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다인면 답사지도 (1) 대곡사 범종각 (2) 대곡사 다층석탑 (3) 대곡사 대웅전 (4) 대곡사 명부전 (5) 김제균 효자각 (6) 효천지 (7) 조성지 연꽃 (8) 회나무 군락지
다인면 답사지도(1) 대곡사 범종각 (2) 대곡사 다층석탑 (3) 대곡사 대웅전 (4) 대곡사 명부전 (5) 김제균 효자각 (6) 효천지 (7) 조성지 연꽃 (8) 회나무 군락지 ⓒ 정만진


경상북도 의성군 '다인'면은 본래 '다기' 혹은 '달기'였는데 757년(신라 경덕왕 16) 땅이름을 중국식으로 바꿀 때 '多仁'이 되었다. '달구' 또는 '달구벌'이 '大丘(대구)'로 바뀐 것과 비슷하다. 뜻과는 상관없이 비슷한 소리를 가진 한자로 바꾸되,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좋은 의미를 가진 글자를 선택한 것이다. 아기가 태어났을 때 이름을 짓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훌륭한 뜻의 이름을 가진 사람은 아무래도 그에 어울리는 행동을 하려고 애쓰게 된다. 마찬가지로, 좋은 의미의 이름을 가진 지역도 그에 걸맞게 발전하려고 노력하게 된다. 그래서 다인면은 지금도 면훈(面訓)을 '어질고 화합하는 다인면민이 되자'로 정했고, 그런 사람들이 모여 서로 도와가며 어질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비봉산 골짜기의 고찰 대곡사, 다인면의 자랑

다인은 대곡사(大谷寺)를 자랑하는 곳이다. 동쪽으로는 독점산, 문암산, 곤지봉으로 이어지는 산맥이 빈틈없이 안사면과 경계선을 이루고 있고, 서쪽으로는 579m 비봉산이 낙동강을 가로막고 있으니, 그 틈바구니에 큰[大] 골짜기[谷]가 생기는 것은 자연의 이치이고, 바로 그 골짜기에 이름 높은 절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런데 대곡사는 다인면의 거의 맨 북쪽에 있다. 어떻게 그리로  갈 것인가. 안사면 쌍호동 3층석탑에서 지금까지 온 길을 되돌아 안사면 사무소까지 가서, 다시 고개를 넘어 안계면 사무소를 지나, 거기서 오른쪽으로 북녘을 향해 단북면 거의 전역을 통과한 다음, 도적들이 사람을 너무나 많이 죽여 피비린내가 '비릿'하게 풍긴다는 '비릿'재를 넘는 40km- 100리를 달려 대곡사로 간다는 것은 정말 어불성설이다. 그 길 곳곳에 있는 역사유적과 문화유산을 하나도 보지 않고 대곡사만 보려고 질주를 해서야 '정신없는' 답사자로 낙인찍힐 일 아닌가.

낙동강이 바로 눈앞이니 안동시로 들어가 구담교를 건넌다. 다리를 건너자마자 서쪽으로 길을 틀어 낙동강변을 5km가량 가면 다시 의성군으로 넘어가는 지인교를 건넌다. 지인교는 안동시 '지'보면과 의성군 다'인'면을 잇는 다리이다. 다리에서 2km 남하하면 삼거리가 나온다. 그 삼거리에서 동쪽으로 좌회전하여 비봉산 자락과 낙동강 사이로 난 굽이굽이 산길을 타면 4km도 가지 않아 대곡사가 나타난다. 쌍호동 3층석탑에서 이곳까지 온 길을 다 합해도 안사, 안계, 단북으로 돌아가는 길에 견주면 절반도 채 안 된다. 짧고, 처음 밟는 길이니 당연히 이 여정을 선택해야 한다.

이 길은 또 비봉산의 빼어난 자태를 고스란히 감상할 수 있는 미덕도 지녔다. 견훤이 성을 쌓은 적도 있는 비봉산(飛鳳山)은 동쪽에서 볼 때 봉(鳳)황이 날개를 활짝 펼친 채 날아가는[飛] 듯 보인다고 해서 그런 이름을 가지게 되었는데, 북쪽에서 보면 또 다른 웅장함을 보여준다. 바로 옹골찬 장군의 기상이다. 이 웅장한 모습을 즐기려면 반드시 산의 북쪽 낙동강 언저리를 지나가야 하는 것이다.

 대곡사 범종각
대곡사 범종각 ⓒ 정만진

대곡사에 들어서면, 고색창연한 범종각(梵鐘閣)이 맨 먼저 답사자의 눈길을 강력하게 사로잡는다. 유형문화재 161호인 이 건물은 검은 듯 짙은 회색인 듯 좀처럼 가늠이 가지 않는 묘한 느낌의 빛깔부터가 사람을 아득한 과거의 세계로 안내하는, 다포계(多包系) 양식의 팔작 지붕으로 건축된 중층(重層) 누각이다.

