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교과서에도 등장하는 '안계 평야'. 그러나 안계평야의 대부분은 단북면의 땅이다. 들판 너머로 아스라히 단밀면의 만경산을 보여주는 '단북평야'의 가을 풍경.
 교과서에도 등장하는 '안계 평야'. 그러나 안계평야의 대부분은 단북면의 땅이다. 들판 너머로 아스라히 단밀면의 만경산을 보여주는 '단북평야'의 가을 풍경.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단밀에서 위천을 건너면 안계 평야가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그런데 이름은 안계 평야이지만, 안계면 사무소에서 위천의 구천교를 건너 구천면 사무소로 이어지는 923번 지방도로의 서쪽 들판은 모두 단북면 소재지다. 면소재지는 923번 도로와 위천 사이에 펼쳐지는 넓은 평야 가운데를 직선으로 달리는, 단밀에서 안계로 가는 912번 지방도로를 가다가 중간쯤의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들어가면 있다.

면소재지로 들어가면서 보면, 만경산에서 감상하던 월봉산 세 봉우리가 위천을 따라 이어져 있는 풍경이 왼쪽에 펼쳐진다. 면소재지는 산자락 오른쪽이다. 월봉산은 단북면 사람들에게는 마을을 지켜주는 진산(鎭山)인 듯, 동네 입구의 네거리에 세워져 있는 '단북 새마을 운동 기념비'에도 월봉산 이야기는 빠지지 않는다.

월봉산 푸른 줄기 감싸 안고
위수강 젖줄로 기름진 평야
유서 깊은 삼한시대 옛 고을에
새마을운동 널리 펼쳐 좋은 터전 만들었네 (이하 생략)

단북이 삼한 시대에도 있었던 옛 고을이라는 말은 '미기못'이 증언해준다. 삼한 시대에 단밀에 있었던 작은 나라가 '난미리미동국'이니, 그와 소리가 비슷한 '미기못'이 단북에 남아 있다는 것은 아득한 옛날에는 이곳 역시 난미리미동국이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단북(丹北)이라는 이름은 1914년에 이곳이 독립 면으로 정해지면서 단(丹)밀의 북(北)쪽에 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미기'는 지금 묵계(墨溪)마을이 되어 있다. 의성군 누리집에는 '미기못이 있는 마을이라고 해서 "미끼" 또는 "믹기"라 불렀는데 영조 때 간행된 <상산지>에는 "墨溪(묵계)"로 나온다'고 기술하고 있다. 누리집에 더 이상의 설명은 없지만, 한자로 옮겨적는 과정에서 '미끼'의 '끼'와 '믹기'의 '믹'이 한자가 없는 소리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묵계'로 기록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묵계마을은 조금 전에 좌회전하여 들어온 912번 도로 삼거리에서 직진하여 400m쯤 더 안계쪽에 있다.

벼락지의 연꽃, 8월에도 아름답지만 겨울 정취도 그만

이미 삼한 시대에 우리나라에는 김제의 벽골제(堤), 밀양의 수산제, 상주의 공검지(池), 제천의 의림지와 더불어 의성의 대제지가 있었다. 의성군 누리집에는 '처음에는 콩을 한 되 볶아서 한걸음에 한 개씩 먹으며 돌아야 한 바퀴 돌 수 있을 만큼 컸던 못이 세 차례의 축소를 거쳐 점차 작아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1628년(인조 6) 어느 날, 뇌성벽력과 폭우가 쏟아지는 밤,  이 못에 살던 큰 이무기가 동쪽으로 갔다. 날이 샌 뒤 보니 이무기가 끌고간 진흙 자취가 남아 있었다. 마치 커다란 대들보를 끌고 간 듯했다. 그리고 비늘 하나를 떨어뜨려 놓았는데 손바닥만큼 컸다."

위의 글은, 조선 영조 때 발간된 <상산지>에 전하는 대제지의 전설 한 가지를 요약한 것이다. 전설은, 신성성도 말해주고 있지만 대제지가 그만큼 컸다는 사실에 대한 증언이기도 하다.

꽃을 피울 때를 기다리고 있는 벼락지의 연
 꽃을 피울 때를 기다리고 있는 벼락지의 연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새마을운동 기념비 오른쪽에 벼락지가 있다. 이 못도 옛날에는 '백만지'라는 이름을 가졌다고 한다. 백만 평이나 되는 땅이 못으로 변했기 때문에 그런 이름을 얻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묵계마을과의 거리가 불과 1km 정도밖에 안 되는 것으로 보아 이 벼락지도 본래는 대제지의 일부였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대제지의 분명한 흔적을 찾기는 어렵고, 그 대신 벼락지가 남아 아름다운 연꽃을 자랑한다. 이미 연못 안으로 들어가는 길도 만들어져 있으므로 답사자는 꽃이 가득 피는 8월 초만 기다리면 된다.

연꽃이 여름철을 보낸 이 연못은 물론 한겨울에도 다른 저수지들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적막한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연꽃이야 물론 찬 가을바람을 맞아 떨어진 지 오래지만 대공만 애처롭게 남아, 마치 가랑비라도 내리는 듯 물이나 습지 위에 가녀린 직선들을 그려낸다.

한 곳에 같이 태어나 같은 물과 햇살로 살다가 마지막 모습까지도 같은 자태를 보여주는 저 연꽃들! 추운 겨울 얼어붙은 땅이며 물까지 함께 견디면서 새 봄을 기다리고 있는 연꽃들! 사람들도 저 연꽃들처럼, 서로 사랑하고 아끼고 함께 살아가는 그런 공동체를 만들고 가꾸어갈 수 있어야 할 텐데…….

