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1월, 통계청에서 발표한 그해 '10월 고용동향'을 두고 박재완 기획재정부 장관은 '고용 대박'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그것도 '위기관리 대책회의'에서 말이다. 그 뉴스를 본 내 입에선 "헐~ 대박" 이란 말이 튀어나왔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도 나와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SNS에선 장관의 발언을 두고 난리가 났고, 심지여 여당에서조차 비난이 쏟아졌다. 장관은 얼마 못 가 자신의 발언에 대해 "귀신에 홀렸나보다"라며 사과했다.
장관의 사과와는 별개로 '고용 대박' 뉴스 이후 얼마동안 나도 모르게 부모님 눈치가 보였다. 혹시 우리 부모님께서 '고용은 대박이라는데 우리 아들은 왜 아직 취업 준비 중일까' 하는 생각을 하시면 어쩌나 싶어서다. 취직 자체에 대한 부담도 있었지만, 부모님 눈치를 살폈던 가장 큰 이유는 '돈'이었다. 취직준비 한답시고 학원비에 차비에 점심값까지 받아서 쓰는데 금액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남들 다 다니는데 나 혼자 안 다니기엔 뒤처지는 것 같아 섣불리 학원을 그만둘 수도 없었다.
그 이후로 나는 한 푼이라도 아껴보자는 생각에, 생활하며 여러 꼼수 아닌 꼼수들을 활용하고 있다. 아마 나처럼 1000원 한 장이 아까워 벌벌 떠는 '취준생(취업 준비생의 줄임말)'들이라면 공감하지 않을까?
취업 준비 기간, 천원에 벌벌 떨며 느는 건 '꼼수'뿐
얼마 전 학원 수업이 끝나고 근처 대형 서점에 들렀다. 원래는 문제집을 몇 권 사려고 들렀는데 이곳저곳 둘러보니 보고 싶은 책들이 많았다. 그 중에 마이클 샌델 교수의 신간이 제일 눈에 들어왔다. 전작 <정의란 무엇인가>를 인상 깊게 읽었던지라 신간도 많은 기대를 했다.
추천사를 보니 책의 내용도 내가 평소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주제였다. 하지만, 무심결에 본 책 가격은 입이 떡 벌어질 정도였다. 무려 '만' 하고도 '육천원' 이라니… 어지간한 책은 만 원 가지고 사기 어려운 세상이란 건 예전에 알았지만, 이제 책값은 이만 원을 향해 택시미터기 속도보다 더 빠르게 달려가고 있었다. 원래 사려고 했던 문제집들에 다른 책들까지 합하니 8만 원 가까운 가격이 나왔다.
책값이 너무 부담스러워 근처의 헌책방으로 발길을 돌렸다. 혹시나 하고 둘러봤지만, 신간이 벌써 헌책방에 나왔을리 만무했다. 어쩔 수 없이 8만 원을 다 주고 사야하나 생각하는 순간 모 서점에서 인터넷으로 주문하고 서점에서 직접 수령하는 서비스가 있다는 것이 생각났다. 물론 가격은 인터넷 할인가로 말이다. 역시 궁하면 통하게 되어있었다.
예전에 인터넷 서점에서 구매하고 오배송으로 고생한 적이 있어 인터넷 서점보다는 오프라인 서점에서 직접 구매하는 걸 선호했다. 그렇지만 문제는 역시 돈이었다. 책을 서점에서 보는 즉시 구매할 수 없기 때문에 조금 번거로웠다. 하지만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그 길로 집에 달려가 주문을 했다. 물론 쿠폰에 카드 포인트까지 박박 긁어서 25% 할인을 받아 구매했다.
남은 시간은 10분, '환승시간'을 사수하라!
저녁식사가 끝나고 나니 주문한 책을 준비했다는 문자가 왔다. 집에서 서점까지는 걸어가면 왕복 50분이 조금 안 되는 거리다. 책까지 찾아 나오면 한 시간 정도가 걸린다. 걸어가기엔 조금 부담스럽고,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가기엔 돈이 아까운 애매한 거리다.
그래도 한 시간 가까이를 걷기엔 부담스러워 집 앞의 지하철을 탔다. 역에 내리는 순간 서점을 향해 뒤도 안 돌아보고 걸었다. 바로 '환승 제한시간 30분' 때문이었다. 역에서 서점까지는 바로 연결되어 있었지만, 그날따라 유독 길게 느껴졌다. 가쁜 숨을 몰아쉬고, 서점 문을 열었다.
주문 확인 차 내 이름을 말했다. 직원은 내 이름을 알아듣지 못했다. 숨이 차 그랬는지 맘이 급했는지 두 번째엔 발음이 더 샜다. 다시 이름을 말했지만 역시 알아듣지 못했다. 그때 카운터 뒤 책장에 내가 주문한 책들이 보였다. 나는 이름을 말 하는 대신 그 책들을 가리켰다.
