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의 인생사 중 가장 어려운 것 하나가 은퇴를 결정하는 일이다. 누구나 아름다운 은퇴를 꿈꾸지만 미련과 집착, 눈치 보기와 떠밀림 등 여러 갈등과 고민으로 적절한 은퇴시기를 놓치기 마련이다.
가수 패티김이 은퇴를 선언했다. 삶의 궤적 자체가 한국 가요사와 맞닿아있는 그녀이기에 지켜보는 이들에겐 여러 감정이 뒤얽힐 만한 일이다. 그러나 패티김은 방송을 통해 "서서히 사라지는 것은 패티김답지 않다, 내 노래를 원 키로 부를 수 있을 때 떠나겠다"는 분명한 소회를 밝혔다.
우리나라 가수로서 '최초'라는 수식어가 들어간 거의 모든 기록을 가지고 있는 패티김. 그러나 그간 패티김의 개인사를 소상히 아는 이들은 없었다. 사생활로 입방아에 오르내리기보단 노래와 공연으로 팬들에게 서길 바랐던 그녀의 신념때문이었다.
그런 그녀가 자신의 가수 인생을 정리하며 자서전을 내놨다. 제목은 <그녀, 패티김>. 자신과 관련된 처음이자 마지막 책이다. 그런데 이 책 뭔가 여타 자서전과 많이 다르다. '나는' 혹은 '그녀는'으로 시작하는 1, 3인칭 시점이 아니다. 대담형식이다. 파격적인 발상이다.
조영남이 대화를 나누고 직접 정리했다. 패티김이 부탁을 했고, 조영남은 '강압'에 못 이겨 썼다고 한다. 별나고 독특한 형식의 이 책. 지난 19일 오후 교보문고에서 열린 사인회 현장에서 패티김은 책에 얽힌 이야기와 은퇴 후 계획에 대해 처음으로 들려줬다. 당연히 조영남도 함께 했다.
바로 지금 모습이 가장 아름다운 시절의 모습
"표지에 있는 사진이 이상한가요? 조영남씨는 젊은 때의 사진을 쓰자고 하는데, 저는 나이든 지금 그대로의 모습이 저 자신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아닌가요?"패티김은 지금보다 젊은 날의 모습을 표지에 쓰자는 의견이 있었다며 사인회장에 몰린 이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에 조영남이 가장 예쁠 때 모습을 써야하는 것 아니냐고 묻자, 일제히 "지금 모습이 가장 아름답다"는 대답이 터져 나왔다. 조씨는 머쓱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다면 패티김은 왜 대화형식의 자서전을 펴내게 됐을까. 패티김은 그간 자서전을 쓰자는 제의도, 쓰고 싶다는 작가도 많았지만 계속 거절했었다고 밝혔다.
"다른 자서전 등을 보면 꾸밈이 있다는 게 느껴졌다. 그렇게 틀에 박힌 형식으로 내고 싶진 않았다. 살아온 게 그렇게 재미있는 스토리는 아니지만, 한다면 거짓 없이 쓰고 싶었다. 하도 안 하니까 회사에서 조영남씨 이야기를 꺼냈다. 그 친구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 유일하게 누님이라고 하는 후배다. 그라면 적어도 지루하게 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은퇴 후 '푸른 하늘 찾기 캠페인' 하고 싶어"
조영남은 이런 형식의 자서전이 세계 최초가 아닐까 싶다며 패티김 선배의 폭력과 다름없는 '나긋나긋한 강요' 덕분에 책이 나오게 됐다고 밝혔다.
"사실은 선배님의 자서전을 쓴다는 건 너무나 영광스러운 일이다. 어떤 형식으로 할까 고민하다 일단 만나서 많은 이야기를 하기로 했다. 일목요연 조목조목 너무 조리 있게 잘 하시더라. 이걸 살리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읽는 분들도 쉽고 재미있을 것 같았다."패티김은 내년 초까지 마지막 은퇴공연이 잡혀있다. 은퇴를 발표하고 바로 사라지는 건 팬들에 대한 배신행위로 느껴져 마지막 인사를 올릴 계획이라고. 이날 패티김은 그간 밝히지 않았던 은퇴 후 행보에 대해 한 가지를 발표했다.
"무대를 떠난다는 생각을 하면 마음이 쓰리다. 미련이 왜 없을까. 그러나 노을과 석양의 고운 빛으로 기억되고 싶다. 은퇴 후 하고자 하는 일중 하나는 '푸른 하늘 찾기 캠페인'이다. 사람들이 공해가 심해 하늘을 보지 않는다. 우리 대한민국 국민이 뭉치면 높고 아름다운 하늘을 곧 되찾을 수 있으리라 본다."개인사가 아닌 현대사 혹은 가요사로도 의미 있는 책
패티김과 조영남의 말대로 책을 펼치면 바로 대화가 시작된다. 그리고 그 곳엔 어느새 수십 년이 흐른 지난날이 펼쳐진다. 흑백영화의 한 장면 같은 날을 바로 어제 일처럼 기억하고 작은 수치까지도 곧잘 짚어내는 패티김. 거기에 맞장구를 치는 조영남. 패티김의 개인사를 넘어 마치 현대사 드라마가 펼쳐지는 듯하다.
미8군 무대를 통해 가수가 된 패티김. 흔히 그런 곳이 있었구나 하는 독자들에게 어떻게 조직되고 꾸려지고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 당사자로서 전하는 일화들은 생생하다. 그리고 본명 김혜자에서 예명 패티김이 되어가는 과정들.
그는 과거의 남자, 길옥윤에 대해서도 애정과 존경을 담아 담담히 추억한다.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왜 파경을 맞을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서도 최초로 고백한다. 남의 말하기 좋아하는 이들 때문에 감내해야 했던 기억도 이제는 되돌릴 수 없는 그리움이다.
책은 그들의 말대로 지루할 틈이 없다. 조영남이 더해주는 웃음과 패티김이 살려낸 과거의 추억이 깨알처럼 펼쳐진다. 특히 본문 하단을 촘촘하게 채운 각주는 사전이나 인터넷을 켜지 않더라도 시대배경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이는 독자들을 배려한 조영남의 제안이었다고 한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가왕 패티김이 선사하는 이야기는 여타의 자서전과 분명 다른 재미가 있다. 마지막 자서전까지 허투루 만들지 않겠다는 그녀의 의지가 만들어낸 개가다. 여기에 아직 철은 덜 들었지만, 그만큼 여러 재간을 뽐내는 조영남이 힘을 보탰으니 분명 읽는 재미가 있다. 패티김의 개인사라고 규정짓기에는 아깝다. 시대사, 한국대중가요사의 연구 자료로도 가치가 충분하다.
덧붙이는 글 | <그녀, 패티김>, 조영남 씀, 돌베개 펴냄, 2012년 4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