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한국교회는 세상 사람들이 더 염려하는 수준으로 전락했죠. 교회가 세상의 아픔을 껴안아야 하는데 거꾸로 되고 있죠. 아래를 향해야 할 교회가 너무 위에 올라 있고, 가난한 자와 약자를 품어야 할 교회가 부자와 강자들을 대변하고 있고, 현실세계의 영성을 끌어안고 고민해야 할 교회가 자꾸 피안의 영성에만 도취된 까닭이죠.
사실 종교개혁의 기치도 밀실에 갇힌 부패의 타락을 타파하고자 비롯되었죠. 그릇된 권위주의에서 벗어나 성경의 권위를 높이 두려는 것 말이죠. 부자의 재물로 죄를 무마시켜주고 천국행 티켓을 부여하는 행위보다 성직자 자신의 죄를 더 회개하고자 몸부림쳤지요. 세속적인 성공주의와 결합된 이기적인 성령운동에서도 벗어나고자 했지요. 그와 같은 거룩한 가치를 다시금 내세워야 할 때라고 다들 말하죠.
한종호의 <밀실에 갇힌 예수>도 체제이데올로기와 성공주의의 성벽을 쌓고 있는 한국개신교의 부패와 타락을 질타하고 있지요. 교회가 세상의 빛이기는 커녕 예수의 빛을 막는 암막으로 전락하고, 세상을 썩게 만드는 세균이 되고 있다고 하죠. 그것은 목회자들의 교권주의와 교회 지도자들의 탐욕에서 비롯된 일이지만, 그들의 죄악을 지적하고 대응하지 못한 교회구성원들의 몫도 크다고 하죠. 믿음은 깊은 것 같지만 기득권을 버리지 못하는 교회 구성원들 말이죠.
교회의 현실을 떠받치고 있는 성장주의적 목회와 지도자들의 윤리적 부패, 변칙적인 세습, 신학적 피상성과 인기위주의 강단을 직시하면 얼마나 무서운 신성모독의 죄스러운 강이 흐르고 있는지 경악할 일이다. 교회의 재물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분쟁과 소문은 끊이지 않고, 교회 지도자들의 도를 넘어선 교권주의는 사회정의와 윤리를 내팽개치고 기득권에 기대어 교회를 자신들의 왕국으로 만들어 버렸다.(324쪽)그것은 사실이죠. 교회 강단은 화려한 미사여구로 장식하지만, 목회자 자신은 물론이고 교우들의 죄를 질타하지 못한 지 오래지요. 지난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교회를 부흥시키는 전략은 넘쳐났지만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일은 등한해 여겼죠. 성령의 역사를 통해 천국의 실재를 경험했지만 여전히 이 세상의 성공에 함몰된 교회를 키워왔을 뿐이죠.
그러나 예수가 원하는 생명의 길을 추구한 이들도 없지 않다고 하죠. 불의로 얼룩진 오늘의 현실에 침묵하지 않는 이들, 예수의 길을 일깨운 명징한 목소리를 낸 이들, 욕망을 채우는 길을 내려와 가장 낮은 자들과 함께 한 이들, 제나(自我)로부터 벗어나 참된 '얼나'를 추구하도록 채찍질한 이들 말이죠.
실명을 거론한다는 게 여간 부담스러운 일은 아니겠지요. 그런데도 이 책에서는 개신교 역사에 혼란스러움을 제공한 이들을 몇 분 언급하고 있죠. 조용기 목사, 김진홍 목사, 김장환 목사, 김동호 목사, 그리고 강준민 목사가 그들이죠. 이유는 그 때문이죠. 기독교가 가난하고 소외된 계층과 함께 낮은 곳을 바라봐야 하는데도, 그들의 기독교는 부자와 기득권층처럼 높은 곳을 독점하고자 했다는 뜻이겠죠. '성령운동'이나 '뉴라이트', '청부(淸副) 이야기'나 '록펠러의 축복'도 신학적 피상성에 머물러 있는 이기적인 '제나의 논리'였을 뿐이라고요.
본래 한국정치도 밀실정치가 문제였지요. 3김 시대의 야합도 그랬고, 그 이전의 정치권력도 그랬고, 작금의 당대표를 뽑는 행위도 결코 다르지 않는 일이겠죠. 그런 행위들을 교회에서도 버젓이 닮고 있죠. 투명하지 못한 재정집행을 비롯해 임직자를 선출과 담임목사 후임자를 뽑는 일도 그렇지요. 이 책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이지만, 감리교를 대표하는 삼형제 목회자들도 모두 부자세습을 했다고 하죠.
이 책이 좋은 것은 교회가 나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다는 점이죠. 동전의 양면처럼, 칼을 들이대면서도 뭔가 회복할 방침을 내 놓는다는 것이죠. 권위적인 교권주의보다 종교개혁의 기치인 '만인사제론'의 토대를 이루는 것, 교회내부의 민주적 토양을 제도적으로 확보하는 것, 체제이데올로기의 높은 곳보다는 광야의 빈 들을 지향하는 것, 그것이 곧 하나님의 나라를 받드는 초석이라고 하죠. 그것이 곧 교회의 밀실 메커니즘을 타파할 수 있는 길이라고 하죠. 그것이 곧 예수가 걸었던 길이자, 교회다움을 살리는 길이라 할 수 있겠죠.