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혹(不惑)이 되어서야 세상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는 김인례(76) 할머니. 그의 삶은 지겹고 험난하기만 했다. 마흔한 살에 생이별하고 늘그막에 자궁암으로 저승 문턱을 밟아보기도 했다. 그러나 하늘은 무심하지 않았다. 인생의 '황혼열차'에서 만난 새로운 동반자와 신혼처럼 알콩달콩 살아가고 있어서다.
김 할머니와 만남은 이번이 두번째. 처음 만남은 작년 11월 16일 군산노인종합복지관(관장 정헌주) 3층 강당에서 열린 <추억의 여고시절> 연극을 통해서였다. 홍도 친구(경자) 배역을 맡은 김 할머니의 실감 나는 연기에 마음이 끌리기 시작했던 것. 어렵게 부탁해서 처음엔 두 분을 함께 뵙기로 약속했는데, 할아버지가 '아무리 생각해도 쑥스러워 나오지 못하겠다'고 해서 혼자 나왔단다.
"암 수술 후유증으로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못하고 택시만 타고 다니던 2002년 어느 날이었어요. 하루는 친구 문병을 가다가 기사에게 '즐기면서 운동을 해야겠는데 마땅한 곳을 아느냐?'고 물으니까 이곳(노인복지관)에 내려주는 거예요. 운동을 꾸준히 해야 건강을 찾을 수 있다는 의사 진단이 있었던 터라 댄스스포츠를 시작했죠. 운동을 시작할 때 64kg이던 몸무게가 지금은 49kg~50kg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노인복지관 탁구사랑 동우회 회원으로, 스포츠댄스 강사로 은발의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는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고 말하는 김 할머니는 1937년생으로 올해 일흔여섯이다. 그러나 호적에는 1942년생으로 올라 있단다. 자식 다섯이 3년을 넘기지 못하고 병사(病死)하니까, 출생신고를 두려워한 부모가 성장 가능성을 믿은 다음 호적에 올렸기 때문이란다. 그러한 사연으로 여섯째로 태어났으면서도 장녀가 되었다.
- 군산이 고향이신가요?"아니에요. 아버지는 완주군 삼례읍이고, 저는 충남 논산군 광석면에서 태어났어요. 참 아름답고 평화로운 마을이었지요. 낮은 구릉지여서 농경지가 많았어요. 다랑논 사이로 산길도 나 있고, 친구들과 노래하며 넘어다니던 고개도 있고, 수양버들이 늘어진 개천을 따라 4km 떨어진 학교를 오갔습니다. 그때는 엄마가 일본 여자인 급우도 있고, 솜바지 입은 아기 아버지 학생도 있었어요."
- 가난하던 시절에 학교 다니느라 고생이 많았겠어요. "해방(1945)되던 해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일본어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배웠습니다. 아버지 직장 관사에 살아서 생활은 그럭저럭 괜찮았는데 몸이 약해서 고생했어요. 어렵게 학교에 다니다 6·25전쟁 때 아버지 고향으로 피난해서 눌러살게 되었죠. 그러나 중고등학교는 아버지 직장을 따라 전학을 5~6회 다니다가 대구에서 여고를 졸업했습니다. 서울, 대전, 부산 여기저기 찍고 다녔죠.(웃음)"
- 언제 군산에 정착했나요?"고등학교 졸업하고 익산 군청에 근무하다가 스물여섯에 옥구(군산)로 시집을 왔습니다. (한참 망설임) 중매결혼을 했는데, 밖으로만 나도는 남편 때문에 모든 남자를 증오하게 되었어요. 서울은 깍쟁이들, 시골엔 마음이 곱고 착한 분들만 사는 것으로 알았는데, 남편을 보니 그게 아니더라고요. 어렵게 낳은 아이까지 죽어서 실망감이 더 컸던 것 같아요. (한숨) 결국 견디지 못하고 헤어졌고, 그때부터 세상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더군요."
