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이 결혼을 결심한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아버지에게 말한다. 그 순간, 세상의 아버지들은 어떤 느낌에 젖을까? 경일대학교 교육문화콘텐츠학과 신재기 교수는 말한다. 아버지들은 '과년한 딸이 결혼하겠다면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겠지만 내심으로는 '애지중지 키운 내 자식 빼앗긴다는 상실감이 본능적으로 앞서는' 사람들이라고.
하지만 아버지들은 불현듯 찾아온 상실감을 떨쳐내는 데 오랜 시간을 허비하지는 않는다. 이내 평정심을 되찾는다. 아이가 자라 성년이 되면 '새로운 짝을 찾아'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 '세상의 순리'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이제 아버지들은 걱정에 빠진다. 참되고 행복한 결혼은 '한 개체의 독립성과 우리의 "하나됨"을 동시에 존중'할 줄 아는 남녀 두 사람이 '인간적으로 "둘도 없는 우리 사이"가 되어 최적의 상태'에 이른 경지이거늘, 내 딸은 과연 그것을 알고 있을까. 세상의 대부분 부부들은 그것을 알지 못하는 채 결혼을 하고, 살면서 조금씩 깨닫게 되기는 하지만 '깨닫고 나면 벌써 세월은 저만큼 지나고 후회만 고스란히 남긴 채로' 인생이 저물어 가는 법인데...
그래서 아버지들은 딸의 행복을 기원하며 '선물'을 한다. 자신이 새로운 가정을 이룰 때에 부모로부터 물려받았듯이, 타고난 건강과 인성, 지혜 등을 딸에게 물려주는 것이다. 그 탓에, 사람됨을 중하게 여기는 아버지들은 스스로 그것이 온전하지 못함을 한탄하면서 남몰래 눈물을 흘리게 되기도 한다.
물론 세속적으로는 후천의 것인 재물 등을 더욱 떠받든다. '겉으로는 (자녀의) 배우자가 성실한 사람이면 충분하다고 말하지만, 대개 그것은 헛말이다. 내심으로는 외모, 학벌, 직장, 집안 경제력 등과 같이 배우자의 조건'을 따진다. 그래서 '상대에게 책임을 따지는' 가정이 되고, '온전한 우리로 화합한 결혼 생활'을 영위하는 데 성공하지 못한다.
딸의 결혼이 다가오는데... 선물은 무엇이 좋을까딸의 결혼식이 곧 다가온다. 한 아버지는 깊이 생각한 끝에 보기 드문 선물을 준비했다. 여섯 권의 산문집과 네 권의 문학비평서를 낸 바 있는 그 아버지, 신재기 교수가 오랜 세월 자신의 분신이 되어 세상을 누볐던 글들 중에서 마흔 편의 수필을 골라 발간한 '수필 선집' <앉은 자리가 꽃자리>가 그것이다.
책은 글감에 따라 1부 '책에 대한 예의', 2부 '어머니의 장한몽', 3부 '향기로운 사람', 4부 '공간의 두께'로 구성했다. 물론 각 부마다 10편씩 실려 있는 작품들은 책을 세상에 태어나게 한 까닭과 한결같이 맞닿아 있다. 참된 사람살이의 길(1부), 고맙고 애잔한 가족들로부터 얻는 인간적 깨달음(2부), 나와 세계의 관계(3부), 구체적 일상의 현장에 대한 사랑(4부)을 군더더기 없는 지적 '문채(文采)'로 형상화한 저자는 아마도 '아름다운 빛깔과 향기'를 가진 이런 내용들이 사위와 딸의 '가슴속에 살아 움직일 수 있'기를 소망할 터이다.
"이 선집은 딸아이가 결혼하는 날에 맞추어 발간하게 되었다.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딸에게 주는 아버지의 작은 선물이다. 부디 사위와 딸의 앞날에 기쁨과 행복이 넘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자식에게 따뜻한 말을 해주는 데 인색한 아버지로서 살아온 것 같다. 그 미안한 마음을 이 책에 담아 전한다."'책머리에' 실려 있는 아버지의 '사위와 딸의 앞날에 기쁨과 행복이 넘치기를' 간절히 바라는 '소망'과, 그러면서도 지금껏 살뜰하게 대해주지 못한 데서 오는 '미안한 마음'은 충분히 전해졌으리라. 이만큼 귀한 '아버지의 결혼 선물'은 웬만해서는 달리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본디 '귀하다'에는 그것의 정신적 또는 물질적 가치가 높다는 뜻과, 흔하지 않아 희귀하다는 의미가 함께 들어 있는 법, 아버지의 마음(精神)을 온전히 담은 책(物質)이 결혼 선물이 되어 나타나는 일은 정말 보기 드문 희귀(稀貴) 사례가 아닌가. 그래서 아버지는 책의 제목도 딸의 결혼 이야기를 다룬 최근의 글 '앉은 자리가 꽃자리'로 정했음이 틀림없다.
