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릴라칼럼'의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들이 쓰는 2012 총대선 칼럼입니다. [편집자말] |
"뭐여. 미국판 '기다려 달라'네. 확인 좀 잘하지. 오바마 변명할 여지가 없군. 거기에 비하면 우리 '가카'는 얼마나 완벽해. 아직도 아니라잖아."
서울 핵안보 정상회의 첫날인 지난 3월 26일,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뒤 나눈 '밀담'이 그대로 마이크를 타고 흘렀다. 러시아가 유럽 미사일 방어방(MD) 관련 불만을 토로하자, 이를 달래기 위해 한 말이 꺼지지 않은 마이크를 통해 그대로 나간 것이다.
술자리에서 이 소식을 전하는 뉴스를 지켜보던 지인이 "이명박 대통령의 '기다려 달라'는 발언도 숨기고 싶은 밀담 아니었겠냐며 이명박 대통령이 한 수 위라고 해서 한바탕 웃었다.
앞서 2008년 7월 일본 홋카이도 도야코에서 열린 G8 정상회의에 참석한 후쿠다 야스오 일본 전 총리는 '중학교 사회과 학습지도요령 해설서에 다케시마(독도의 일본명)를 일본땅이라고 명기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고, 이에 이명박 대통령이 "지금은 곤란하다, 기다려달라"고 답한 것이 <요미우리신문>에 의해 폭로됐다. 당시 정부는 사실무근이라고 발끈했고, 소송까지 진행한 결과, 법원도 대통령은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며 정부의 손을 들어줬다.
그러나 <경향신문>은 지난 2월 20일 "<경향신문>이 입수한 위키리크스 미 외교전문을 보면 2008년 7월 16일 강영훈 주일 한국대사관 1등 서기관은 교과서 문제에 대해 이 대통령이 후쿠다 총리에게 '기다려달라'고 부탁했다고 말한 것으로 나와 있다"고 보도했다.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내용은 또 있다. 위키리크스에 따르면 이명박 대통령의 형인 이상득 의원이 버시바우 주미 대사에게 "이명박 대통령은 뼛속까지 친미, 친일이니 그의 시각에 대해서는 의심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 것으로 밝혀졌다.
하태경, 안병직, 신지호, 이영조, 송영선의 공통점
지난달 27일에도 우려스러운 일이 벌어졌다. 노다 일본 총리가 핵안보 정상회의를 마치고 출국한 시각, 일본 문부과학성은 독도가 자국 영토라는 주장이 강화된 고등학교 교과서 검정 결과를 발표했다. 물론 일본의 이런 억지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정작 우려스러운 건 우리 정부의 대응이 미덥지 못하다는 데 있다.
최근 불거진 하태경(해운대기장을) 새누리당 후보의 '독도는 분쟁지역'이란 발언은 이런 우려를 더욱 크게 만든다. 그러나 과거에도 일본의 식민사관을 미화하고 친일 청산 의지를 의심케 하는 논란은 여러 번 있었다.
앞서 새누리당이 강남갑에 공천했다가 논란이 일자 공천을 취소한 박상일 벤처기업협회 부회장은 자신이 펴낸 서적에서 독립군 활동을 '테러 단체 수준'이라고 비하했다. 또 신지호 새누리당 의원은 지난해 서울시 보궐선거 당시 "박 후보의 작은 할아버지가 사할린에 강제 징용됐다는 말은 거짓"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외에 구 한나라당 싱크탱크 역할을 하며 여의도 연구소 소장을 지낸 안병직 서울대 교수는 2006년 12월 6일, 한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일제시대 위안부 강제 동원 증거가 없으며 토지수탈도 없었다"고 주장해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런 발언을 한 이들의 역사 인식에 뉴라이트 정신이 있다는 것이 이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대체적 시각이다. 앞서 언급된 3명 이외에 이번 총선에서 새누리당 강남을 후보로 공천됐지만, '5·18민주화운동'을 '민중반란'이라고 '제주4·3항쟁'을 '폭동'이라고 표현해 낙마한 이영조 바른사회시민회의 공동대표, 일본 자위대 창설 50주년에 참석한 송영선 후보 등이 뉴라이트 정신을 표방하는 단체에 직간접적으로 연관돼 있다.
이명박 정부의 곳곳에 드리운 뉴라이트 그림자뉴라이트 계열 중 가장 큰 규모인 뉴라이트전국연합은 2005년 11월 결성됐으며 현재는 5공 시절 고문기술자로 악명을 떨치던 한나라당 정형근 전 의원이 상임의장을 맡고 있다. 2007년 대선에서 이명박 후보를 적극 지지·지원했던 뉴라이트전국연합은 전국에 16대 시·도 대표단과 기독교 등 13개의 직능별 활동기구를 두고 있으며, 각종 현안에 대체적으로 보수적인 입장을 내놓고 있다.
"그동안 우리 학생들은 우리 역사를 자랑스러운 역사로 못 배웠다. 우리 역사가 부끄러운 부분도 있긴 하지만 자랑스러운 부분이 더 크고 그것이 사실에 입각했다는 차원에서 이 책을 펴내게 됐다." - 뉴라이트 계열 교과서포럼 대안교과서 '한국근·현대사' 집필을 담당했던 서울대 박효종 교수의 YTN 인터뷰. 2008년 3월 24일
뉴라이트 정신을 표방한 각종 단체들이 만들어지면서 기존 역사 교과서가 좌편향이 심하다는 문제제기가 줄을 이었고, 2008년 뉴라이트 단체들이 중심이 된 교과서포럼이 대안교과서 <한국 근·현대사>를 출간했다. 아직 논란이 있어 일선 학교에선 사용하지 않지만, 이 교과서에 수록된 내용 대부분은 뉴라이트 인사들에 의해 반복적으로 주장되며 언론에 노출되고 있다. 최근 논란이 된 새누리당 하태경 후보의 '독도 분쟁지역' 주장도 뉴라이트 관련 인사들의 주장이나, 교과서포럼의 편향적인 역사관과 별반 다르지 않다.