마흔한 살에 남편과 갈라섰고, 부양할 자식도 없으면서 억척스럽게 돈을 모았다. 몇 년 후에는 등(燈) 만드는 작은 공장도 차렸다. 사장이 되니까 도와주겠다는 남자도 있었으나 마음이 끌리지 않더란다. 그럼에도 친구 보증서고 손해를 보거나 목돈을 떼이거나 큰일을 결정할 때, 사업이 갈림길에 섰을 때, 누군가와 경쟁할 때 약하다는 걸 자각하면서 외로움을 느꼈다고 한다. 김 할머니는 "그래도 이리저리 세파에 시달리면서 심신이 더 강해진 것 같다"고 말했다.
- 연극을 볼 때도 느꼈는데, 할머니는 감정이 풍부한 것 같아요?"오랜 시간을 혼자 살아서 그런지 모든 면에 긍정적이고 활달하면서도 외로움을 자주 느끼고 가을을 많이 탑니다. 여행도 혼자 다니는 것을 좋아하고. 시인처럼 표현은 못 해도 꽃잎이 휘날리면 가슴이 뭉클해지고, 그랬죠. 머리에 떨어지는 꽃잎이 내 처지와 같아서 서글퍼지기도 하고요. 겨울에 앙상한 가지를 보면 쓸쓸해지고 그랬어요."
- 제2의 인생을 시작한 동반자는 어떤 분인지요?"저보다 다섯 살 아래인데요. 사람들 앞에 나가서 상(賞) 받는 것조차 싫어할 정도로 내성적이면서도 말에는 위트가 넘칩니다. 유머가 없었으면 끌리지 않았을 거예요. 일흔이 넘어서도 남자를 조심하고 멀리하는 성격이 바뀌지 않았었는데, 그분의 유머가 제 마음을 돌려놓았지요."
- 노년에 동반자와 함께 지내면서 느끼는 점은? "작년 10월 30일 합해서 동지처럼, 친구처럼 지내고 있어요. 집에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든든하고, 많이 웃으니까 좋아요. 혼자 지낼 때는 TV 아니면 웃을 일이 없었거든요. 30대 후반의 딸이 둘 있는데 너무너무 잘해주어 고맙고 행복합니다. 낼모레가 팔십이어서 그런지 '몇 달이라도 일찍 만날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듭니다."
- 독신생활이 몸에 익어서 불편한 점도 있겠는데요?"다시 살림을 시작한다는 자체가 짐이 되더라고요. 잠은 어떻게 자야 하는지, 혹시 코는 골지 않는지 모든 게 걱정이었어요. 혼자 있을 때는 귀찮아서 굶는 경우가 많았거든요. 그런데 합하니까 나는 굶어도 상대는 반찬 하나라도 챙겨줘야 하니까 신경이 쓰입니다. 그러나 바꿔 생각하면 그런 게 모두 행복인 것 같아요. 부딪치지 않으면 진보도 없으니까요."
- 혹시 첫사랑 안부는 알고 지내는지요?"(잠시 머뭇머뭇) 옛날 얘기는 하기 싫은데···. 몇 년 전 바람결에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어요. 헤어졌다고 하지만, 마음이 짠했습니다. '첫사랑이 못 살면 마음 아프고, 잘 살면 배가 아프고, 살자고 하면 골치 아프다'는 얘기도 있잖아요. 꼭 그 심정입니다."
- 새로운 동반자는 어떻게 만나셨는지? "세상 인연이란 묘해요. 원래는 2년 전 죽은 부인과 오래전부터 친하게 지냈거든요. 저보다 10년 아래인 부인이 'B형 간염'으로 고생할 때였는데 제가 친언니처럼 좋다며 따랐죠.
그렇게 자매처럼 지내다 5~6년 전 가족들까지 알게 되었고, 그때 남편과 인사를 나누었죠. 부인이 죽음을 앞두고 제 손을 꼭 잡더니 '나는 언니를 믿어, 언니가 있으니까 마음이 든든해'라고 할 때는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어요."
동반자를 만나게 된 사연을 얘기하던 김 할머니는 "지금도 '언니를 믿어' 소리가 귓가에 맴돈다"며 북받치는 감정을 참지 못하겠는지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평소 사색(思索)을 좋아했다는 김인례 할머니. 그의 눈물은 영겁의 세월 동안 쌓이고 쌓인 '슬픈 눈물'이 아니라, 황혼의 로맨스를 즐기면서 나오는 '행복의 눈물'로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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