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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1 <프로즌 플레닛> 다큐멘터리 한 장면.
 KBS1 <프로즌 플레닛> 다큐멘터리 한 장면.
ⓒ 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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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날을 조용히(?) 보내고, 남은 저녁 시간은 엄마네 집에서 무료하게 앉아 있었다. 이 시간을 유익하게 보내는 방법은 스마트폰을 꺼내서 SNS 활동을 하는 것이다. 페이스북에 들어가니, 마침 새 글이 하나 올라왔다.

내가 존경하는 조○○ 교수의 글이다.

"혹시 집에 계신 분은 KBS1의 <프로즌 플레닛>이라는 다큐를 보세요. 대단한 화면이고, 내용도 좋은 자연 다큐네요."

마침, 그 프로그램을 보며, 스마트폰을 꺼내 놓고 있었는데, 딱 올라왔던 것이다. 바로 댓글을 달았다.

"전 (한글)자막이 나오는 텔레비전이여야 볼 수 있어요. 여기(엄마네 집)는 자막이 안 나오는 텔레비전입니다. 저도 보고 싶은데...ㅠㅠ"

내가 단 댓글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내가 청각장애 6급이라는 장애 등급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청각장애 6급의 청력은 기본적인 소리는 다 듣는다. 정상적인 사람의 데시벨이 25~30이라고 하면, 나는 35~40 데시벨 정도 되는 것이다. 이 경우는 딱 잘라서 어디까지 들리고, 안 들린다기보다 사람의 발음이 정확히 안 들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에 전화를 하거나 텔레비전을 볼 때, 사람의 입모양을 보지 않으면 정확한 발음을 들을 수 없다. 텔레비전을 보려면 한글자막이 꼭 있어야 한다.

청각장애인도 다큐멘터리, 뉴스 등 자유롭게 보고 싶다

라인업 자막 들어가는 프로그램
 라인업 자막 들어가는 프로그램
ⓒ 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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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프로그램은 자막을 많이 넣는 편이라 그럭저럭 볼 수 있다. 하지만 뉴스나 다큐멘터리를 보려면, 내레이션의 목소리가 정확한 발음으로 들리지 않아 답답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청각장애인을 위한 자막방송 서비스를 시작한 게 13~14년 된 것 같다. 그때는 자막방송을 받을 수 있는 캡션이란 장치를 비디오에 연결해야만 자막이 나왔다. 그 뒤로는 텔레비전 자체에 자막을 받을 수 있는 장치가 내장되어 있는 것에 한해 자막이 나왔다. 여기서 또 한 가지 문제는 고화질 화면으로는 자막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텔레비전을 고화질로 바꾸고 나서 좋아했던 것도 잠시다. 고화질 화면에서 자막이 나오지 않는 걸 알고는 좌절하기를 수년, 어쩔 수 없이 자막이 나오는 아나로그 화면으로 텔레비전을 봐야만 했다. 그게 벌써 올해로 7년째다.

그런데 올해 2월 초에 뉴스를 보려고 하니, 갑자기 자막이 안 오는게 아닌가. 어찌된 일인가 싶어서 한국농아인협회의 홈페이지에 들어가 봤고, 케이블 텔레비전과 한국영상진흥원에 문의해 보기도 했다. 농아인협회에서는 협회 회원(나는 회원가입을 안 했다)에 한해 자막이 나오는 텔레비전을 보급한다고 했고, 케이블 텔레비전에서는 자막 수신용 캡션이라는 개념을 잘 모르고 있었다. 한국영상진흥원에서는 기초생활수급자에게만 디지털방송 수신기를 달아 준다고 한다.

마지막 카드로 꺼낸 게 방송국이었다. 남편에게 부탁해 방송국에 전화해 보라고 했고, 방송국에서는 올해 말에 일괄적으로 아나로그 방송을 종료하는데 앞당겨 종료했다고 한다. 혹시, 난시청 지역이면 디지털 화면 수신기를 달아 줄 수 있다는 말도 덧붙이면서….