교과서포럼 한국근현대사에는 식민지 근대화론이나 대한민국 정통성을 어떻게 볼 것인가 등 민감한 주제들이 보편화된 역사인식과는 다르게 서술되어 있다. 종군위안부 문제만 하더라도 미국군의 기록에 의존해 서술했는데, 종군위안부들이 큰돈을 벌게 해주겠다는 일본인들의 꾐에 속아 해외 취업에 지원하고 몇 백 엔의 전대금을 받았다고 썼다.
2004년 9월 MBC <100분 토론>에 나와 "정신대는 일제가 강제동원한 것이 아니라 당사자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한 상업적 매춘이자 공창제였다"고 한 서울대 이영훈 교수의 발언과 비슷한 맥락이라고 볼 수 있다.
이들이 촉발시킨 논란은 또 있다. 지금까지 대한민국 헌법에서 말하는 정통성은 상해임시정부로 보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그런데 이 책에는 국내에서 조직된 한성임시정부(집정관총재 이승만)의 정통성을 바탕으로 1919년 9월 다른 임시정부를 통합하여 상하이에서 출범한 통합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정통성이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런 시각에 대해 민족문제연구소 운영위원장인 이봉원씨는 "굳이 가장 나중에 만들어지고 실체도 없는 한성정부를 정통으로 내세우는데, 이는 이승만을 띄우기 위한 것"(<한겨레> 2010년 4월 12일자)이라며 비판한 바 있다.
이렇듯 우리 사회에 많은 논란은 불러일으킨 뉴라이트건만, 이명박 정권은 이들을 적극 옹호하고 관련 인사들을 등용해왔다. 뉴라이트 정책위원을 지낸 조전혁 새누리당 의원을 비롯해 한반도 선진화재단 싱크탱크원장 나성린, 자유주의연대대표 신지호 등은 18대 총선 때 새누리당의 공천을 받아 의원 배지를 달았다. 또 자유주의연대 조직위원장을 지낸 최홍재씨는 방송진흥위원회 이사로, 뉴라이트전국연합 상임대표였던 이석현 변호사는 법제처장에 임명되기도 했다.
2008년 8월 28일 뉴라이트연합 250명을 청와대로 초정한 이명박 대통령은 "고쳐야 할 것이 많고, 할일이 많지만 그래도 희망이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인맥과 철학에서 뉴라이트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던 이명박 정부이니, "기다려 달라", "뼛속까지 친미·친일"이라는 두 형제의 발언을 단순히 말실수로 볼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 수밖에.
박근혜 위원장 주변에 포진해 있는 뉴라이트 인사들
박근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도 별반 다르지 않다. 2008년 교과서포럼 한국근현대사 출판 기념식에 참석한 박 위원장은 "우리 청소년들이 왜곡된 역사 평가를 배우고 있다고 생각하면 정말 전율하지 않을 수 없다"면서 "이제 걱정을 덜게 됐다"고 대안교과서 출판의 당위성을 역설했다고 한다. 또 "이 책의 출판이야말로 후일 그 자체로 또 하나의 역사로 기록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서 "우리가 더욱 자랑스럽고 새로운 대한민국의 역사를 만들어가는 데 이 책이 큰 토대가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박 위원장 본인만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의 주변에도 이명박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뉴라이트 인사들이 포진해 있다.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박근혜 캠프의 선대위원장을 맡았던 안병훈씨는 교과서포럼이 만든 <한국 근·현대사>를 펴낸 기파랑 대표이자 전 <조선일보> 부사장이다. 또 박근혜 위원장의 싱크탱크 역할을 하고 있는 미래연구원에도 뉴라이트 계열 교수 다수가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뉴라이트 정신이 현 시대정신을 대변할 수는 없다. 검증 안 된 역사관으로 국가를 운영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이명박 정권 4년, 대한민국은 끊임없는 정체성에 혼란을 겪었다. 이명박 정부는 4·3항쟁, 4·19혁명, 5·18 민주화운동을 이념의 잣대로 몰아세웠다.
야당들이 사퇴를 촉구하는 하태경 새누리당 후보의 발언도 이런 왜곡된 역사인식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는 2008년 5월 8일 데일리NK에 "일제시대 우리 조상은 일본제국을 자신의 조국이라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높았다고 생각한다"며 "조국이 일본이었다면 조국이 참가하는 전쟁에 조국을 응원하는 것은 정상참작의 사유가 되지 않을까"라는 내용의 칼럼을 써 논란을 빚고 있다.
'색깔론'으로 사찰정국 위기에서 벗어나고자 안간힘을 쓰는 새누리당은 야당에게 정체성을 요구하기 전에 자기 정당의 정체성을 밝히는 게 먼저일 것 같다. 혹시 새누리당도 왜곡되고 삐뚤어진 역사관을 옹호했던 이명박 정권과 같은 역사관을 공유하는 것이 아닌지 의심스럽다. 야당에게 들이대는 검증 잣대의 절반만이라도 역사를 왜곡한 하태경 후보에게 들이대야 하는 게 진정한 공당의 자세 아닐까. "기다려 달라"는 '꼼수'의 역사관을 가진 이명박 정권과 다르다는 것을 굳이 증명하고 싶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