지금까지 <앉은 자리가 꽃자리>를 몇 날에 걸쳐 탐독한 의의에 대해 말했다. '책에 대한 예의는 인간에 대한 예의'인즉, 사람살이의 중요한 전환점 중 하나인 결혼을 앞둔 딸을 위해 책을 펴냈으니 그것만으로도 읽을 가치가 충분한 저서라는 뜻이다. 반만년 전통을 자랑하는 문화의 나라 한국이 근래에 들어서는 문득 책 안 읽는 국민들의 세상으로 전락했다는 세평을 생각할 때, 이와 같은 출간이 일반화되어 진정한 '국격'의 상승이 이루어지기를 간구해 본다.
책에 대한 예의는 인간에 대한 예의<앉은 자리가 꽃자리>는 '묵은 의자를 비워드리겠습니다'로 시작하여 '지금까지보다는 좀 느린 걸음으로 약수터를 오르내리며 일상의 작은 의미를 되새길 것이다'로 끝난다. 저자가의도적으로 그렇게 배치한 것은 아니겠지만 이는 책 전체를 관통하는 뜻과 느낌이 무엇인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내 몸을 지탱하고 자신의 존재감과 품격을 지킬 최소한의 자리만 있다면 충분하지 않겠는가'하고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마음을 저자는 글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찻집에서 한 시간 이상 누구를 기다려본 사람', '내 자아를 편안히 쉬게 할 공간'을 찾는 사람, '보내온 이의 인정과 향기가 넘쳐나는 아름다운 편지 한 통'을 그리워하는 사람, 책을 '인류 최고 가치의 발명품'으로 믿는 사람이면서도 '언젠가는 문갑 위에 단 한 권의 책도 놓이지 않은 그런 공간을 만들겠다는 새로운 꿈'을 꾸는 사람, 농민들의 시위 때문에 출근길이 막혀 꼼짝도 할 수 없게 되었지만 '그 자리에서 하루 종일이라도 기다릴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 그런 사람을 소망하는 저자의 글들은 독자를 '아날로그에 대한 향수'에 젖게 한다. 그래서 <앉은 자리가 꽃자리>는 읽는 이의 마음 속에 '향기로운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갈증을 빚어내는 문학의 임무를 훌륭히 수행하고 있다.
재미있는 표현 기법도 눈에 띈다. 보통의 작문 수업은 소주제가 바뀔 때마다 문단을 구분하라고 가르치는데 반해, 저자는 대부분의 글에서 그렇게 하지 않고 있다. 저자는 일반적인 글들이 서너 개의 문단으로 나누었을 법한 내용을 한 덩어리로 묶어서 내놓는다. 이는 저자 고유의 실험인 듯한데, 논설문이나 설명문, 또 소설 등과 갈래가 다른 수필에 적절한 글쓰기 기법으로 보인다. 수필이 뜻만 전달하는 글도 아니고, 사건 위주로 기술하는 글도 아니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 둘을 절묘하게 아우른 기법이 바로 신재기식의 새로운 문단 나누기로 여겨진다는 말이다.
하지만 한 편의 끝을 마무리할 때에는 과감한 변신도 보여준다. 본문의 문단들과는 달리 이번에는 단 한 문장으로. 길어도 두 문장만으로 글의 마지막 문단을 이룬다. '나는 지금 이 모든 이야기를 나 자신에게 하고 있다.', '사이버공간에서 나의 닉네임인 "와인한잔"은 끝까지 버리지 않을 작정이다', '소년에게 워낭소리는 지워지지 않는 슬픔이었다', '나는 아직 철이 덜 들었는지, 쓸데없는 나만의 일을 그만두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누가 나에게 친필의 편지 한 통 부쳐 오겠는가. 내가 그러지 못하는데', '부모들 대부분은 언제나 자식 때문에 가슴 아파하고, 그로 말미암은 상처를 안고 사는 듯싶다. 오늘따라 육십을 못 넘기고 돌아가신 아버지가 그립다' 식이다. 그래서 글을 읽은 독자는 깔끔한 독후감을 마음의 끝에 느끼게 된다.
마지막으로, 저자의 기법을 본뜨는 방식으로 이 글을 마무리해야겠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를 읽으면서 데카르트의 명언 '책을 읽는 일은 과거의 가장 뛰어난 현인과 대화를 나누는 것'을 떠올렸다. 그런데 인류사의 현인 데카르트는 이 촌철살인을 남겨 더욱 유명해졌지만, 같은 17세기를 살았던 프랑스 작가 라 브뤼예르는 대단한 명언을 남겼음에도 덜 알려져 있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의 내용을 간결하게 압축해주는 그의 멋진 촌철살인을 마음속 깊이 한 번 새겨보시라.
"천천히 걷는 사람에게는 먼 길이 없다." 덧붙이는 글 | 신재기 수필선집, <앉은 자리가 꽃자리>, 216쪽, 학이사, 2012년 4월 28일, 1만2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