답답했다. 다른 건 몰라도 뉴스를 안 보고서는 못 사는 버릇이 있기에 더욱 더…. 매일 저녁만 되면 뉴스를 좀 보게 해달라고, 잘못없는 옆 사람을 타박하고 못살게 굴었다. 그 모습을 본 남편도 덩달아 불안해하더니, 며칠 후에 텔레비전 회사의 A/S센터에 문의를 했단다. 그랬더니, 요새 나온 텔레비전에서는 고화질 화면에서도 한글 자막이 나온단다.

자막 보니... "몇 년 묵은 체증 내려가는 기분"

'아!' 드디어 방법을 찾은 것이다. 바로 전자제품 대리점에 갔다. A/S센터에서 말한 대로 새로 나온 텔레비전에서는 한글자막이 나오는지 확인하려고 말이다. 대리점에는 새로 나온 LCD와 LED 텔레비젼이 화려한 자태로 선명한 화면을 뽐내고 있었다. (참고로, PDP 텔레비젼에는 자막기능이 없다).

"혹시, 자막 나오는 텔레비전 있어요?"
"아, 네에~ 자막이요? 그건 설정을 하시면 나옵니다. 이렇게요."

친절한 대리점 점원은 리모콘으로 이곳저곳을 누르며 '자막'이라는 설정에 가서 확인을 누르더니, 그 깨끗한 화면에서 한글 자막이 그대로 나오고 있었다. "아, 정말 살 것 같았다. 몇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기분"이었다고나 할까. 속이 뻥뚫린 그 기분은 느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그래, 바로 저거야!"

깨끗한 화면에 자막까지 나오는 텔레비전을 보니, 황홀하고 좋다. 당장 그것을 사서 집으로 가지고 오고 싶었다. 하지만 문제는 가격이 어마어마하게 비싸다는 것이다. 집에는 멀쩡한 텔레비전이 있는데, 단지 자막이 안 나온다는 이유로 버려야 하는 처지에 놓인 것도 그렇다. 새 텔레비전을 살 만큼의 예산도 잡혀 있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을 '그림의 떡'이라고 하는 건가? 무려 한 달 반 이상 뉴스를 보지 못해 답답했던 시간을 보내고, 드디어 방법을 찾았는데…. 눈 앞에 딱 걸리는 게 '돈'이라니! '돈이 원수'라는 말이 실감나기도 했다. 가계 사정을 뻔히 알고 있는 남편 역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 '미안해' 하는게 아닌가.

"에휴~ 내 팔자야."

그렇게 며칠을 또 버텼다. 자막 안 나오는 뉴스만 하염없이 바라보면서 답답한 마음을 억지로 감추고 말이다. 방법을 알게 되니, 더는 못 참겠더라. 3월 말의 여유로운 주말 오후였다.

"여보야, 새 텔레비전 사려면 너무 비싸니, 우리 그럼 황학동 벼룩시장에나 가볼까?"
"그곳에 나와 있을지 모르지만, 나왔어도 가격 차이가 크지 않을 거야!"
"그래도, 한번 가서 구경이나 해보자?"

집을 나섰다. 황학동 벼룩시장에서는 그동안 필요한 가전제품을 몇 번 구입한 적이 있다. 중고 미니 청소기도 샀고, 새 책장을 사기도 했다. 중고 텔레비전만 전문적으로 가져다 놓고 파는 골목을 둘러봤다. 나온 지 얼마 안 되는 새 것과 다름없는 중고 텔레비전도 있었다.

가격은? 역시 중고는 중고인지라 가격은 반 값보다 조금 윗선 정도. 자막이 나오는지 시험도 해 보고, 크기도 비교해 보고, 종류도 살펴봤다. 동네의 가전제품 대리점과 마찬가지로 나온 지 얼마 안되는 텔레비전에서는 자막설정을 누르자, 자막이 나온다.

이곳저곳을 더 둘러보고, 가격을 알아본 뒤 그냥 가려고 하니, 도저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남편의 얼굴을 한번 더 쳐다보고 통장 잔고를 생각했다.