공민왕 때 지은 범종각, 종은 없지만 이름은 여전히 '종'각

처마 끝의 무게를 받치기 위하여 기둥머리에 짜 맞추어 댄 나무쪽을 공포(拱包, 또는 貢包)라 하고, 이 공포를 기둥머리 위와 기둥과 기둥 사이의 공간에 짜 올린 것을 다포라 한다. 옛날 나무건물을 지붕 아래에서 위로 쳐다볼 때 반듯반듯한 목재들이 복잡하게 박혀 있는 것을 보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다포이다. 이 기법은 주로 조선 전기부터 많이 썼다.

팔작(八作)지붕은 합각지붕이라고도 하는데, 지붕의 윗부분 절반은 건물 모서리가 추녀(처마 네 귀 끝의 번쩍 들린 서까래) 없이 용마루(지붕 가운데에 있는 가장 높은 수평 마루)까지 삼각형 모양의 벽을 이루고, 그 아래 절반은 네모꼴로 된 지붕을 말한다.

안내판에는, 이 건물이 고려 공민왕 17년(1368)에 처음 건립된 후 정유재란(1598년, 선조 31) 때 대부분 소실되었고, 동왕 38년(1605)에 탄우대사, 숙종 13년(1687)에 태전선사가 각각 중창(重創)했다고 전한다. 오늘날 보는 범종각은 1978년에 보수한 건물이다.

범종각에는 종이 없다. 종이 예천군 용문사로 옮겨져 보관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종을 보러 온 것이 아니라 범종각을 구경하러 온 것이니 서운해 할 것은 없고, 범종각 바로 옆에 새로 지어진 종각에서 쇠종을 보는 것으로 만족하면 될 일이다.

 대곡사 대웅전
대곡사 대웅전 ⓒ 정만진

범종각을 지나 올라가면 정면에 대웅전이 보인다. 유형문화재 160호인 이 건물은 고려 공민왕 17년(1368)에 처음 건립된 후 조선 선조 31년(1598) 정유재란 때 대부분 소실되어 동왕 38년(1605)에 탄우대사와 숙종 13년(1687) 태전선사가 중창하였다고 전한다. 출생, 사망, 재탄생의 '인생' 경로가 범종각과 너무나도 똑 같다. 물론 공포를 배치한 다포계(多包系) 양식의 불전(佛殿)으로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는 점도 같다. 안내판은 '조선 중기의 특징이 나타나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몸을 돌리면 명부전(冥府殿)이다. 명부전은 흔히 지장전(地藏殿)이라고 하는데, 법당 안에 지장보살을 모시기 때문이다. 불교에서 죽은 뒤 심판을 받는 곳을 명부(冥府)라 하므로, 명부전은 죽은 뒤 명부에 갔을 때 '좋은 판결'을 받기 위해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지키면서 모든 중생을 바른 길로 이끄는, 부처가 되기 이전에 도를 닦고 있는 보살'인 지장보살에게 비는 법당인 셈이다.

대곡사 명부전은 문화재자료 439호이다. 문화재자료이므로 유형문화재인 범종각과 대웅전보다는 등급이 낮다. 그런데 안내판을 보면 범종각이나 대웅전처럼 '정유재란' 때 불에 탄 것이 아니라 '임진왜란' 때 변을 당했다고 되어 있다. 하지만 우리가 흔히 처음의 임진왜란과 그 뒤의 정유재란을 뭉쳐서 모두 '임진왜란'이라고 말한다는 사실을 생각해 볼 때 명부전도 아마 정유재란 때 함께 불에 탔을 것이다. 물론 다시 지어진 것은 같다고 되어 있다. 

범종각과 대웅전 유형문화재, 명부전과 다층석탑 문화재자료

안내판은 '명부전의 건립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구조 및 형식과 형태는 오량, 맞배, 겹처마 집으로 17∼18세기 형식을 유지하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오량, 맞배, 겹처마의 뜻이 궁금하다.

나무집을 지을 때, 서까래를 받치기 위하여 기둥 위에 나무를 건너지른다. 그 나무를 도리라 하고, 지붕틀을 꾸미면서 다섯[五] 개의 도리[梁]를 쓰는 방법을 오량(五梁)이라 한다. 그리고 맞배(지붕)는 대웅전에서 본 팔작지붕 중 위의 삼각형 부분을 말한다. 겹처마는 처마 끝의 서까래 위에 짧은 서까래를 잇대어 달아낸 처마를 말한다.

