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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군산의 유곽. 지금의 명산동 공용주차장에서 서해대학으로 가는 길목으로 보인다.
 1920년대 군산의 유곽. 지금의 명산동 공용주차장에서 서해대학으로 가는 길목으로 보인다.
ⓒ 군산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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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은 1920년대 중반 군산부(府) 유곽(遊廓) 거리. 일명 '신흥동 유곽'이다. 야산이 가로막고 있는 것을 보면 지금의 명산동 공용주차장 부근에서 촬영한 것으로 보인다. 강화도조약(1876) 이후 눈독을 들이던 일제가 조성한 도시답게, 호남에서 규모가 가장 큰 공창(公娼)이었다 한다.

신흥동(新興洞) 유곽에는 꽃장수와 당고(경단), 채소장수 등이 모여들어 인근 주민도 사 먹었다고 한다. 그 후 해방(1945)이 되고 일제가 물러나자 자연스럽게 시장이 형성되었고, 시대의 흐름에 따라 '유과꼬시장', '명산동 시장'으로 불리었다. 지방의 작은 도시 재래시장 이름 변화에서도 격세지감을 느낀다.
 
어렸을 때는 사람들 입에서 '유과꼬시장' 이름이 나올 때마다 '별 희한한 시장도 다 있다!'라고 생각했다. 콩나물과 두부 심부름하러 다녔던 고향동네 구시장(공설시장) 이름이 귀에 익었던 터였기 때문인데, 어른들에게 설명을 듣고 고개가 끄덕여졌다.

명산동(明山洞)은 본래 옥구군 북면으로 새롭게 일어나는 마을이라 해서 '신흥리'라 했는데, 1910년 군산부에 편입되었고, 지명변경에 따라 '6조통', '신흥동', 경정(京町), 전정(田町) 등으로 불리다가 1946년 왜식 동명 변경으로 '명산동'으로 부르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일제 때 유곽, 1960년대에는 등굣길

1920년대 군산의 유곽. 을씨년스럽고 황량하게 느껴지는데, 지금의 명산시장 입구에서 촬영한 것으로 보였다.
 1920년대 군산의 유곽. 을씨년스럽고 황량하게 느껴지는데, 지금의 명산시장 입구에서 촬영한 것으로 보였다.
ⓒ 군산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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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 역시 1920년대 신흥동 유곽으로 중절모를 쓴 남자 옷차림은 추운 겨울임을 말해주는 듯하다. 멀리 보이는 야산에 옹기종기 자리한 초가들은 1960년대 '유과꼬시장' 입구를 떠오르게 하면서 기자의 시공(時空)을 반세기 전으로 돌려놓았다. 중고등학교 시절 등굣길이어서 그런지 잃었던 물건을 우연히 주운 기분이 들기도 했다.

거리가 한적하다 못해 음산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1960년대에는 혼잡하고 시끌벅적한 시장 골목이었다. 노점상들이 도로변을 차지하고 있으니 길이 좁아질 수밖에. 산동네 어귀에 급우 어머니가 운영하는 반찬가게가 있었고, 이웃 국숫집에서 풍기던 구수한 멸치국물냄새를 기억하고 있어 더욱 진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사진에서 왼쪽 건물은 산월루(山月樓)와 방본루(芳本樓) 유곽, 오른쪽 2층 건물은 1925년경 일본에서 고급 목제를 가져와 지었다는 칠복루(七福樓) 유곽으로 추정된다. 대지 576평(1, 2층 각 90평)의 칠복루는 1949년 11월 11일 이전한 '군산 화교소학교' 교사(校舍)로 사용되다가 2002년 4월 7일 화재로 사라졌다.