"저기에 있네요.""네? 저거… 말씀하시는 건가요?""네, 네 그거예요."직원도 내 성미 급한 행동에 짜증이 났는지 주문한 책이 맞느냐며 심드렁한 표정으로 나에게 물었다. 그 당시엔 그 직원의 표정이 보이지도 않았다. 나는 그 급한 와중에도 인터넷에서 구입한 책들의 포인트 적립은 어떻게 되는지까지 확인하고서야 서점을 빠져나왔다.
말 그대로 애가 닳았다. 혹시나 환승시간이 끝나면 어쩌나 싶어 정류장에 도착하는 버스 번호마다 뚫어져라 바라보기를 10여 분이 지났을까, 기다리던 버스가 왔다. 카드를 찍자 "환승입니다" 소리가 들렸고, 그 순간 나는 세상을 다 가진 사람의 표정을 지었다. 나름 피 말리는 10분이었다.
버스에 타서 손잡이를 잡으니 그제야 좀 정신이 들었다. 집으로 오는 짧은 시간 동안 아까 서점에서 본 직원의 심드렁한 얼굴이 떠올랐다. 그럴 의도는 전혀 없었지만, 내 행동이 자신에게 짜증을 내는 것으로 느껴졌으리라 생각하니 정말 미안했다. 단돈 1000원 아끼려고 다른 사람 기분을 상하게 한 꼴이 됐다. 1000원이 뭔지, 정말 웬수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철없는 소시민인지라 후회도 그리 길지 않았다. 집에 와서 쌓인 책들을 보니 이리 뛰고 저리 뛰며 고생한 보답을 받은 것 같았다. 할인된 가격도 부담이 없진 않았지만, 아낀 돈으로 점심식사가 좀 더 풍족해 질 수도 있고, 쏟아지는 잠을 피하기 위해 캔커피가 아닌 핸드드립 커피를 한 잔 마시는 호사를 누릴 수도 있다.
인터넷으로 학원 근처 맛집을 찾으면서도 점심특선이 만 원을 훌쩍 넘는 맛집들의 가격에 혀를 내두르며 일주일 내내 학원 뒷골목 백반집으로 향하는 것이 나의 일상이다. 그에 비하면 책값으로 아낀 돈 2만 원 남짓은 일주일을 훨씬 풍족하게 해줄 수 있는 '거금'이다.
동전 한 닢에 울고 웃는 취준생... 현실엔 없는 '고용 대박'얼마 전 노량진 고시원의 '컵밥'에 대한 <오마이뉴스>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2000원으로 점심을 해결할 수 있다니 나부터도 솔깃했다. 내가 다니는 학원 부근에는 컵밥을 파는 포장마차가 없어 직접 먹어보진 못했다. 하지만 대학교 학생식당이 아닌 이상 5000원 가지고도 점심을 해결하기 버거운 현실이기에 2000원이라는 가격은 파격적으로 느껴졌다.
컵밥 포장마차들과 주변 식당들의 이해관계에 의해 지금은 많이 사라지고, 대기업들의 인스턴트 컵밥이 그 자리를 채웠지만, 2000원짜리 포장마차 컵밥은 나와 같은 취준생들의 힘든 주머니 사정을 대표하는 '슬픈 히트상품'의 예가 아닐까 싶다.
학원 가는 길, 가판대 위 조간신문 헤드라인이 눈에 들어왔다. "지난해 실업률 알고보니 7%". 뉴스를 보던 취준생들을 허탈하게 만든 '고용 대박'과 지난해 정부가 발표한 완전고용에 가깝다는 '3.4% 실업률'이 현실에는 없었다. 언제 될지도 모르는 취직을 위해 학원과 도서관에 붙어살면서, 2000원짜리 밥집을 찾아다니고, 1000원을 아끼기 위해 환승시간에 쫓겨 부랴부랴 볼일을 보며 초조하게 버스를 기다리는 우울한 청년들의 일상이 눈앞의 현실이다.
"취직할 때 까지만…" 이라고 생각하고 오늘도 동전 한 닢에 아등바등 매달리지만, 그 때가 언제일지 너무 멀어 보여 기운이 빠진다. 그래도 책을 챙겨 학원으로 향하고, 인터넷 취업카페를 찾는다. 이마저도 안 한다면, 난 구직포기자가 되어 실업률에도 잡히지 않는 유령 같은 사람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내 존재가 실업률로서 드러나야 하는 취준생이라는 것이 슬프지만, 당분간은 나에게도 '고용 대박'이 올 수 있다는 실낱같은 희망을 모르핀 삼아 하루하루를 견뎌봐야겠다. 하지만 그 시간이 너무 길지는 않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