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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광주여 무등산이여…… 충장로에서 금남로에서/화정동에서 산수동에서 용봉동에서 …… 아아, 우리들의 피와 살덩이를/삼키고 불어오는 바람이여/속절없는 세월의 흐름이여 ……" (김준태,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 중에서)

1980년 6월 2일 자 <전남매일신문>에 실린 이 시(본래 109행의 시는 사전 검열 후 33행으로 줄여진 채 신문에 실렸다)에는 광주 곳곳의 지명이 새겨져 있다. 봄비가 갠 다음 날인 지난 15일, 그 많은 곳 중 '용봉동'을 찾았다. 그곳엔 전남대학교가 있다. 이곳에선 얼마나 많은 혼백이 "찢어져 산산이 조각나 버렸"(시 中)을까. 전남대 학생인 기자가 '5월의 전남대'를 들여다봤다.

5·18 최초 충돌지, '전남대 정문'에 서다

1980년 5월의 전남대 정문과 현재 전남대 정문.
 1980년 5월의 전남대 정문과 현재 전남대 정문.
ⓒ 5·18기념재단, 소중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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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대 정문은 5·18민중항쟁(이하 5·18)의 최초 충돌지라 불린다. 1980년 5월 17일 자정,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고 전국 대학에 휴교령이 내려지면서 '일'이 벌어졌다. 5월 18일 아침, 등교를 못하게 하는 계엄군과 이에 항의하는 학생들이 전남대 정문에서 맞닥뜨린 것이다.

용봉천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던 그들은 결국 충돌했고, 계엄군은 진압봉을 앞세워 학생들은 물론, 이를 말리려는 시민들에게도 무자비한 구타를 자행했다. 이 사건이 단초가 돼 저항은 본격화됐고, 이 때문에 전남대 정문은 지금까지 5·18 최초 충돌지로 '기억'되고 있다.

전남대 정문 앞에서 한 학생을 붙잡았다.

"혹시…."

말을 잇지 못했다. 내가 머릿속에 생각했던 질문이 너무 창피했기 때문이다. 원래 하려고 했던 "5·18에 있어서 전남대 정문이 갖는 의미를 알고 계신가요?"란 '박제된' 질문은 접어둔 채, "수업 있으세요?"라고 물었다.

"네"

"제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 5·18 때 여기서 처음 공수부대랑 학생들이 맞붙었다는 게 맞나요."
"저는 잘 모르겠는데…."

당시 전남대 정문 앞을 지나던 용봉천은 지금 복개되어 볼 수가 없다. 빠른 속도로 학교를 드나드는 차와 새롭게 단장한 정문 역시 당시를 떠올리는 데 도움을 주지 못한다. 그래서인지 전남대 정문이 5·18의 최초 충돌지라는 기억을 이젠 많은 이들이 공유하지 못하는 듯하다. 아니, 공유하기 어려운 것이 더 맞는 말이겠다.

"이젠 관현로를 관현로라 하지 않는다"

"정문도 공수부대의 방패에 막혀 문(門)의 제 기능을 하지 못 했다. 주인에게는 문을 열어주고 도둑에게는 문을 굳게 닫아야 하는 것이 문의 제 역할이건만, 당시 정문은 주인에게 문을 열어주지 못 했다."

2010년, 5·18 30주년을 맞아 발행한 <전대신문>(1457호, 2010.05.17)은 1980년 당시를 이같이 회상했다. 문의 크기도 커지고, 이젠 도둑도 들지 않지만 이젠 이 문에서 당시의 기억을 더듬기가 쉽지 않다. 당시 피를 흘려가며 들어가고자 했던 이 문을 느리게, 너무 쉽게 통과했다.

전남대 정문을 통과하면 눈앞에 긴 메타세콰이어 길이 펼쳐져 있다. 이 길의 이름은 관현로. 5·18 당시 전남대 총학생회장이었던 박관현 열사를 기리기 위해 이름 붙여졌다. 신군부에 맞서 저항하던 그는 1982년 체포되어 5년형을 선고받고, 옥중에서 단식 투쟁을 하다 같은 해 사망했다.