일본 사람만 사용했었다는 우물. 한국 사람이 사용하던 우물은 진즉 메워졌다고 한다.
 일본 사람만 사용했었다는 우물. 한국 사람이 사용하던 우물은 진즉 메워졌다고 한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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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잡한 시장을 지나면 일인들만 사용했다는 우물이 있고, 골목을 벗어나면 '형무소고개'가 나왔다. 고개 오른쪽엔 경술국치(庚戌國恥) 직전 일제가 설치(1910년 6월)한 '군산형무소'(교도소)가 자리하고 있었다. 해서 재판을 받으러 가는 미결수들을 종종 만났는데, 처음엔 포승줄에 줄줄이 묶여 차에 오르는 모습이 얼마나 무섭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한일협정(1965) 반대 데모가 전국적으로 일어나던 해였다. 선배들은 "제2의 '을사늑약'이다!"라고 외치며 시위를 독려했고, 선생들은 압력을 넣으면서 막았는데, 호랑이 체육선생 아버지가 일제강점기에 '유과꼬시장'에서 큰 유곽을 운영했다는 소문은 충격적이었다. 당시 소문은 훗날 사실로 밝혀졌는데, 조선인이 운영하는 일본 유곽도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일본군 장교가 뜨면 조선인은 얼씬도 못 했지"

일제가 만든 중앙초등학교 정원의 연못. 어렸을 때 봤던 일본식 정원은 주택, 요릿집, 학교를 가리지 않고 비슷했다.
 일제가 만든 중앙초등학교 정원의 연못. 어렸을 때 봤던 일본식 정원은 주택, 요릿집, 학교를 가리지 않고 비슷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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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유곽은 보통 20~30명의 접대부(게이샤)가 있었으며, 50명 넘게 기거하는 대형 업소도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마당에는 일본식 석등이 세워진 연못이 있고, 다양한 모양의 바위와 괴석으로 치장한 정원에는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가이스카 향나무와 사철나무 등이 심어져 있었다고 한다.

유곽은 손님이 들어가면 나이가 듬직한 여인이 게이샤들 사진이 내걸린 거실로 안내하고, 손님은 마음에 드는 게이샤를 지목한 다음 소반에 차려나온 센베이과자와 차를 마시면서 기다렸다고 한다. 술상은 손님 요구에 따라 차려졌으며, 게이샤들이 샤미센(三味線)을 연주하며 흥을 돋우었다 한다.

세 가지 맛을 낸다고 해서 이름이 붙여졌다는 샤미센은 사각형의 납작한 통에 달린 지판(指板)에 비단실로 꼰 세 줄의 현을 친 것으로 통의 오른쪽 테를 오른쪽 무릎에 얹고, 왼손으로 지판을 받치면서 손끝으로 현을 누르며 발목(撥木)으로 연주하는 일본 전통악기라고.

송양규 어른이 옛날 유곽 출입구를 가리키고 있다.
 송양규 어른이 옛날 유곽 출입구를 가리키고 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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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산동 토박이 송양규(77세) 어른은 "올해로 34년째 사는 우리 가게와 이웃한 3층 건물도 원래는 2층으로 연결된 한 집이었다"며 골목이 된 통로와 중간에 잘려나간 2층 서까래, 색바랜 천장 등을 보여주었다. 이어 "마당에 우물과 정원이 있는 굉장히 큰 유곽이었다"면서 "한국 사람도 드나들었지만, 일본 고위층이 많이 다녔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옛날을 회상했다.
 
"이 건물(유곽)의 정문은 원래 이쪽에 있었고, 일본 고위층이 많이 왔었어. 금테 돌린 모자를 쓴 사람이 차에서 내리면 기모노를 화려하게 차려입은 여자들이 나와서 맞이하느라 굉장했지. 일본군 장교가 뜨면 헌병들이 보초를 서는 통에 조선 사람은 얼씬도 못했으니까. 철없을 때라 빠르고 절도 있게 움직이는 헌병들을 멋있게 봤던 것 같어···."

1934년 10월 군산역에 도착한 일본군 부대. 사진설명에는 한자로 ‘군산 숙영부대 군산역 도착’이라 적혀있다.
 1934년 10월 군산역에 도착한 일본군 부대. 사진설명에는 한자로 ‘군산 숙영부대 군산역 도착’이라 적혀있다.
ⓒ 군산일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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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화 10년(1934) 12월 군산일보사가 <榮光輝湖南>(영광휘호남)이란 제목으로 발행한 '조선 사단대항 연습' 기념사진첩을 보면 그해 10월 일본군 제19사단과 제20사단이 군산역에 도착하는 장면과 열병식, 그리고 군산, 장항, 익산, 전주, 정읍 등지에서 개시한 합동군사훈련 장면이 수록돼 있다.