 대곡사 다층석탑
대곡사 다층석탑 ⓒ 정만진
대곡사에는 대웅전, 범종각, 명부전 같은 건물이 아닌, 색다른 볼거리도 있다. 흔히 '다층석탑'이라 부르는 탑으로, 대웅전 앞에 있다. 탑이라면 으레 다층(多層)이지 1층탑도 있나 싶지만, 일단 문화재자료 405호인 다층석탑 앞에 서서 안내판의 내용을 읽어본다.

이 다층석탑은 기단부 45cm(화강암)와 탑신부 20cm(전판암 연화대좌), 탑신고 108cm만 남아 있고, 상륜부는 유실되었다. 현재 12층에 높이 173cm이지만, 6층과 7층 옥개석(屋蓋石) 간의 체감 비율 차이가 다른 층에 비해 급격한 것은 그 사이의 한 층이 없어진 것을 알 수 있으며, 원래는 옥신석(屋身石)을 갖춘 13층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각층 옥신석이 남아 있지 않고 옥개석도 부분적으로 손상을 입었으나 고려 초기 청석탑(靑石塔)의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을 뿐 아니라, 전국에 걸쳐 조사된 이런 종류의 탑은 12기 정도로 문화재적 가치를 지닌다.

안내판을 읽고 모양도 살펴보니, 팔공산 염불암에 있는 청석탑이 떠오른다. 하지만 팔공산의 것이 사방에 지붕까지 유리로 갇힌 채 거의 숨이 넘어가는 모양으로 '보관'되어 있는 데 비해, 대곡사 다층석탑은 맑은 공기와 시원한 바람을 마시며 한껏 '자유'롭게 살아가고 있어 보는 답사자의 마음이 편하다. 역시 있는 곳이 대곡(大谷)이다 보니 탑을 지키는 스님들도 대범한 모양이다.

이곳 대곡사와 팔공산 염불암의 탑을 청석탑이라 부르는 것은 그들이 청석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보통 청석이라 부르는 점판암은 응회암으로, 화산이 분출할 때 나온 화산재 따위의 물질이 굳어서 돌이 된 것인데, 푸른 빛을 내뿜는다. 넓게 잘 쪼개지고, 벼루를 만드는 재료라는 사실로도 짐작이 되지만, 갈아서 모양을 바꾸기 쉬운 까닭에 탑의 지붕을 만드는 데에 아주 적격이다.

고려 시대의 문장가 이규보가 1196년 8월 17일에 남긴 대곡사 탐방시가 전해지고 있다. 1960년에는 대곡사 부도 주위에서 통일신라 시대의 불상도 발견되었다. 청석탑도 11세기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따라서 대곡사는 고려 공민왕 17년(1368)에 지공선사와 나옹선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전하지만, 사실은 그 이전부터 이곳에 사찰이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 곳곳에 의상대사 '창건'사찰 너무 많다

우리나라에는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 하는 사찰이 너무나 많다. 따라서 이곳 대곡사처럼, 절이 창건된 연대를 마구 앞당기지 않는 것이 그 자체로 미덕이 된다. 통일신라는 불교국가나 마찬가지였으므로 전국 방방곡곡에 절이 지어졌을 것은 분명한 사실이겠지만, 그렇다고 그 많은 절들을 무턱대고 의상대사 혼자서 창건했다고 하는 것은 무리 아닌가.

의상대사가 짓기도 하고, 그의 제자가 짓기도 하고, 그를 존경하는 신도가 짓기도 했을 터, 대곡사 입구에 있는 '나한전 대시주 권회준(權會俊) 공덕비'와 '대곡사 적조암 극락전 진입로 대시주 엄희섭(嚴熙燮) 거사 공덕비'도 세월이 흐르면 그러한 사실을 증언하는 작은 유적이 될 것이다.

 효천지에서 바라보는 비봉산
효천지에서 바라보는 비봉산 ⓒ 정만진

대곡사를 떠나 남쪽으로 내려온다. '의성 학생야영장'을 지나면 삼거리가 나오는데, 오른쪽 고개를 넘는다. 직진하면 비릿재로 간다. 비릿재 고개의 '다인정'에서 안계평야 방면으로 바라보이는 넓고 시원한 경치를 감상할 수도 있지만, 오른쪽 길로 가야 김제균 효자각을 볼 수 있고, 또 효천지 창공에 뜬 비봉산의 장엄한 풍경과 물속에 잠긴 아름다운 그림자도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작은 고개를 넘으면, 1964년에 준공된 효천지가 눈에 들어오는 즈음에 마을로 들어가는 '송호 2길'이 왼쪽으로 나 있다. 그리로 들어가면 100m도 채 가지 않아 왼쪽에 서 있는 김제균(金濟均) 효자각을 만날 수 있다. 김제균 효자각 앞에 서면 대부분의 답사자는 '전국 곳곳에서 지금까지 본 효자각 열녀각 중에서 이만큼 깨끗한 곳은 처음 보았다!' 하고 탄성을 지르게 될 것이다. 그만큼 효자각이 말끔하게 관리되고 있다는 뜻이다.

