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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 카터 김은 1966년 12월 3일 김제리(안동김씨) 라는 이름으로 한국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김명혜라는 한국여성과 조 메클레인(Joe Mclain)이라는 주한미군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만 2살 때인 1968년 10월 7일, 그녀는 서울 동대문구 휘경동의 한 고아원으로 보내졌다. 그리고 다음 달인 1968년 11월 27일 덴마크로 해외입양됐다.

 

그랬던 메타 김씨가 덴마크로 보내진 지 43년 만에 처음으로 친어머니인 김명혜씨를 찾기 위해 지난 3월, 한국을 찾았다. 메타 김씨가 친엄마를 본격적으로 찾아 나선 것은 지난 1월 부터였다. 그 전에는 마음의 준비가 안 돼 있었고, 덴마크 양부모도 그녀가 친부모를 찾는 것을 망설였기 때문이다.

 

기자는 지난 3월 27일 메타 김씨의 요청으로 '뿌리의집'에서 그녀를 만났다. 다음은 그녀와 나눈 대화를 정리한 것이다.

 

메타 김씨의 친엄마 김명혜씨는 1938년 3월 15일 3남 2녀의 막내딸로 태어났고 김명혜씨의 가족은 양복점과 미장원을 운영하고 있었다. 메타 김씨는 "엄마는 아빠와 4년간 사귀었고 결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내가 태어났다고 합니다"라고 전했다. 

 

메타 김씨의 친부 조 메클레인(Joe Mclain)씨는 1943년 미국에서 태어났고, 친부는 그녀가 해외입양 보내질 당시인 1968년엔 미국으로 귀국하여 미육군에서 엔지니어로 복무하고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엄마는 한국에서의 혼혈아동인 내가 살면서 겪을 운명에 대하여 염려가 되어서 나를 해외 입양보내기로 결심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1951년부터 1977년까지 한국에서 자란 혼혈아동은 전부 270명밖에 안 되더군요."

 

내가 혼혈자녀를 두고 있는 아버지라 이 땅에서 혼혈아동이 겪는 온갖 차별과 멸시를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을 수 있었다. 우리사회는 언제나 피부색이나 문화가 다르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세상을 이룰 수 있을지(관련기사)...

"친엄마가 남긴 나에 관한 기록을 읽는 것만으로도 친엄마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느낄 수 있었답니다. 그러나 친부모 없이 이국에서 40여 년을 살아오면서 내 속에선 항상 내가 패배자와 버림받은 사람이라는 느낌도 항상 있었답니다."

 

그녀는 1991년부터 1993년까지 미국에서 그래픽디자인과 사진학을 공부할 기회가 있었는데 당시 친부를 찾기 위해 미국전역자협회 등을 방문하여 수소문했지만, 당시엔 친부의 이름과 그에 대한 기록이 없었기 때문인지, 결국 친부를 찾지 못했다. 2000년과 2001년에도 그녀는 1년간 미국언론사에서 일러스트레이터로 일할 기회가 있었는데 당시에도 틈만 나면 친부를 찾으려고 노력했지만 역시 허사였다. 그녀가 친부모의 사진을 구한 것은 불과 지난 달이었다.

 

지금은 전혀 그 뜻과 의미를 기억 할 수 없지만 입양 보내지기 전 그녀는 한국노래를 부르던 기억이 난다. 그녀의 덴마크 엄마 크리스틴(1939년 생)과 아빠 한스(1940년생)는 모두 교사였고 그녀가 입양되었을 당시 친자녀가 4명 있었다. 그러나 입양 보내진 지 1년 만인 1969년 입양부모는 이혼했다. 그 후 입양부모는 재혼했는데 당시는 너무 어려서 그런지 메타 김은 아무런 충격도 느끼지 못했다. 다만 자기와 다르게 생긴 백인들 가운데에서 혼자 혼혈아로 살면서 표현 할 수 없는 고독함을 느꼈다고 한다.

 

 

메타 김씨의 외로움은 10대에 그 극에 달했는데 당시 그녀는 자신과 같은 혼혈인종을 어디에서도 볼 수가 없었다. 당시엔 그녀가 좋아하던 TV에도 유색인종이 전혀 출현하지 않았다. 한 번은 자기가 살던 시골동네에 7-8세로 보이는 한국아이가 입양되어 왔는데 그 아이는 유일하게 백인이 아닌 아이었지만 혼혈아인 자기와는 또 다르게 보였다. 그래서 그녀 10대를 심한 고립감에 둘러싸여 지냈다고 한다.

 

지금은 덴마크 양부모들도 입양인들이 친부모 찾는 것을 적극 지원해주고 있다. 하지만 메타 김이 어렸을 때는 덴마크 사회에서 조차 입양아에게 친부모와 양부모는 병존 할 수 없는 존재처럼 여겨졌었다. 그녀는 해외입양인은 마치 뿌리가 잘린 나무와 같다고 한다. 인간으로서 항상 뭔가 허전하고 공허한 존재... 그래서 메타 김씨는 이러한 근원적 공허함을 음악과 예술을 통해 채우고자 노력한다. 그래서 그녀는 내년에 다시 한국을 방문하여 싱글맘과 혼혈아동을 위한 음악회와 사진전을 개최할 계획이다.

 

 

그녀는 19세에 덴마크에서 싱글맘이 되었다. 그러나 싱글맘인 자신의 친엄마와 자기의 생애가 달랐던 것은 정부와 사회의 반응 때문이었다고 한다.

 

"임신을 하는 과정이나 그 후에도 덴마크 의사, 공무원, 사회복지사들은, 한국에서 친엄마에게 그랬던 거와는 달리, 한 번도 내게 입양을 권한 적이 없습니다. 말로는 격려해 주고 경제적으로 내가 아이를 혼자서도 키울 수 있도록 충분하게 지원해 주었습니다. 한국에서도 싱글맘과 혼혈아에 대한 차별과 편견을 버리고 정부는 이들을 경제적으로 충분하게 지원해 주고 사회는 따스하게 맞아주는 날이 빨리 오기 바랍니다."

 

메타 김씨는 자신을 "인권가수"라고 불러달라고 당부했다. 이유는 그녀가 노래와 사진전을 통해 '티베트 독립', '미국과 덴마크의 소수인종차별반대'에 대한 캠페인을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해외입양인은 자기모습을 거울을 통해 볼 수 없는 사람과 같아요. 저는 친엄마를 너무나 만나고 싶습니다. 또 친엄마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합니다. 45년 전에 만졌던 엄마의 손을 다시 만지고 싶습니다. 도와주십시오. 엄마와 아기가 생활고, 사회적 차별 때문에 함께 살지 못하고 헤어지는 것을 방임하는 정부는 곧 인권을 침해하는 정부입니다. 한 여성이 싱글맘으로 사랑하는 아기와 함께 사는 것이 범죄인가요? 결혼과 무관하게 아기를 갖는 것, 또 한 아기가 탄생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소중한 일입니다. 그런데 왜 그 아기와 엄마에게 범죄자처럼 낙인을 찍나요? 엄마와 아기는 헤어지지 않고 함께 살 권리가 있고 정부와 사회는 그런 인간의 기본권을 지켜주어야 합니다."

덧붙이는 글 | * 메타 김씨를 알아보시는 분은 '뿌리의집'(02-3210-2451)으로 연락 바랍니다. 


태그:#입양, #김제리, #김명혜, #김성수, #메타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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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영국통신원, <반헌법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폭력의 역사], [김성수의 영국 이야기], [조작된 간첩들], [함석헌평전], [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 저자. 퀘이커교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한국투명성기구 사무총장, 진실화해위원회,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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