(사진 위쪽부터 시계방향으로)관현로, 5·18민중항쟁 사적비, 박관현 열사 혁명정신 계승비.
 (사진 위쪽부터 시계방향으로)관현로, 5·18민중항쟁 사적비, 박관현 열사 혁명정신 계승비.
ⓒ 소중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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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대에 입학했던 2006년, 여느 신입생과 다름없이 놀고, 먹고, 마시던 때가 있었다. 그러던 중 '조금은 진지해 보여' 비호감이던 한 선배와 정문까지 걸을 '기회'가 있었다. 그때 이 길이 관현로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 선배는 "왜 관현로인지 알아와"라고 과제를 부여하며 더 비호감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그 선배도, 관현로도 잊었다.

2009년 전역 후 <전대신문> 수습기자 시절, 캠퍼스를 돌며 사진을 찍으라는 과제가 주어졌다. 워낙 풍광이 좋아 정문 부근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데 문득 이 길의 이름이 생각났다. 그리고 왜 관현로인지 이곳저곳을 뒤져 알아봤다.  

그 선배가 그랬었다. 예전엔 관현로를 관현로라 했는데 이제 이 길을 관현로라 하는 이는 별로 없다고. 지금도 이 말은 유효하다. 기자도 그 선배와 <전대신문>이 아니었다면 왜 관현로가 관현로인지, 그 '관현'이 박관현인지 몰랐을 거다. 왜 그 비호감의 선배에게서만 관현로가 관현로인 것을 들을 수 있었는지, 더불어 '난 누구에게 한 번쯤은 비호감 선배인적이 있었는지' 생각해봤다.

관현로 초입에서 좌우를 둘러보면 5·18을 기억하기 위한 노력들을 볼 수 있다. 좌측, 조금 멀리, 나무들 사이를 통해 한반도 모양의 석조 조형물이 보인다. '박관현 열사 혁명정신 계승비'다. 우측으로도, 조금 멀리 보면 정문이 최초 충돌지란 것을 기억하기 위해 '5·18민중항쟁 사적비'가 세워져 있다. 하지만 이것들도 관현로와 처지가 다르진 않다.

5·18 이름 붙여진 학내 곳곳... 하지만 잊혀져 가는 그날

사실 지금 전남대는 '5·18주간'이다. 일주일간 총학생회 주도 하에 각종 전시나 행사가 진행된다. 하지만 취재를 진행하던 화요일까지는 여느 때와 다르지 않았다. 준비도, 참여도 미흡해 보였다. 월요일부터 진행되기로 한 사진전은 준비가 안 돼 차려지지도 못했고, 월요일과 화요일 예정돼 있던 묘역 답사는 참여 인원이 부족해 월요일에만 진행됐다. 화요일에 묘역답사를 참여하기로 한 기자는 이날 취재 일정을 예상보다 빨리 접어야 했다.

이튿날인 16일 취재도 정문에서 시작했다. 관현로를 따라 걸었다. 100m쯤 걷다 보면 전남대를 상징하는 용봉탑이 나온다. 용봉탑을 중심으로 원형 교차로가 형성돼 있는데 정문과 동문(후문)이 만나는 첫 지점이라 교통량이 많다. 용봉탑을 바라보고 좌회전을 하면 조그마한 숲길이 보인다. 관현로의 나무들이 규칙적인 데 비해 이 조그만 숲의 나무들은 제멋대로다. 때문에 햇볕도 들쑥날쑥 든다. 숲길에 들어서면 계단이 보인다. 숫자를 세며 계단을 올랐다.

'하나, 둘, 셋 … 쉰, 쉰하나.'

51개의 계단을 오르면 반대쪽으로 내려가는 8개의 계단이 또 있다. 51개와 8개의 계단. 그래서 여긴 '5·18계단'이다. 이 계단에 어떤 사연이 담겨 있는지는 잘 모른다. 그래서 5·18계단이라 칭하는 게 다소 억지스럽지만 우연치곤 신통하다.

