비를 별 부담없이 받아들여도 되는 나이에서 벗어나 빚갚기와 밥벌이를 동시에 해결해야 하는 미래를 구체적으로 실감해야 하는 청년층이란 점이다. 눈을 똑바로 뜨고 자기 발등에 떨어진 미래를 보니 돈을 벌자마자 빚부터 갚아야 하는 처지가 눈에 들어온다. 당장 문을 열고 나가면 청년실업이라는 매서운 칼 바람을 가르고 뚜벅뚜벅 걸어가야 하는데 등에는 빚짐까지 짊어졌다.

상당수 청년층이 그 빚짐을 견디지 못해 찬 바닥에 내동댕이 쳐지는 신세가 되고 있다. 취업 포털 잡코리아의 조사에 따르면(2009년 9월) 20-30대 직장인 867명 가운데 학자금 대출을 이용해 본 경험이 53.7%에 달했다고 한다. 그 중 84%는 아직 그 대출금을 갚지 못했거나 갚고 있는 중이라 응답했다.

그들은 그래도 등에 얹힌 짐을 힘겹게 매고 가는 중이다. 이미 그 빚짐에 눌려 다리를 후들거리며 비틀거리는 걸음을 겨우 떼고 있거나 아예 주저앉은 청년들이 많다. 2009년 6월 말 기준 학자금 대출 연체금 총액은 2263억 원으로, 2008년 말 1759억 원에 비해 6개월 만에 51.4%가 늘었다. 학자금 대출자 중에 금융채무 불이행자가 된 경우도 2006년 670명에서 2009년 1만 3804명으로 급증했다.

앞으로의 시간 또한 지옥같은 빚이 기다리고 있는데 벌써 지쳐 주저 앉을 수밖에 없는 지금의 20대, 이러한 비극에 정부와 사회가 여전히 시장논리 운운하는 것은 그야말로 대다수의 사람들을 가난에 옷자락 잡히게 만들기 위해 팔 걷어붙였다고 해석할 수 밖에 없다. 이쯤되면 국가란 현대판, 21세기형 노예를 사육하는 간수라고 해도 과도한 것이 아니다.

요람에서 일어나 혼자 앉을 만큼 자라 유모차에 태워지고 노스페이스를 교복처럼 입는 나이를 지나 교통카드 기능이 포함된 체크카드를 지갑에 넣을 세월을 살았지만 그만큼 빚이 아니면 숨만 쉬고 살아야 한다는 개그 소재같은 현실만 또렷하게 확인해 간다.

게다가 여기까지의 지독한 여정이 서막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더욱 섬뜩하다. 결혼을 앞두고 있고 결혼과 동시에 전세금과 출산비용, 양육비용과 교육비용 다시 빚의 싸이클이 시작된다. 안전한 울타리에서 밀려난 부모가 물려준 빚에 빚을 쌓는 야만적인 생애 순환구조에 갇혀 버렸다.


태그:#가계 빚, #수입 유모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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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계부채가 심각한 수준으로 악화되고 있다. 짧은 기간 동안 금리가 급격히 상승하면서 가계발 금융부실이 크게 우려된다. 채무자 보호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는 대한민국의 현실은 수많은 채무자들을 빚독촉의 고통으로 내몰고 있다. 채무자들 스스로도 이제 국가를 향해 의무만 강요받는 것이 아니라, 권리를 보호받을 수 있는 목소리를 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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