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기종기 모여 피어나는 꽃들을 보면서 붉은 앵두가 옹기종기 가지마다 익어가는 초여름을 기대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이제 봄의 끝자락이다. 기후변화로 인해 실종된 봄인듯 하면서도 끈질기게 아직은 봄이라고 5월의 햇살이 구름 속에 가려있다.
우리의 역사는 봄과 초여름이면 뜨거운 햇살보다도 더 뜨겁게 타오르곤 했다.
그 뜨거운 역사의 용트림때문인지 5월의 햇살도 따스하기 보다는 여름햇살처럼 따갑게 느껴질 때가 많았다.
피어나는 봄과 피어나기 위해 용솟움치는 역사는 그렇게 피어나는 듯, 열매를 맺는 듯하면서 역사의 사계는 그렇게 빨리 오는 것이 아니라는 듯 썰물과 밀물이 교차하며 천천히 변한다. 그러다 꽃 피우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열매 맺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익기 전에 떨어져 버리는 것은 아닐까 조바심이 날 정도로 말이다.
하얗거나 혹은 새악시처럼 수줍은 분홍빛일 때에는 그 열매가 이렇게 매혹적이고 치명적 유혹을 가져올 수도 있는 붉은 열매를 맺을 것이라 누가 상상했겠는가.
맨 처음 꽃을 보고, 열매를 본 이들은 이렇게 수수한 꽃이 그토록 매혹적인 열매를 맺을 것이라는 상상을 했을까. 아니면, 그 열매가 무르익어갈 즈음이면 어떤 꽃이었는지 망각했을까.
우리의 역사도 돌아보면 그렇게 피어났다가 진 꽃들과 바람에 떨어진 꽃들이 있어 여기까지 왔는데, 우리는 그들을 기억하기나 하는 것일까.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그들이 이 역사를 피워낸 꽃이라는 사실을 잊고 오로지 자신의 영달을 위해서만 그 꽃을 기억하는 것은 아닐까.
붉은 빛이 농익으면 어떤 빛깔일까
올 봄에는 그들이 피어있다는 사실조차도 망각하고 지냈다.
그러다 문득 앵두나무를 바라보니 앵두가 붉은 빛을 내기 시작한다. 풋풋한 청록과 붉은 빛의 조화가 비로소 시작된 것이다.
저 붉은 빛이 농익으면 어떤 빛이었더라?
생각만으로는 그려지지가 않아 지난 사진들을 찾아본다. 아, 이제 며칠 지나면 저 빛깔을 다시 볼 수 있겠구나. 자연은 그 빛을 잃지 않을 터이니.
비 온 뒤 앵두에 맺힌 비이슬은 붉게 물든다.
어릴적 비이슬이 앵두의 붉은 빛을 훔쳐을 뿐 아니라 그 안에 있는 단맛도 훔쳐서 비온 뒤에는 앵두의 맛이 밋밋한 것이라 생각했다.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다. 물을 한껏 먹은 과실은 조금 맹맹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촉촉함과 약간은 시큼하면서도 단맛이 강한 앵두, 급하게 삼키지 못하도록 열매에 비해서는 제법 큰 씨앗을 보면서 버들잎을 띄워 나그네에게 물을 권하는 아낙을 떠올린다. 이렇게, 자연은 지긋이 바라보면 수없이 많은 상상의 파편들을 선물로 준다.
앵두와의 숨바꼭질
그 많던 앵두들을 아껴가며 하나 둘 따먹다보면 숨바꼭질이 시작된다.
잘 보이지 않던 앵두가 다음 날이면 "나 여기 있어!"하면서 붉은 빛을 더는 숨기지 못하기 때문이다.
설탕이나 감미료에 길들여진 아이들의 혀는 앵두가 주는 단맛을 잘 느끼지 못한다. 그 맛을 기억하는 이들에게나 겨우 그 맛을 전해줄 뿐이다. 자연 그대로의 맛을 느끼지 못한 아이들, 그 아이들에게 미안하다.
대학시절, 자취방 뒷뜰에 커다란 앵두나무가 있었다.
여름방학이 시작되기 전에 익어야 조금이라도 맛을 볼 수 있기에 언제 익나 손꼽아 기다리다 주인집 아주머니 눈치를 보면서 설익은 앵두라도 한 줌 따 먹어야 여름방학을 제대로 맞이하는 것 같았다.
그런 추억들을 간직한 앵두나무, 그 앵두나무가 내 삶의 반경 안에 있다는 것이 참으로 행복하다. 일상에서 느끼는 행복의 단편들을 무디게 만드는 자본의 세상에서 행복을 추구한다는 것이 그리 쉽지는 않다. 그러나 삶에서 포기할 수 없는 것 하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숨바꼭질하듯 숨어있는 행복을 찾는 일이 아닌가.
숨바꼭질, 그것은 영원히 숨어버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들키기 위한 것이므로 오늘 머리카락 살짝 보여주는 행복을 찾아 나서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