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경복궁 근정전의 모습. 2011년 3월 6일, 국립대구박물관에서 본 '일제 강점기 조선의 궁궐 유리건판 사진전'에서 본 풍경이다. 나라가 망하니 궁궐의 근엄했던 앞뜰에도 잡초만 무성하다.
 경복궁 근정전의 모습. 2011년 3월 6일, 국립대구박물관에서 본 '일제 강점기 조선의 궁궐 유리건판 사진전'에서 본 풍경이다. 나라가 망하니 궁궐의 근엄했던 앞뜰에도 잡초만 무성하다.
ⓒ 국립대구박물관

관련사진보기

'조선 시대의 풍경'을 구경할 수 있다? 그것도 일본사람이 그린 그림으로? 강력한 호기심이 발동한다. 21세기를 사는 사람에게 수백 년 전 조선 시대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어찌 방 안에 가만히 앉아만 있을 것인가. 지난 5월 31일, 집을 나선다.

지난 2011년 3월 초, 국립대구박물관 전시실을 찾았던 일이 떠오른다. '일제 강점기 조선의 궁궐 유리건판 사진전'을 보러갔을 때였다. 나라는 망했고, '왜놈'들이 주인이 된 세상에서, 조선의 궁궐들은 어떻게 변했을까.

경복궁 근정전의 모습을 보며 안타까워 했던 것이 가장 뚜렷하게 기억난다. '근정전'이라는 이름을 정도전이 지었으니, 경복궁 근정전은 조선 초기의 역사가 깃든 엄청난 역사유적이 아닌가. 하지만 대구박물관에서 본 근정전은 온갖 잡초들로 마당이 메워진 폐허일 뿐이었다. '500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유구하되 인걸은 간 데 없다'는 고려 말의 회고가도 있지만, 사진 속의 근정전은 인걸도 산천도 간 데 없는 '황량'에 지나지 않았다.

우키요에, 서민생활 그린 일본의 풍속 목판화

<평양 모란대>(가와세 하스이의 전시작을 사진으로 찍은 것입니다. 아래의 다른 그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양 모란대>(가와세 하스이의 전시작을 사진으로 찍은 것입니다. 아래의 다른 그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 가와세 하스이

관련사진보기


그런데 이번에 다시 조선 시대의 풍경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왔다. 경북대미술관에서 열리는 '한일 우키요에전'이다. 우키요에(浮世繪)란 14~19세기에 서민 생활을 기조로 그려진 일본 회화의 한 양식으로, 보통은 목판화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경북대미술관의 이번 전시에 '한일 우키요에전'이라는 제목이 붙은 것은, 일본의 우키예요 화가들이 우리나라와 일본의 당대 광경을 그림의 소재로 삼았다는 뜻이다.

당연히, 가와세 하스이의 <조선 풍경> 연작들이 유난히 눈길을 끌었다. 일본 풍경보다 조선의 풍경을 그린 작품들에 더 호기심이 가는 것이야 국적상 어쩔 도리가 없는 일이다. 전시실 벽에 부착되어 있는 '해설'을 읽어보니 그 중에서도 <조선 평양 모란대>는 초판을 소개한 것이라고 한다. 작품은 비가 내리는 날, 모란대 아래로 작은 나룻배를 타고 한 사람이 강물을 건너는 풍경을 담고 있다.

전시장을 찾은 목적이 그림의 회화적 가치를 찾는 데 있지 않고 '조선의 풍경'을 보는 그 자체에 있는 탓인지, 모란대 앞에 서서 나는 그저 '이곳에 한번 가보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려면 통일이 돼야 한다. 통일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내가 평양 모란대를 구경할 가능성은 전혀 없다.

2012년 6월 4일 아침신문을 보니 어떤 탈북 대학생이 민주당 임수경 의원에게 "수령님 명하지 않은 것을 마음대로 하면 우리 북한에서는 바로 총살입니다"라고 '농담'을 했다는데, 어찌 지구 유일의 분단 국가를 살면서 북한 땅 평양에 있는 모란대를 볼 수 있겠는가. 그런 한탄을 하면서 나는, 그림의 작품성을 감상하는 일보다도 그저 모란대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

평양 모란대, 개성 선죽교... 언제 가보나

<개성>
 <개성>
ⓒ 가와세 하스이

관련사진보기

<개성>도 보인다. 물론 황해도의 개성을 그린 작품이다. 노을인 듯 아침햇살을 받은 듯 멀리 보이는 산은 노랗게 물이 들어 있고, 다리 아래로 흐르는 맑은 물에는 고풍스런 기와집이 물살을 따라 비쳐 있는 그림이다. 아기를 업은 한 여인이 고개를 숙인 채 천천히 걸어가고 있다.

여인이 내게는 무척이나 힘이 없어 보인다. 옷차림이며 웅장한 와가들을 보면 삶의 고단함을 그린 작품으로 여겨지지는 않는데, 왜 나는 그런 느낌을 받는 것일까.