더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은 뒤편 8개의 계단을 내려오면 바로 '윤상원 열사 기념조형물'이 보인다는 것이다. 사회대 앞 조그마한 숲에 턱에 손을 괸 모양의 이 조형물에만 볕이 들고 있었다. 1978년 전남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윤상원 열사는 그해 10월 광천공단에 노동자로 위장취업해 들불야학을 이끌었다. 이후 5·18 초기부터 시위에 참여해 마지막까지 항전하다 당시 도청 민원실 2층에서 계엄군의 총탄에 숨을 거뒀다.

1987년 6월 5·18광장에서 열린 이한열 열사 추모제(위). 아래는 현재 같은 곳의 모습.
 1987년 6월 5·18광장에서 열린 이한열 열사 추모제(위). 아래는 현재 같은 곳의 모습.
ⓒ 전대신문, 소중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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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생각을 하고 있는 조형물을 뒤로하고 또 5·18이 이름 붙여진 곳을 찾아 도서관 별관으로 향했다. 전남대에선 붉은 벽돌로 지어진 도서관 본관을 '홍도'라 부르고, 도서관 별관은 콘크리트에 흰색 칠이 돼 있어 '백도'라 불린다. 그리고 백도 앞 너른 공간을 '5·18광장'이라 칭한다.

10년 터울의 한 선배와 이곳을 지난 적이 있다. "이곳이 5·18광장인 건 아냐?"란 질문에 자신 있게 "네"라고 대답했다. 그 선배는 이곳에서 "시위를 했다"느니, "어떤 의미를 지니는 공간인 줄 아냐"느니 하며 연신 거들먹거렸다. 하지만 할 말은 없었다. 사실 이곳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잘 모른다. 5·18광장에서 무얼 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전대신문> 자료 사진을 보면 과거 이곳에서 총학생회 선거 합동연설회도 하고, 이한열 열사 추모제도 치러졌는데 기자는 6년째 전남대에 있지만 시험기간 때 말고는 5·18광장을 밟은 적이 없다. 그리고 지금은 누구도 이곳을 5·18광장이라 하지 않는다. 그냥 백도 앞이라 한다. '취업지원과'가 있다는 팻말만 볼 수 있다.

"생활이 바빠 5·18 관심도 줄어드는 것 같다"

사진전이 열린 봉지에서 한 학생이 사진을 보고 있다(위). 아래는 "다소 충격적인 사진"이란 설명이 붙은 '블라인드 5·18' 사진을 한 학생이 들춰보려 하는 모습.
 사진전이 열린 봉지에서 한 학생이 사진을 보고 있다(위). 아래는 "다소 충격적인 사진"이란 설명이 붙은 '블라인드 5·18' 사진을 한 학생이 들춰보려 하는 모습.
ⓒ 소중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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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광장에서 정문 쪽을 바라보면 '봉지'라고 불리는 작은 연못이 보인다. 연못 가운데는 '임을 위한 행진'이란 큰 조형물이 있다. 봉지 주변은 잔디로 뒤덮여 있고 햇살 좋은 봄이면 학생들로 북적인다.

전날 볼 수 없었던 사진전이 오늘은 차려져 있다. 18일까지 계속될 예정이다. 봉지를 둘러 전시된 사진들을 둘러봤다. 그 중 '블라인드 5·18'이라 해 "다소 충격적인 사진일 수 있으니 심장이 약하신 분들은 관람을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라 소개된 사진이 있었다. 직접 들춰야만 볼 수 있었다. 그 사진을 들춰보고 착잡한 마음을 달래려 잠시 잔디에 앉았다. 두 학생이 당시 도청의 인파를 담은 사진 앞에 섰다. 대화를 엿들었다. 한 학생이 손가락으로 사진 가운데를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가 지금 파리바게트 아냐?"
"응! 신기하다!"

그 두 학생이 자리를 옮겨 '블라인드 5·18' 사진을 들춰본다. 정적이 일었다. 인터뷰를 하려 했는데 그들은 황급히 불편한 표정으로 자리를 떴다. 뒤쪽으로 다른 한 학생이 사진을 유심히 보고 있다. 그에게 다가갔다. 피아노를 전공한다는 김현민(24, 음악교육과)씨에게 슬프지만 사진들을 본 느낌을 묻지 않고, 왜 이 사진들을 보고 있는지 물었다.