"사자! 아까 본 것 말이야, 가격과 성능 보니까 괜찮던데 어때?"
"구경만 하고 간다고 했잖아? 돈도 없고…. 다음에 사!"
"난 오늘 샀으면 좋겠어. 여기까지 또 나오기도 귀찮고, 이거 사고 다른데서 소비를 줄이면 되잖아?"

망설이던 남편은 수긍하는 척하면서 처음에 '찜'해 뒀던 텔레비전 가게로 갔다. 가격 흥정을 했다. 이왕이면 좀더 큰 것으로 사기로 했다. 속으로 '크면 나야 좋지! 호호' 하면서 쾌재를 불렀다. 결국, LCD 47인치 텔레비전을 80만 원에 낙찰!

집에 도착하자마자 텔레비전을 켰다. 화면이 정말 끝내준다. 크기도 크지만 어쩌면 그렇게 선명하게 잘 나오는지…. 출혈이 좀 컸지만 잘 샀다고 생각했다. 마침 뉴스 시간이 되었다. 자막 설정을 하고 뉴스를 보는데, 아나운서의 말이 그대로 자막으로 나온다.

'아, 정말 얼마 만에 뉴스다운 뉴스를 보는지 모르겠다. 황홀경에 빠져 배고픈 것도 잊어 버리고 넋 놓고 텔레비전을 보았다. 너무 행복했다.'

자막 문제가 해결되니, 한국영화도 보고 싶다

영화 <도가니> 한 장면.
 영화 <도가니> 한 장면.
ⓒ 영화 <도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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첩첩산중이라고 했던가. 자막 문제가 해결되니, 이번엔 한국영화가 보고 싶다. 개봉관에서 하는 한국영화 역시 한글자막이 안 나온다. 작년 가을이었나, 장안의 화제가 되었던 영화 <도가니>를 청각장애인도 볼 수 있게 해달라고 청각장애인과 농아인들이 시위를 했다. 그래서 겨우 몇 개의 개봉관에 자막이 나오는 <도가니>가 상영될 수 있었는데, 나도 그때 보았다. 말로만 들었던 농아인 시설 비리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건 처음이었고, 자막 덕분에 한 개의 대사도 놓치지 않고 보았기 때문일까? 충격이 너무 컸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문제라니 놀랍기도 하고.

대부분 한국영화는 자막이 안 나온다.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고 흥행에 성공했던 영화들이 나에게는 언제나 '그림의 떡'이었다. 그동안 내가 한국영화를 봤던 방법은 따로 있었다. 개봉관에서 영화가 내려지면 불법 CD제작을 통해 길거리에서 판매되는 DVD를 사서 보는 것이다. 영화가 내려지기를 기다렸다가 만 원에 5장씩 파는 DVD를 한꺼번에 샀다. 그 CD에는 DVD 설정을 한글자막으로 맞춰 놓으면 한국영화임에도 자막이 나오기 때문이다.

한때 엄청난 흥행을 일으켰던 영화 <왕의 남자>, 수많은 사람들의 눈물샘을 자극했던 <우리생에 최고의 순간>, 김혜수가 그렇게 예쁘고 멋있을 수 없다는 <타짜> 등등. 사람들이 유행하는 영화를 보고 화제로 삼을 때, 나는 그 대화에 끼어들 수 없었다. 나중에라도 영화에 대한 대화가 나오면 기죽지 않기 위해 기어코 개봉관에서 내려진 영화를 집에서 혼자 DVD로 보았다. 언제 다시 겪게 될지 모르는 '소외감'에서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개봉되는 한국영화에는 꼭 한글자막이 나왔으면 좋겠다. 그날이 하루빨리 오게 하기 위해 광화문에 가서 1인 시위라도 해야 할까? "청각장애인과 농아인도 한글 자막 넣은 한국영화를 보게 해달라!"는 피켓을 목에 걸고서. 나도 최근에 개봉한 <은교>와 <건축학 개론>을 영화관에서 보고 싶다.


태그:#뉴스, #다큐멘터리, #한국영화, #청각장애인, #자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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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받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관심이 있다. 인터뷰집,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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