개성이라면 가장 먼저 선죽교가 떠오르기 때문일까. 그림 속에는 다리 맞은 편으로 와가들이 인접해 즐비하다. 이방원의 수하들이 말을 타고 달렸을, 정몽주가 죽은 바로 그곳은 아닌 듯하다.

그런데도 이제는 가볼 수 없는 곳이라 그런지, 아기를 업은 채 평화로이 거니는 개성의 여인을 보면서 나는 공연히 무력함을 느낀다. 아맏 개성에 가보고 싶은 마음을 가누지 못하는 주관적 감상자의 오류일 것이다.

<수원 서문>
 <수원 서문>
ⓒ 가와세 하스이

관련사진보기


옆에 전시돼 있는 <수원 서문>을 본다. 수원성이라면 통일 이전에도 충분히 볼 수 있는 곳이다. 하지만 나는 아직 수원성에 가보지 못했다. 그러므로 그림 속의 성문과 실제 성문이 어떻게 다른지 알지 못한다. 다만 보지 못한 곳을 그림으로, 그것도 조선 시대의 풍경으로, 게다가 일본인이 그린 일본화로 감상하니 이만하면 전시회를 찾은 보람은 충분하다.

이 그림에도 누각 위에 두 사람이 있다. <조선 평양 모란대>에도 두 사람이 누각 위에 있었는데 이 그림도 마찬가지다. 두 그림 모두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담고 있다. 가와세 하스이의 눈에 조선인들은 대화를 즐기는 사람들로 보였던 것일까. 아무튼 사람들이 정겹게 말을 주고받는 것은 무조건 좋은 일이다. 그래서 그림을 보는 내 마음도 편안해진다.

문득, <개성>이 '까닭도 없이' 쓸쓸해 보이던 '까닭'이 헤아려진다. <개성>의 여인도 혼자는 아니다. 아기를 업고 있으니 두 사람이다. 아기를 업은 어머니, 그를 어찌 고독하다 할 것인가. 나는 그것을 헤아리지 못했던 둣하다.

<지리산 천은사>
 <지리산 천은사>
ⓒ 가와세 하스이

관련사진보기

다시 <개성>을 본다. 이제서야 아기를 업은 여인이 정몽주보다도 더 뚜렷하게 다가온다. 가와세 하스이가 그린 그림 속에서 '조선'의 '풍경'을 찾은 것이다. 어머니는 아기를 업고 있고, 집은 물가의 와가이며, 멀리 아름다운 산에서 흘러내려온 맑은 물이 마을 안을 흐른다.

아, 그러고 보니 아까 얼핏 볼 때는 확인하지 못했던 두 사람이 그림 속에 더 있다. 무엇인가를 머리에 인 여인과 그 옆을 따르는 작은 여인이 아기 업은 젊은 어머니를 향해 마주오고 있다.

젊은 어머니는 머리에 짐을 인 여인을 만나러 가는 중인 듯하다. 그녀는 시어머니나 친정 어머니일 수도 있고, 장사를 하는 상인일 수도 있지만.

그림은 조선 시대 사람들이 그림속의 풍경처럼 그렇게 서로 만나면서 살아갔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젊은 어머니는 결코 쓸쓸하지 않지만, 나는 엉뚱하게 선죽교를 떠올리며 가볼 수 없다는 안타까움에 젖는다. 덕분에 공연히 그녀를 애잔하게 바라본 것이다.

그림으로 보는 수원성과 지리산 천은사

지리산 천은사는 아주 유명한 사찰이다. 그러나 나는 수원성과 마찬가지로 그곳에도 가보지 못했다. 그저 지금 그림으로 보고 있다. 아니, 천은사라기 보다는 천은사에서 일하는 여인들의 모습과 집의 구조 등을 보고 있다. 우키요에는 역시 풍경화가 아니라  풍속화인 모양이다.

흔히 동양화라는 말을 쓴다. 아직도 대학교 중에는 '동양화'기 전공의 하나로 인정되는 곳도 있다. 그러나 한국화, 중국화, 일본화는 있어도 동양 사람들 모두가 그리는 '동양화'란 없다. 세계의 그림은 서양화, 한국화, 중국화, 일본화 등으로 나눌 수 있을 뿐이다.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일본화를 구경하는 일은 그리 흔하지 않은 기회다. 그것도 '근대 풍경판화의 1인자'라는 가와세 하스이(川瀨巴水·1883~1957)의 그림이다. 게다가 당대의 '조선'을 그린 그림이다. 전시회는 2012년 7월 5일까지 열리므로, 그 안에 꼭 경북대 미술관을 한 번은 찾을 일이다.

가와세 하스이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는 경북대 미술관 2전시실의 모습. 그의 이력과 작품을 해설한 푸른 포스터가 사진 오른쪽에 보인다.
 가와세 하스이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는 경북대 미술관 2전시실의 모습. 그의 이력과 작품을 해설한 푸른 포스터가 사진 오른쪽에 보인다.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덧붙이는 글 | 본문에 삽입된 작품 이미지는 전시 작품을 찍은 것(2012년 5월 31일 촬영)으로 원작과는 색감이 다를 수 있다는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태그:#가와세 하스이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