단밀면에서 위천을 넘어 들어왔다면 강둑을 따라 넓게 펼쳐지는 안계평야를 달리며 들녘 풍경을 감상한 후 단북면 소재지로 들어서서 (1) 벼락지 연꽃, 새마을운동비를 구경하고 (2) 효제리 석불 (3) 정안리 불상 순서로 답사하는 것이 좋다.
▲ 단북면 답사여행 지도 단밀면에서 위천을 넘어 들어왔다면 강둑을 따라 넓게 펼쳐지는 안계평야를 달리며 들녘 풍경을 감상한 후 단북면 소재지로 들어서서 (1) 벼락지 연꽃, 새마을운동비를 구경하고 (2) 효제리 석불 (3) 정안리 불상 순서로 답사하는 것이 좋다.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벼락지를 떠난다. 새마을운동 기념비 앞을 거쳐 면소재지 안으로 들어간 다음, 고개를 넘는다. 월봉산 뒤편으로 난 923번 도로를 타고 효제리의 석불입상을 찾아가는 길이다. 계속 가면 다인면 소재지에 닿지만 그럴 까닭은 없는 일이고, 내리막이 끝나는 즈음에 나타나는 삼거리에서 오른쪽 길로 접어든다. 양옆으로 벼들이 잘 자란 들판 복판을 직선 그대로 달리는 이 길은 28번 국도까지 휘어지지 않고 그대로 이어진다.

석불은 그 길, 그 들판의 중간쯤 되는 논 가운데에 있다. 막 모내기를 한 초여름에는 물론 벼들이 노랗게 익은 가을에도 석불은 단숨에 찾을 수 있다. 나무 한 그루 집 한 채 없는 수평의 들에 비각(碑閣)의 보호도 없이 혼자 고개를 들고 서 있기 때문이다.

논두렁을 따라 들어간다. 석불보다도, 그 둘레 조그마한 땅에 누군가가 배추를 심어 놓은 정경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반 평이나 될까 말까 한 좁은 땅에까지 이렇듯 배추농사를 지은 농부의 애틋한 농심(農心)이 돋보인다. 석불이 끼니를 굶을까 봐 걱정하여 심어놓은 것만 같다.

이 작은 불상도 언젠가는 미륵불로 현신하리라

옛날에는 그래도 절이 있었을 법하게 여겨지는 땅이지만 모든 것을 다 잃은 채 저 홀로 남아 있는 석불은, 비바람과 세월의 무게, 그리고  쓸쓸함을 이기지 못한 탓인지 눈, 코, 입, 귀 등 온전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없다. 그 탓에 문화재로 지정을 받지도 못했다. 그래도 오늘처럼 이렇게 찾아주는 이가 드문드문이라도 있으면 이 불상도 언젠가는 미륵이 되리라.

길로 돌아오니, 마치 바람 부는 날 홀로 길에 나와 울고 있는 고아를 달래준 듯한 기분이다. 다시 길을 간다. 똑바로 나 있는 곧은 길은 금세 다인면과 안계면을 잇는 28번 국도에 닿는다.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기 전에 잠깐 정면의 풍경을 즐긴다. 안사면의 지장사 뒷산인 460m 문암산과 328m 곤지봉 능선이 무지개처럼 하늘에 걸려 있다. 그 아래로 들어가 삼분리에 가면 신라 진흥왕이 '들었다 놓았다'는 142kg짜리 바위가 교회 앞에 남아 있고, 왕은 비릿재를 넘어 대곡사 쪽으로 나아갔다고 한다.

단북면에서 바라보는 비릿재 방향의 풍경
 단북면에서 바라보는 비릿재 방향의 풍경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28번 국도를 타고 동남쪽으로 내려오면 단북면과 안계면의 경계 지점에 닿는다. 왼쪽에 세워져 있는 '정안동 석조여래 입상'이라는 갈색 간판이 답사자를 부르는 곳이다. 예전에 안계 시장이 있던 마을이라 '구(舊) 안계'라 부르기도 하고, 안(安)계 아래(下)에 있는 마을이라고 해서 하안(下安)이라 부르기도 하는 마을인데, 행정상 명칭은 정안 2동이다.

유형문화재 175호인 '의성 정안동 석조여래 입상'은 마을 회관 바로 뒤 솔밭 앞에 있다. 회관 뒤편의 좁은 골목길로 석불을 찾아들어가면서 하늘을 쳐다보면, 맨 위에 태극기, 그 바로 아래에 흰 바탕 붉은 '卍'(만)자 깃발, 다시 그 아래로 천 전체가 온통 붉은 깃발, 그리고 푸른색 깃발이 한 깃대에 '三'(삼)처럼 매달린 채 바람에 휘날리고 있다. 큰 장대를 세우고 거기에 새나 깃발 등을 매다는 일은 아득한 옛날부터 내려온 오래된 종교 행위이니, 저 표시도 분명히 마을 사람들이 불상 앞에 가서 소원을 비느라고 세워놓았을 것이다.  

불상 앞에는 키 큰 맨드라미들이 호위 병사들처럼 한 줄로 잘 자라 있다. 맨드라미의 선혈 과도 같은 꽃빛과, 비각 앞 허공에서 휘날리고 있는 붉고 푸른 원색의 깃발들은 석불 일대를 알 수 없는 종교의 세계로 이끄는 듯하다. 우리가 발을 딛고 사는 '이 세상'이 아닌, 낯선 어떤 '저 세상'으로 문득 들어와 버린 것만 느낌이다.

정안리의 불상을 지키는 세 가지의 깃발
 정안리의 불상을 지키는 세 가지의 깃발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태그:#벼락지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