송 어른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인들을 미워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첫째 이유는 일본 아이와 싸웠는데 부모가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 겨우 용서를 받았고, 둘째는 동네에 일본 사람이 사용하는 우물과 조선 사람이 길어다 먹는 우물이 따로 있는 것을 알고부터이며, 셋째는 한참 재미있게 놀아야 할 시간에 공원 아래에 있던 신사(神社)로 참배를 다녀야 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시민과 궤적을 함께 해온 유곽 건물들

일제강점기 신문에 보도되거나 군산부 지도에 등재된 일본식 유곽은 칠복루(七福樓), 명월루(明月樓), 방본루(芳本樓), 태평각(太平閣) 산월루(山月樓), 평남루(平南樓), 대월루(大月樓), 송월루(松月樓), 대화루(大和樓), 상반루(常盤樓), 군산루(群山樓), 송학루(松鶴樓) 등이다. 크고 작은 카페와 음식점도 있어 당시 신흥동 일대가 대규모 집창촌 지역이었음을 방증하고 있다.

그러나 유교적 윤리 체계에서 은근한 멋으로 술과 기예를 제공하는 기생문화에 익숙해 있던 조선 백성은 유곽을 강하게 거부하거나 터부시했던 것으로 보인다. 유곽에 출입하는 사람을 '쫄짜'에 비유해서 '조로야'(卒伍屋)라고 놀렸다는 하반영(96) 화백의 전언과 미두장(米豆場)을 배경으로 1930년대를 풍자한 채만식 소설 <탁류>에서도 '신흥동 갈보'로 표현하고 있어서다.

화선지에 썩은 먹물 번지듯 날로 번창하던 신흥동 유곽은 해방(1945) 후 미군정청의 공창제도 폐지방침에 따라 1948년 2월 막을 내린다. 그러나 건물들은 학교, 공장, 상점, 주택 등으로 이용되었으며, 한국전쟁(1950~1953)으로 피난민 임시수용소가 되었을 때는 한 건물에 30~40 가구가 입주하는 생활공간이 되기도 하면서 시민과 궤적을 함께해왔다.

황금알을 낳는 사업이었던 '유곽'
군산은 대한제국 황제 고종(1852~1919)의 칙령으로 1899년 5월 1일 개항한다. 그러나 허울뿐으로, 조선을 식민지화하려는 일제의 끊임없는 강요에 백기를 든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이는 개항 8개월 후 일본인 중심의 거류지회 설립과 '각국조계지'(총면적 17만 3천 평)를 통한 토지침탈 과정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일제는 치외법권 지역인 군산 각국조계지 관리를 주도하면서 경매권을 쥐고 땅장사를 시작했다. 대한제국으로부터 평당 30전에 사들여 중국인과 일인들에게 10원~20원씩 낙찰했으며 경매가격이 80원까지 오른 지역도 있었다 한다. 일제는 폭리에도 양이 차지 않았는지 낙찰가격에 지세(地稅)까지 부과해서 거두어들이는 횡포를 저질렀다.    

조선을 침탈한 일제가 주요 도시마다 유곽을 만드는 과정에서 군산은 신흥동 산수정(지금의 명산동), 팔마산 동쪽 평지(경장리), 경포리 부근(고속버스터미널 부근) 등 세 곳이 후보지로 올랐는데, 지주들의 치열한 경합 끝에 군산의 거부(巨富)로 소문난 사토오(左藤)의 소유지(신흥동 산수정)로 선정된다.

유곽 후보지 선정을 위해 일본 민단에 위원회가 구성되고, 논과 작은 저수지가 있던 신흥동 지역을 싼값에 사뒀던 사토오는 유곽이 들어설 5천 평을 일본 민회에 무상으로 기증하는 조건으로 다른 후보지를 물리치고 유치했다는 기록은 당시 유곽이 얼마나 황금알을 낳은 사업이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김중규의 <군산역사 이야기> 참고)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신문고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군산 유곽, #명산동, 신흥동, #일제강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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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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