그는 "중·고등학교 시절, 시험을 보기 위해 외웠던 5·18을 대학 와서는 좀 더 관심을 갖고 공부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한산한 사진전의 풍경을 걱정하기도 했다. 김씨는 "꽤 오랜 시간이 지난 일이고, 사회가 바쁘게 돌아가는 만큼 5·18에 갖는 관심도 줄어드는 것 같다"며 "전남대 구성원만큼은 모두 관심을 가져줬으면 좋겠는데 이런 사진전의 모습을 보니 안타깝다"고 전했다. 그는 전남대에만 있는 강의로 기자도 1학년 때 들었던 '5·18항쟁과 민주인권'이란 강의를 수강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오후 4시, 발걸음을 영화제가 진행 중인 사회대로 옮겼다. 14일부터 진행된 영화제에선 5·18을 소재로 한 영화들을 5일간 하루 한 편씩 상영한다. 14일 <박하사탕>, 15일 <오월애>에 이어 기자가 찾아간 16일엔 <스카우트>를 상영하고 있었다. 17일엔 <오래된 정원>, 18일엔 <화려한 휴가>를 상영할 예정이다.

이날 총 관객은 10명. 이곳에서 만난 김신아(20, 의예과)씨와 조인규(20, 의예과)씨는 각각 목포와 서울에서 살다가 전남대에 입학해 처음 광주에서 5월을 보내는 중이었다. 이들은 "학교 곳곳에 붙은 홍보물을 보고 영화도 볼 겸해 이곳을 찾았다"며 "타지에 있을 때와는 달리 전남대에 입학한 후에는 5·18을 접할 기회가 많아 관심도 더 가게 된다"고 말했다.

영화제를 진행하는 스태프와도 이야기를 나눠봤다. 대부분의 스태프들은 지난달 총학생회 주도 하에 자발적으로 모인 '5·18 기획팀'의 일원이다. "배워서 아는 것과 참여를 통해 아는 것은 다르다"는 생각으로 기획팀에 자원한 정필선(20, 역사교육과)씨는 영화제 현장을 맡고 있다. 정씨는 자신이 입고 있는 스태프 전용 티셔츠의 등판을 가리키며 "많은 학생들이 5·18 관련 행사에 참여해 역사를 바로 알고, 그 정신을 계승했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티셔츠에는 "잊혀진 노래를 다시 부르자"고 적혀 있었다.

"잊혀진 노래를 다시 부르자"... '5·18 주간'은 계속된다

어제의 나에 비해 오늘의 나는 최소한 머리카락 하나라도 더 자라 다른 모습일 것이다. 이렇게 나라는 존재가 항상 변한다고 할 때 나를 항상 '같은 나'이게끔 하는 것은 무엇일까. '기억'이다. 내가 나를 기억하고, 남이 나를 기억하기 때문에 나라는 존재가 시시각각 변해도 언제든 같은 나일 수 있는 것이다. 역사를 기억하는 것도 같다. 기억해야 그 역사는 존재한다.

5·18을 기억하기 위해 전남대에서는 5·18주간을 운용하고 있다. 17일 오후 4시 30분 봉지에서는 '공권력의 이름으로 행사되는 폭력은 언제나 정당한가'를 주제로 '100인 원탁토론회'가 예정돼 있다. 또 '1980년 5·18과 지금의 우리'를 제목으로 강연회도 열린다.

17일, 18일 오후 6시엔 각각 최승호 전 < PD수첩 > PD와 김용민 <나는 꼼수다> PD의 강연(16일에는 최한욱 애국전선 진행자의 강연이 있었다)이 있을 예정이다. 역시 17일부터 이틀간 5·18 광장에서는 헌혈 행사가 진행되기도 한다.

5·18 주간은 18일 '전남대 5·18 연구소'에서 주최하는 학술대회(주제 : 5·18연구의 확장과 재구성)에 이어 19일 '5·19 퍼레이드'에서 절정을 이룬다. 오후 5시 봉지에서 출발하는 퍼레이드 행렬은 5·18의 중심인 구 도청까지 이어질 예정이다. 좀 더 많은 이들이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는 5·18주간이 되길 진심으로 바라본다.


태그:#전남대, #5·18민중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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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의 저편을 바라봅니다. extremes88@ohmy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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