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년의 숲은 어떤 모습일까. 얼핏 원시림 빽빽한 숲을 상상해보기도 하지만 얼른 머릿속에 그려지지는 않는다. 백 년을 채 살지 못하는 인간이 천 년의 시간을 가늠한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일 지도 모른다. 그저 막연히 꽤 오랜 세월이 흘렀다는 걸 추측할 도리밖에... 더구나 그 숲이 인공숲이라면... 1000년 전에 인간이 만든 숲이 오늘에까지 이른다면 천연기념물이라는 이름조차 너무 가볍다 하겠다.
지난 19일 함양을 다녀왔다. 두 달 가까이 집 주위 산책길을 나 혼자 걷는 걸 조금은 지겨워한다는 것을 아내는 직감적으로 아는 듯했다. 이왕이면 숲길이 좋겠다며 아내가 상림으로 가자고 했다. 퇴원 후 처음으로 아내와 딸과 함께 셋이서 오붓한 여행을 떠났다.
상림의 숲은 멀리서 보아도 푸르렀다. 숲길 초입에 탐스럽게 함박웃음을 지으며 길손을 맞이하는 꽃. 붉은 듯 하얀, 하얀 듯 붉은 꽃은 작약이었다. 오늘 보니 꽃이 더욱 크고 매혹적이다. 얼마나 크고 탐스러우면 이 꽃을 일러 '함박꽃'이라 하겠는가.
수목이 우거진 여름의 녹음과 가을의 붉은 단풍이 특히나 아름답다는 상림은 신라 말 함양(당시는 천령) 태수였던 최치원이 조성했다. 고을을 가로지르는 위천의 범람을 막기 위해 둑을 쌓고 나무를 심어 물줄기를 돌렸다. 원래 대관림으로 불리던 숲은 대홍수로 상림·하림으로 나뉘었다가 지금은 복원 중인 하림은 없어지고 상림만 남게 됐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운동장으로 쓰였던 너른 공터는 이젠 아름드리 숲에 둘러싸여 이곳을 찾은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거나 삼삼오오 모인 행락객들이 볕을 쬐며 이야기하는 따스한 공간이 됐다.
상림에는 40여 종의 낙엽활엽수 등 모두 116종의 나무가 위천의 긴 둑을 따라 너른 폭으로 조성되어 있다. 숲 중간 중간에는 예쁜 오솔길이 있어 나무가 뿜어내는 맑은 공기를 온몸으로 마시며 걸을 수 있다. 상림의 숲은 이런 자연에다 인간의 역사 또한 오롯이 담겨 있다. 함화루, 척화비, 이은리 석불, 문창후 최선생 신도비, 역사인물공원 등 각종 유적들의 집합소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이곳은 쉼터이자, 자연학습장이며, 역사의 공간이기도 하다.
이사하면서 이름도 바꾼 건축물
너른 공터를 안마당삼아 풍채 좋게 서 있는 함화루는 원래 조선시대 함양읍성의 남문이었던 것을 1932년 상림으로 옮겨온 것이다. '멀리 지리산을 바라본다'고 해 본래 망악루라 했으나 이곳으로 오면서 이름도 바뀌게 되었다.
함화루 옆 샘물에서 목을 축이고 나면 호젓한 숲길이 발걸음을 재촉한다. 평지에 조성된 숲이지만 길은 아주 생동적이다. 일직선으로 놓였다면 그 느낌도 반감할 터, 구불구불 길을 놓아 숲 너머로 또 다른 세상이 펼쳐질 것 같은 착각이 들게 한다. 푸른 숲이 짙어지니 길은 더욱 하얘지면서 두런두런 이어진다.
숲길 한쪽이 갑자기 환해진다. 위천에 바짝 붙은 제법 널찍한 터가 나오더니 등을 돌린 석불이 하나 보였다. 이은리 석불이다. 이 불상은 1950년대 무렵 함양군 이은리의 냇가에서 출토되어 지금의 위치로 옮겨진 것이다.
부근에 망가사라는 절터가 있었는데 홍수로 절이 매몰되면서 떠내려 온 것으로 추측된다. 그래서인지 높이 1.8m의 이 석조여래좌상은 가슴 아래 부분은 시멘트로 복원되고, 두 손이 떨어져 나간 채로 있다. 부처의 코를 만지면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 때문인지 불상의 코는 반질반질하다 못해 검게 변하였다.
길을 내놓은 숲이 짙다 못해 어둡기까지 하다. 나뭇가지에 가려 보일 듯 말 듯 사운정이 나타났다. 고운 최치원을 기린다는 뜻으로 지은 정자이다. 맞은편 숲에는 함양장터에서 일어났던 3.1 만세운동을 기념하는 비가 고즈넉하게 자리하고 있다.
