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몸으로 만들어내는 음(音)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것은 무엇일까. 목젖이 울긋불긋 부풀어 오르며 힘껏 터지는 때로는 가늘게 떨리며 나긋이 속삭이는 목소리를 으뜸으로 칠 것이다. 그러나 의외의 곳에서 만들어지는 매혹적인 소리가 있다. 달인(達人)들은 손바닥과 발바닥의 소음(?)으로 사람들을 뜨겁게 달아오르게 만든다. 그들은 이성적인 머리를 열정적으로 달궈놓고, 감성적인 가슴은 몽롱하게 자극시킨다.
스페인의 국보급 무용수였던 카르멘 모타(Carmen Mota)가 제작하고 호아킨 마르셀로가 안무한 플라멩코 댄스 뮤지컬 시리즈의 서막은 화려하다. 무용수들의 절제되고 격조 있는 군무(群舞)로 시작되는데 1부는 비장한 음악과 군무로 현대화된 플라멩코를 현란하게 선보인다. 언어가 없고 몸만으로 표현한 플라멩코지만 장중한 리듬 사이의 짤막한 빈틈을 예리하게 파고든 손뼉 소리(팔마스, Palmas)와 발 움직임(사파테아도, Zapateado)은 관객들을 긴장시킨다.
플라멩코에는 집시들과 여러 민족의 문화와 춤이 섞여 만들어진 방랑의 역사가 담겨 있다.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 생존해야 되는 그러면서도 자신들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했던 떠돌이들의 고뇌가 아련하게 느껴진다. 어느 곳을 가든 타향에서 소수로서 살아가는 일은 어렵기 마련이다. 흩어지고 뭉쳐지고 그리고 무대의 양쪽을 오가며 교차되는 무용수들의 군무는 바로 플라멩코를 탄생시킨 방랑자들의 여정을 드러낸다. 때로는 흩어질 수밖에 없고 모진 시련에는 똘똘 뭉쳐 저항해야만 했던 사람들의 비애가 절제된 춤으로 다져진 것이 플라멩코의 속살이다.
그들에겐 춤과 노래가 어떤 의미일까. 고단한 삶과 이방인으로 배척된 고통을 씻어내고 울분을 삭히는 유일한 배설구가 아니었을까. 그래서 플라멩코에서 몸을 흔드는 동작(브라세오, Braceo)과 움직임(파세오, Paseo)이 그토록 우아한 것은 그만큼 많은 슬픔과 한이 정제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관객들은 손뼉 소리와 발자국 움직임 하나로도 심장이 흔들리는 흔치 않는 경험에서 역사에 녹아든 끈질긴 민중의 힘을 체험했으리라.
카르멘 모타의 연출 스타일은 1부는 군무 중심이며 2부는 개인기의 향연이다. 라이브 음악과 농염한 춤동작이 관객들을 들썩이게 한다. 그리고 2부에는 없었던 칸테(Cante, 노래)와 토케(Toque, 악기연주)가 청충의 귀를 열어젖힌다. 기타에서 나오는 소리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농축된 연주와 가성을 쓰지 않고 목젖이 팽팽하게 불거지는 고음의 칸테를 격정적으로 쏟아냈다. 우리의 남도창법과 비슷하면서도 장사익씨의 <찔레꽃>을 연상시키는 온전한 소리꾼의 모습이다. 스페인어로 부른 칸테송의 의미를 알 수 없더라도 삶의 애환과 희망이 가슴으로 느낄 수 있다. 이국적인 문화도 소리만으로 소통된다는 메시지는 감동 그 자체이다.
각자의 장기를 뽐내는 독무(獨舞)에서 미세한 근육 움직임이 꿈틀거리는 모습은 인간 신체의 경이롭게 만든다. 2부의 압권은 무용수들의 탭댄스 배틀인데 인간의 발이 얼마나 현란하고 관능적일 수 있는지를 맘껏 뽐내는 박력 있는 탭의 속사포에 관객은 무아지경으로 빠진다.
1부에서 점잖게 앉아있던 관객들은 화려한 2부의 춤사위에 환호성을 지르며 장미를 무대로 던지곤 한다. 박수와 탭, 캐스터네츠 같은 단순한 소리를 이용해서 리듬을 자아내는 희귀한 스타일은 형식과 주제를 떠나서도 오감을 흥분시키는 새로운 경험이다. 카르멘 모타의 플라멩코 공연은 이국으로 떠나고 싶은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열정적인 공연이며, 5월 26일까지 LG아트센터에서 최신작 알마(Alma)로 다시 찾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