김제균은 안동김씨로, 1796년 이 마을에서 태어나 1826년에 타계했다. 어려서부터 어버이를 섬길 줄 알아 칭찬을 들었지만, 불과 15세에 부친상을 당했다. 너무나 슬퍼하여 장례를 치르고도 산소 곁을 떠나지 않으면서 '아버지가 돌아오시지 않으면 나도 집으로 가지 않겠다'며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이에 숙부가 '네가 돌아가지 않으면 홀로 계시는 어머니는 누가 봉양하느냐? 그리고 깊은 산속에 짐승이 득실거리는데 노숙하다가 오히려 불효를 범하게 되면 어쩔 것이냐?' 하고 타일러 아버지의 혼백을 모시고 집으로 돌아왔다.

 효천지 옆 김제균 효자각
효천지 옆 김제균 효자각 ⓒ 정만진
몇 해 뒤 어머니의 병이 위독해져 갖은 약을 썼으나 결국 돌아가셨다. 그는 산소 곁에 여막(廬幕)을 짓고 3년 동안 울음을 그치지 않으니 마을 사람들이 그를 달래려고 밤에 산길로 몰려갔다.

그런데 큰 호랑이가 길에 드러누워 사람들을 막는 바람에 도망쳐오고 말았다. 이튿날 소식을 들은 그가 '어두워서 호랑이와 돌을 분간하지 못한 모양'이라고 했지만, 사람들은 호랑이가 그를 지켜주고 있었다고 믿었다. 그의 지극한 효성이 알려져 나라에서 마을 앞에 효자각을 세웠다.

깨끗한 효자각, 물 맑은 효천지

의성군 홈페이지에 '무수한 어족이 자생하여 공휴일에는 멀리 수백리 밖에서 차를 몰고 와서 휴식을 즐기는 유람지로 각광 받는 곳'으로 소개된 저수지가 있다. 김제균 효자각 바로 아래에 있는 효천지이다. 1964년에 둑을 쌓아 작은 못 자리를 지금처럼 커다랗게 만들었으니 '저수지'인 것은 분명하지만, 물 위 푸른 창공에 펄펄 살아 움직이는 기세로 떠 있는 비봉산을 보면 '이곳은 아무래도 "호수"라고 불러야 옳겠다'는 느낌이 저절로 일어나는 아름다운 연못이다. 물론 비봉산이 효천지에 비친 그림은  <의성 관광> 홍보책자에도 한껏 멋을 뽐내며 실려 있다.

효천지가 끝나면 곧 이어 다시 작은 연못이 나타난다. 연꽃으로 가득찬 이 예쁜 못 뒤쪽으로 들어가면 나이가 400년이 넘은 회나무들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는 언덕이 있다. 1976년 경상북도가 보호림으로 지정한 이 대단한 회나무숲은 여름이면 그늘을 마을 전체로 내려보내 온통 시원한 피서지로 만들어준다. 하지만 회나무숲이 끝나는 지점의 마을은 이름이 죽림(竹林)이다. 비봉산의 봉황이 이곳의 대나무 열매를 먹고 산다고 해서 마을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그것을 보면 아마 400년보다 더 옛날에는 회나무보다 대나무가 많았을지도 모른다.

죽림에서 1시간 30분을 곧장 오르면 비봉산 정상에 닿는다. <의성 관광> 홍보책자가 '비봉산은 다인면 북쪽에 위치한 해발 579.3m의 명산으로, 정상에 서면 사방 100리가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이 일품'이라고 소개하고 있으니, 그것을 보았다면 올라가보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물론 등산로 입구는 이곳 죽림마을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대곡사 일주문 옆에도 있고, 28번 국도에도 있으며, 대곡사 아랫마을인 새주막과 그 옆의 학생야영장에도 있다. 정상까지 오르는 데 걸리는 시간은 대략 비슷하다. 다만 대곡사에서 차를 몰고 적조암까지 가서 거기서 출발한다면 그 길은 다른 등산로의 절반밖에 안 될 정도로 가장 짧다. 하지만 대곡사에서 적조암까지는 그 자체가 사찰 경내이므로 자동차 소리를 내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답사여행은 가능한 한 걸어야 한다. 걸으면서[踏] 찾는[査] 여행, 그것이야말로 참된 답사이기 때문이다.


#의성여행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