비석 들고 있는 거북이... 힘들겠네요
사운정 뒤에는 문창후 최선생 신도비가 훤칠하게 서 있다. 상림을 조성한 최치원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1923년 후손들이 세운 비다. 비석을 받들고 있는 거북의 얼굴은 매번 볼 때마다 웃음이 절로 나온다.
숲길은 계속된다. 말없이 뚜벅뚜벅 걷다 보면 숲에서 볼거리가 불쑥 나타난다. 마치 현실을 외면하지 말라는 듯 역사 속 유물은 하나씩 하나씩 모습을 드러내어 과거의 역사를 오늘로 불러낸다.
역사인물공원에서 잠시 발길을 멈췄다. 영남을 대표하는 선비의 고장 함양답게, 유학자들이 많이 배출돼 그 인물들을 기리기 위해 조성한 공원이다. 열을 지어 있는 인물상들이 다소 생경하다. 인물상들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탐관으로 고부군수를 지냈던 조병갑의 선정비가 공원 한편에 있다는 건 쓴웃음을 짓게 한다.
선정비 표지석에는 '조병갑이 유민을 편하게 하고 봉급을 털어 관청을 고치고 세금을 감해 주며 마음이 곧고 정사에 임했기에 그 사심 없는 선정을 기리기 위해 고종 24년(1887년) 세웠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조병갑은 1880년 함양군수를 지냈던 것으로 전해진다. 조병갑은 이후 김해 부사를 거쳐 전북 고부군수를 지냈으며, 특히 고부군수 시절 폭정을 일삼아 군민들의 분노를 사 동학농민혁명(1894)을 유발시킨 장본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이런 탐관의 비가, 그것도 낯 뜨거운 선정비가 이곳에 있다는 것이 못마땅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 급기야 2007년 1월에는 백아무개씨가 한 월간지에 동학농민혁명 원인 제공자로 알려진 조병갑의 비석이 함양 상림공원에 있고, 이를 없애야 한다는 한 군의원의 주장을 보도한 내용을 보고 선정비를 파손하여 불구속 입건되는 일도 있었다.
그 월간지는 <월간조선>이었고, 조병갑의 증손녀가 참여정부 청와대 홍보수석을 지냈다고 하니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그 증손녀가 100년이 지난 뒤인데도 혁명 당시 대접주였던 김개남 장군 후손 등 동학농민혁명군 유족들에게 공식 사과를 했다는 것이다.
드문드문 연꽃... 곧 연못을 채우겠구나
갈림길이 나왔다. 숲길을 벗어나 연꽃단지로 향했다. 깊숙한 숲 내면을 더듬다 이젠 그 옆구리에 팔짱을 끼고 오붓하게 걷는 길이 됐다. 다른 쪽 옆구리에는 드넓은 연밭이 팔짱을 끼니 그 길은 더욱 행복하다. 비록 지금은 연꽃이 드문드문 피었지만 이곳을 가득 메울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흰 백로가 발자국 소리에 길게 날아올랐다. 꽃을 거꾸로 대롱대롱 매단 때죽나무는 하얀 치마를 뒤집어 쓴 듯 노란 속내를 드러내며 수줍어한다. 징검다리를 건너는 아이는 아비에게 매달려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다. 조심조심. 가족들은 다시 모여 즐거운 점심을 나눈다. 숲 너머로 웃음소리가 들릴 듯 말 듯 다가온다.
숲이 품은 것은 비단 자연만이 아니다. 자연이 만들어낸 인간과 그 인간이 조성한 숲, 숲은 다시 인간의 역사를 보듬어 자신의 품에 품어 안는다. 인간이 숲을 조성한 시간보다 수십 배나 많은 시간을 아무런 대가 없이, 아무런 불만 없이, 숲은 인간에게 베푼다. 숲은 그저 자신의 소임처럼 느긋하게 지켜보기만 할 뿐, 탓하지도, 나무라지도 않고, 그렇게 오랜 세월을 묵묵히 견뎌온 것이다.
여행자는 사람의 힘으로 조성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숲이 주는 정취를 마음껏 느꼈다. 문득 이런 길이라면 온종일 걸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함양 상림 숲길은 약 5km로 1시간 30분 정도면 느긋하게 걸을 수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블로그 '김천령의 바람흔적'에도 실렸습니다.
(사진이 어제부터 조금 이상합니다. 용량과 사이즈를 조율했는데도 '깨짐 현상'이 생기네요. 확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