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민 전 통합진보당 공동대표가 들고 온 비례대표 후보 사퇴서에는 "정치발전을 위한 충정의 표현"이라는 문구가 선명했다. 유 전 대표가 써 넣은 사퇴 이유였다.
유 전 대표는 29일 오전 중앙선관위를 찾아 직접 사퇴서를 제출했다. 유 전 대표는 선관위 직원과의 간단한 문답을 끝으로 비례대표 후보 자리에서 물러나게 됐다. 그가 사퇴서를 접수하는 데는 채 10분이 걸리지 않았다.
유 전 대표는 정치 발전을 사퇴를 이유로 든 것에 대해 구 당권파의 패권주의 문제를 간접적으로 지적했다. 유 전 대표는 총선 지역구 후보 경선에서 불거진 구 당권파의 패권주의적 행태에 대해 당무 거부에 나서기도 했다.
그는 "우리가 가진 민주주의 제도는 정당 정치이고, 민주주의가 제대로 되려면 정당이 헌법에 맞게 민주적으로 운영돼야 하는데 우리 당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며 "비례대표들이 사퇴하는 것을 통해서라도 정당은 민주적으로 운영돼야 한다는 의지를 밝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번 일을 큰 교훈으로 삼아 통합진보당이 투명하고 민주적인 정당으로 발전함으로써 오늘의 잘못을 갚을 수 있기를 바라는 뜻"이라고 덧붙였다.
"대의 따라야"... 이석기·김재연 사퇴 압박유 전 대표가 중앙선관위에 사퇴서를 접수하는 바로 그 시간, 국회에서는 김수진·나순자·노항래·문경식·박김영희·오옥만·윤갑인재·윤난실·이영희 후보 등 9명의 비례대표 후보가 공식 사퇴 선언을 했다. 하지만 통합진보당은 유 전 대표의 "충정"에도 불구하고 행정 절차상으로만 따지면 그리 복잡하지 않은 비례대표 사퇴 문제를 놓고 수렁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혁신비대위(위원장 강기갑)도 '버티기'로 일관하고 있는 이석기·김재연 당선자와 조윤숙·황선 비례대표 후보의 사퇴를 끌어낼 현실적 수단은 없는 상태다.
유 전 대표는 사퇴를 거부하고 있는 비례대표 당선자와 후보들에 대해 강한 유감을 나타냈다. 그는 당내 정파간 정치적 협상을 통한 중재안 도출 필요성에도 비판적이었다. 정치적 거래를 통해 누구는 살리고 누구는 사퇴시키는 식의 해법은 안된다는 것이다.
그는 "당원 개인이 어떤 동기에서 어떤 일을 했든 당 내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서 한 정당으로서 국민에게 어떻게 책임질 것인가에 대한 고민에서 비례대표 사퇴 문제가 나왔다"며 "작은 이익을 버리고 대의를 가지고, 때로는 부당하다고 여기는 짐도 지고 가는 자세가 모두에게 있어야 국민들이 다시 기회를 줄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다시는 기회를 주지 않을 것이라는 두려움이 당의 혁신과 비례대표 사퇴를 추동해 가는 당원들의 마음일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입장과 이해관계가 다를 수 있지만 모두가 무엇 때문에 정당에 들어오고 정치를 시작했는지를 생각하면서 사태를 본다면 잘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유 전 대표는 자신의 사퇴로 인해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의석수가 1석 줄어드는 문제에 대해 "통합진보당의 비례대표 당선자를 만들어주신 230만 유권자들에게 죄송하고 우리 당을 지지하지는 않았지만 진보당이 잘 발전하길 원했던 많은 유권자들에게도 송구하다"며 "우리 당이 자성하고 새로 태어나는 과정에서 자청해 받는 벌이라고 생각해주시고 너그럽게 양해해 주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유 전 대표는 구 당권파의 강기갑 혁신비대위원장에 대한 직무정지 가처분 신청 등 소송전에 대해서도 우려를 나타냈다. 그는 "당은 법정이 아니고 정치는 소송이 아니다"라며 "같은 뜻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공동선을 실현해 보려고 정당 활동을 하는 것인데 당 내에서 송사를 하거나 하는 것은 좋지 않다"며 "그렇게 하는 가운데 당은 전체적으로 국민에게 버림을 받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MB가 동의하지 않는 생각 가진 국민들도 대한민국 국민"유 전 대표는 구 당권파에 대한 색깔론 공세에는 단호하게 반대 뜻을 밝혔다. 그는 "통합진보당 당원들 중에는 국민들이 동의하기 어려운 견해나 철학을 가진 이들이 있을 수 있지만 그 분들 역시 통합진보당의 일부"라며 "다 껴안고 가면서 바른 길을 찾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이명박 대통령까지 나서 '종북 세력' 공세를 한 것에 대해서도 "설사 이 대통령이 동의하지 않는 생각을 가진 국민들이 있다고 해도 그 또한 대한민국 국민"이라며 "소수라 하더라도 국민들을 자꾸 편가르고 배제하는 것은 대통령으로서 바른 자세는 아니다, 대통령이라면 모든 국민들을 껴안고 대화한다는 자세로 마지막까지 해달라"고 당부했다.
총선 전 유 전 대표는 비례대표 후보 12번으로 나서면서 안정적 교섭단체 구성을 목표로 삼았다. 그는 "당 지지율 20%를 달성해야 내가 당선권이 된다"며 "그 정도는 얻어야 안정적 교섭단체가 가능한 만큼 물구나무를 서서라도 20% 달성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통합진보당은 교섭단체 달성에 실패했고 비례대표 부정 경선 파문으로 당 지지율은 곤두박질 치고 있다. 유 전 대표도 부정 경선에 대한 책임을 지고 비례대표 후보 자리를 내놨다.
통합진보당 지지율도 리얼미터의 5월 넷째주 정례조사에서 4.3%를 기록하는 등 통합 전 민주노동당 지지율(4.8%) 아래로 떨어졌다. 정치인 개인으로서 유시민 전 대표의 고민도 깊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대표직 사퇴 후 두문불출했던 유 전 대표는 향후 계획을 묻자 "당이 제 갈 길을 찾아야 저도 그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것"이라며 "당이 제 갈 길을 찾을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고민도 하고 이야기도 듣고 있다"고 답답함을 내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